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는 “원님 덕에 나발 분다.” 또는 “사또 덕에 나발 분다.”라는 것이 있지요. 원님은 자신이 필요하여 행차를 하지만 행차 때 부는 나발 덕에 우연히 이익을 얻을 때 곧 윗사람 덕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발”은 무엇일까요? “나발(喇叭)”은 놋쇠로 된 긴 대롱을 입으로 불어 소리 내는 관악기입니다. 원래 이름은 한자로 “喇叭”이어서 “나팔-喇(나)”, “나팔 叭(팔)”로 ”나팔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보통은 센소리를 피해 “나발”이라고 합니다. 나발은 지공(손가락으로 막는 구멍)이 없어 한 음을 길게 부는 악기인데 태평소, 나각, 자바라, 징, 북과 함께 대취타(조선시대 군악대)에 편성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풍물굿에도 쓰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螺髮”이라고 쓰는 또 다른 나발이 있습니다. 이는 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如來像, 진리의 세계에서 중생 구제를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부처)의 머리카락을 말하지요. 강원 동해시 삼화사에 있는 보물 제1292호 “철조노사나불좌상”의 머리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은 신라 때 만들어진 신비한 피리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낮이면 갈라져서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 되는 신비한 대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만파식적을 불면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며, 백성의 만병이 낫고, 높이 치는 파도가 가라앉으며, 신라를 향해 왔던 적병이 물러갔다고 하지요. 이 만파식적을 바로 대금의 원형으로 봅니다. 대금은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 정악대금은 산조대금과 견주어 듣기 어렵고 연주하기도 어렵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정악대금을 편하고 아름답게 연주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이삼 스님이 그분으로 스님은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이 마비된 분인데 외팔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여음적”을 손수 만들고, 연주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스님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지요. 이삼스님은 이번에 대금정악 전곡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내놓고 그 기념으로 연주회를 엽니다. 오는 10월 2일(토요일) 늦은 7시 30분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연주회에는 거문고 김선한, 가야금 송인길, 장구 사재성, 피리 곽태규, 해금 윤문숙 등 이 시대 최고의 정악 연주
담은 집의 둘레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으려고 흙·돌·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한옥에서 담의 의미는 크지 않습니다. 뛰어넘으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도둑을 막으려는 뜻보다는 그냥 경계로서의 뜻이 더 강합니다. 그리고 한옥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요. 담의 종류로는 먼저 짚을 썰어 넣고 석회를 적당히 섞은 흙으로 다져서 굳힌 토담(흙담)이 있습니다. 또 자연에서 얻은 돌로 쌓아올린 돌담(돌각담)이 있습니다. 돌담에는 사립문을 달면 잘 어울리고, 담쟁이나 머루덩굴을 올리면 참 좋습니다. 그밖에 나뭇가지나 수수깡으로 둘러치는 경계인 울타리, 나무를 돌려 심어서 저절로 울타리가 되게 한 생울타리도 있지요. 흙을 이겨 사이사이에 넣으면서 돌로 쌓아 올린 담으로 죽담이란 것도 있는데 돌담과 흙담의 어울림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담으로 경복궁 자경전에 있는 화초담이란 것도 있습니다. 화초담은 여러 가지 빛깔로 글자나 무늬를 넣고 쌓는 담을 말하는데 꽃담ㆍ꽃무늬담ㆍ조장(彫牆)이라고도 부릅니다. 외로운 세월을 사는 대비의 장수를 비손하는 뜻이 담겨 있지요. 또 한 가지 담은 아니지만 김장밭 둘레에 개나 닭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야트막하게 만들어 두
1921. 절의 시작점 당간지주를 아십니까? 절은 당간지주(幢竿支柱)로부터 시작됩니다. 당간은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말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으면 당간 위에 깃발을 달아 신도들이 절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세워진 절에는 당간지주가 없지요. 대신 오래된 절에 가면 으레 당간은 없고 당간지주만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쇠(철)로 만든 것이라 녹슬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당간지주는 분황사(芬皇寺) 것으로 여기엔 거북으로 된 간대가 남아 있습니다. 공주 반죽동(斑竹洞) 당간지주(보물 150)와 갑사(甲寺) 철당간과 지주(보물 256), 금산사(金山寺) 당간지주(보물 28)에는 기대가 완전히 남아 있어 당간지주의 원형을 볼 수 있지요. 특히 중초사터(中初寺址) 당간지주(보물 4)는 흥덕왕(826년) 2월에 완성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간지주 양식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서울에서 가까이 있는 당간지주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장의사의 옛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는 “장의사터당간지주”입니다.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
