1899년 5월 17일(양력)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홍릉) 9.7km 구간에 조선 최초의 전차가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이 전차는 1898년 1월 고종이 홀로 출자하여 설립한 조선 최초의 전기회사 한성전기회사가 들여온 것입니다. 한성전기회사를 실제 운영했던 미국인 콜브란은 기공식 초청장에서 “대중이 익숙해질 때까지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5마일(8km)로 운행할 것이며, 그 뒤로도 시속 15마일(24km)은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전차가 다니기 시작한 날로부터 아흐레 뒤인 26일에 전차가 종로(鐘路) 거리를 운행하다가 다섯 살 난 아이를 치어 죽였지요. 그러자 그를 본 백성은 전차를 부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차가 뒤집혀 죽거나 다친 사람도 생기자 고종임금이 명을 내립니다. “방금 들으니, 전차를 운행할 때 백성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낱낱이 찾아내어 구휼금을 넉넉히 지급함으로써 조정에서 근심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또 의정부(議政府)에서는 농상공부(農商工部), 경무청(警務廳), 한성부(漢城府)에 단단히 알려, 법을 만들어 보호하고 전차를 운전할 때는 반드
추사 김정희는 우리나라 최고 명필로 꼽힙니다. 하지만, 그 명필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조·형조참판을 지낸 추사는 54살에 동지부사가 되어 연경으로 떠나기 직전 10여 년 전 일어났던 ‘윤상도 옥사 사건’이 다시 불거져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지요. 험난한 유배지 생활은 귀하게 자란 한양 양반이었던 추사에겐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요. 좁은 방안에는 거미와 지네가 기어다녔고,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든 날,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힘겨운 삶 속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했으며 한국 비문과 중국의 비문 속 필체를 연구했지요. 유배지에서 그는 화가 날 때에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에도 붓을 들었음은 물론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었으며 어쩌다 한 번씩 받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 올 때에도 지체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로소 인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자신에게 엄습해오면 몸부림치지 않고 받아들인 그였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을 삭히
선비들은 예로부터 운치 있는 4가지 일 곧, 4예(四藝)를 들었는데, 4예란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걸고, 꽃을 꽂는 것입니다. 심신수양 방법으로 거처하는 방안에 향불을 피운다 하여, ‘분향묵좌(焚香默坐)’라는 말도 있지요. 선비들은 책을 읽을 때와 시를 지을 때, 차를 마실 때, 손님을 맞을 때 으레 옷을 단정히 가다듬고 향을 살랐다고 합니다. 특히 부부가 잠자리에 들 때는 사향을 두고 난향의 촛불을 켜두었습니다. 우리의 옛 여인들 몸에선 항상 은은한 향이 풍겼고, 향수, 향로제조기술은 어진 부인이 꼭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고 하지요. 또 모든 여자들이 향주머니를 노리개로 찰 정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의 처소에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갈 때는 반드시 향주머니를 차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993년 12월 12일 1,500여 년 땅속에 묻혀있다가 햇빛을 본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면 우리 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향을 생활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향을 피워 주변을 향기롭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으로부터 우러나는 내면의 향기까지 지닌다면 더 없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欲作家書說苦辛) 흰머리 어버이 근심하실까 저어하여 (恐敎愁殺白頭親) 그늘진 산, 쌓인 눈 깊이가 천장인데 (陰山積雪深川丈) 올해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말하네 (却報今冬暖似春)” 위 한시는 조선 중기 문신 이안눌(李安訥, 1571 ~ 1637)의 “집에 보낼 편지(寄家書)”입니다. 편지에 어버이 걱정하실까 저어하여 쌓인 눈이 깊이가 천장인데도 “올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고 씁니다. 이안눌의 효성이 가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또 한 편은 조선초 문인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눈 온 뒤(雪後)”입니다. “외로운 산마을에 눈은 쌓여 차가운데 (臘雪孤村積未消) 그 누가 사립문을 즐거이 두드리랴 (柴門誰肯爲相鼓) 밤이 되자 홀연히 맑은 향기 일어나니 (夜來忽有淸香動) 매화꽃 몇 가지가 피어난 걸 알겠구나 (知放梅花第幾梢)” 외로운 산마을에 눈이 쌓여 찾아올 이 없습니다. 하지만, 밤중에 갑자기 맑은 향기 일어나 매화가 핀 것이 참 기쁩니다. 매화는 눈을 뚫고 피는 꽃이지요. 한겨울 차가운 눈 속에서 매화는 우리에게 봄이 올 것을 예언합니다. 춥다고 움츠러들 까닭이 없지요. 이렇게 한시는 우리에게 따뜻한
“전하께서 소변이 잦으신 것은 신들이 생각해보건대 오래 여차(廬次,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에 계시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시니 추위에 몸이 상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지 사폭(邪幅)과 버선에다 가죽을 붙여서 아랫몸을 따뜻하게 하면 이 증세가 없어지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약을 드시면 비위(脾胃)를 상할 염려가 있습니다.” 위 내용은 연산군일기 2권, 1년(1495) 1월 8일(임진) 기록입니다. 임금이 오줌을 자주 눔으로 이를 치료할 약을 아뢰는 장면이지요. 그러자 임금은 “의원 말이 ‘쑥으로 뜨라.’ 해서 방금 시험하는 중이며, 잠방이 속에 산양가죽을 붙였더니, 오줌 자주 나오는 증세가 어제보다 조금 덜하다.”라고 말합니다. 아랫배를 쑥으로 뜨고, 바지와 버선은 가죽을 붙여 따뜻하게 하는 것은 한방에서 배꼽 아래를 따뜻하게 하고 가슴 위로는 차갑게 해야 건강하다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북풍 찬 바람 몰아치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모님 무덤에서 여막살이를 하던 조상의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전설 같습니다. 임금이면서 몸에 병을 얻으면서까지 예(禮)와 효(孝)를 다하던 모습이 신선합니다.
지난 10월 12일부터 11월 2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려 불화 대전-700년 만의 해후》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2년이 넘는 준비 과정 끝에 열게 되었는데, 국내,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총 44군데에 있던 고려불화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습니다. 한 점 보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볼 기회는 아마 이승에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들 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물방울 모양 광배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을 한 일본 센소지의 수월관음도는 압권이었습니다. 이 수월관음도는 작품 오른쪽에 “해동 승려 혜허가 그렸다.”는 글씨가 있어서 작가를 알 수 있는 불화로, 뛰어난 조형성과 균형잡힌 신체 비례, 정교하고 치밀한 붓놀림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이 작품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넘쳐나는 손끝의 기교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무심한 상태에서 붓을 들었기 때문에 감동적이라고 합니다. 미술사학자 조정육 선생은 “잘 그려야 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두드러진 재주를 자랑하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까지 덜어낸 후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칠한 붓질이다. 또 작가로서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 번째 대설(大雪)입니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대설이라고 하지만 꼭 이때에 눈이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그 까닭은 원래 역법 기준지점인 중국 화북지방 기후에 맞게 붙여진 것이어서 우리나라로선 맞지 않지요. 이날 눈이 많이 오면 다음해 풍년이 들고 포근한 겨울을 된다는 믿음이 전해집니다. “부네야 네 할 일 메주 쑬 일 남았도다 /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 농가월령가 가운데 십일월령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농사일을 끝내고 한가해지면 가정에선 콩을 쑤어 온갖 정성을 기울여 메주를 쑵니다. 잘 씻은 콩을 고온에서 짧은 시간에 익히는데 손으로 비벼보아 뭉그러질 때까지 충분히 익히지요. 삶은 콩은 소쿠리에 담아 물을 뺀 후 지역에 따라 둥글넓적하게 혹은 네모지게 모양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든 메주를 며칠 방에 두어 말린 뒤, 짚을 깔고 서로 붙지 않게 해서 곰팡이가 나도록 띄웁니다. 알맞게 뜨면 짚으로 열십자로 묶어 매달아 두지요. 메주를 달 때는 짚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메주를 띄우는 푸른곰팡이 번식이 왕성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메주를 띄울 때 이불을 덮어주기도 하는데 이때 짚이 아닌 나일론끈을 쓴다거나 면이불이 아닌
국립국어원에서는 매주 외래어나 속어를 바람직한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이 일은 먼저 바꿀 적당한 말을 누리꾼들에게 공모합니다. 그런 다음 국어학자나 토박이말 운동을 하는 전문가 집단에 의뢰하여 공모 된 말 가운데서 적절한 후보 5개를 고릅니다. 그 고른 것을 누리꾼들에게 투표하도록 하여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말을 다듬은 말로 결정하지요. 그동안 이런 과정을 통해 결정된 말을 보면 ‘멀티탭(multi-tap)’은 ‘모둠꽂이’로, ‘더치페이(Dutch pay)’는 ‘각자내기’로, ‘헤드셋(headset)’는 ‘통신머리띠’로, ‘스마트폰(Smart Phone)’는 ‘똑똑(손)전화’로 바꾸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체형을 알파벳 S자로 나타낸 것으로, 특히 옆에서 보았을 때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되는 풍만하고 늘씬한 몸매’를 가리켜 이르는 ‘S라인(S-line)’의 다듬은 말도 골랐습니다. 누리꾼들이 제안한 580개의 말 중에서 ‘ㄹ곡선’, ‘호리병 몸매’, ‘나들몸매’, ‘고리몸매’,‘처마몸매’ 등 다섯 개를 후보로 골라 투표한 결과 총 1,885명 중 1,156이 투표한 ‘호리병 몸매’(61%)가 다듬은 말로 뽑혔습니다. 이런 작업은 정말 꼭 필요하고 중
요즘 뮤지컬이 인기를 끕니다. 특히 한국 뮤지컬로 “명성황후”는 큰 인기를 얻었었지요. 그런데 이를 능가하는 진짜 토종 뮤지컬이 있습니다. 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물론 음악까지 순수 우리 것으로 만든 진짜 토종 뮤지컬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일명 채봉감별곡)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조선 후기 순조∼철종 때 작품으로 지은이를 모르는 애정소설을 각색한 것입니다. 사실적인 묘사로 조선 후기 부패한 관리들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하고 아버지를 효성을 받드는 한 여성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사랑을 성취한다는 내용이지요. 이 “추풍감별곡”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이 이끄는 서도연희극보존회 주최로 오는 12월 7일(화요일) 저녁 7시 30분 서울 남산 국악당에서 열립니다. 이 뮤지컬은 우리소리인 서도소리와 연극적인 요소 그리고 춤이 한데 어우러져 재미를 한층 더한 무대가 될 것입니다. 춤은 특히 화려한 전통춤 검무가 선보이며 공연은 서도소리로 마무리되어 청중들이 우리소리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전통의 올바른 보존과 발전은 “법고창신(法古蒼新)" 정신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옛것에 바탕을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아는 것
“저녁 어스름 감은사 터를 돌아 이견대에 선다 / 먼바다 끝자락 파도는 넘실대는데 갈매기는 날지 않네 / 천년 피리소리 / 파도소리 타고 나그네 귓전을 때리는 밤 / 솔바람에 옷깃 여미는데 / 수중릉 가까이서 우러른 하늘가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 / 오! 그 별 피리불어 우환 잠재운 그 넋 / 찬란한 신라 왕 문무의 화신이여! / 불어라! 불어라! 만파식적이여 /오래도록 신라의 넋을 전하라! 찬란히 그리고 영원히." 위는 이고야 시인의 ‘만파식적’이란 시입니다. 만파식적이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때의 전설상 피리인데 이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하는 신비한 악기이지요.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피리를 대금의 원형으로 봅니다. 이에 얽힌 이야기로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왕이 된 김유신이 함께 용을 시켜 동해 가운데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이를 기이하게 생각한 임금에게 용이 나타나 ‘이 갈라지는 두 대나무를 합해놓으면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