가로등도 없고, 플래시도 없고, 자동차의 불빛도 없던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어떻게 다녔을까요? “차려 온 저녁상으로 배를 불린 뒤에 조족등을 든 청지기를 앞세우고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위 예문은 김주영의 ≪객주≫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족등”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밤길을 밝히는 도구였지요. 조족등(照足燈)은 밤거리에 다닐 때에 들고 다니던 등으로 댓가지로 비바람에 꺼지지 않게 둥근 틀을 만들고 그 안에 촛불을 켜는 등입니다. 특히 조족등은 순라꾼이 야경을 돌 때 주로 썼다고 합니다.조족등을 이름 그대로 풀어 보면 비출 조(照), 발 족(足), 등잔 등(燈) 자를 써서 발을 비추는 등이라는 뜻이 되지요. 아무리 먼 길이라도 발밑을 보아야만 갈 수 있으므로 “천리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속담과 뜻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조족등 없이 칠흑 같은 깜깜한 밤길을 가려면 돌부리에 채일 수도 있고, 물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으며, 움푹 파진 곳에 헛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롱불 수준인 조족등이 밝아야 얼마나 밝았겠느냐만 어두울 땐 이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점점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앞날에 한 줄기 빛도 없다고 하는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는 추석, 가배절, 중추절, 가위, 가윗날로도 불립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가운데서 ‘추석’이란 말을 가장 많이 쓰는 듯합니다. 과연 어떤 말이 가장 바람직할까요? 먼저 ‘중추절(仲秋節)’은 가을을 초추(初秋), 중추(仲秋), 종추(終秋) 3달로 나누어 음력 8월 가운데에 들었다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또 가장 흔하게 쓰는 ‘추석’은 옛 중국 유가(儒家)의 경전인 ‘예기(禮記)’에서 나온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중추(中秋), 추중, 칠석, 월석 등의 말을 쓰는데 중추의 추(秋)와 월석의 석(夕)을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추절도 추석도 중국에서 유래한 것일뿐더러 그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신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으로 토박이말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그 유래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추석’이나 ‘중추절’보다는 뜻이 분명한 아름다운 우리말로 넉넉한 '한
오늘은 24절기 중 추분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입니다. 이날을 기준으로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며 가을도 그만큼 깊어가지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추분의 의미는 이것이 다일까요? 아닙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균형의 세계를 뜻합니다. 지나침과 모자람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가운데에 덕(德)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중용의 뜻이 있지요. 그런가 하면 추분엔 향에 대한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추분의 들녘에 서면 벼가 익어가는데 그 냄새를 한자말로 향(香)이라고 합니다. 벼 화(禾) 자와 날 일(日) 자가 합해진 글자이지요. 한여름 뜨거운 해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벼는 그 안에 진한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내면에 치열한 내공을 쌓아갈 때 저 내면 깊이엔 향기가 진동하지 않을까요? 또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강렬한 햇볕, 천둥과 폭우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이렇게 추분은 중용과 내면의 향기와 겸손을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미역국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빈 그릇을 살강에 놓는데 사립 쪽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위 글은 한승원의 ≪해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전 한옥 부엌에는 “살강”이란 것이 있었지요. 살강은 부엌의 부뚜막이나 조리대 위의 벽 중턱에 가로로 기다랗게 드리운 선반을 말합니다. 살강은 보통 대나무로 발을 엮거나 긴 통나무를 두 개 엮어서 만드는데 밥그릇이나 반찬그릇을 올려놓고 쓰기에 편하게 한 것입니다. 살강은 대부분 1층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더러 살강 위에 한 개의 선반을 더 얹어서 2층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는데, 위 칸에는 소반이나 허드렛상을 얹어 놓는 등 부엌을 더 넓게 쓰기 위한 수납공간이었던 것이지요. 어머니께서 누룽지를 긁으시면 언제나 살강 위에 놓아두셨습니다. 하지만, 종종 쥐란 놈이 먼저 실례를 하기도 해서 어머니께서는 누룽지를 담은 그릇을 더 큰 그릇으로 덮어두곤 하셨지요. “살강”, 이제 보기 어려운 것이지만 살강을 보게 되면 어머니께서 “얘야 살강 위에 누룽지 있다.”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
8월에서 10월까지 시골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꽃 고마리를 보셨나요? 그런데 고마리는 왜 그런 이름을 지녔을까요? 먼저 고마리는 수질정화에 뛰어난 구실을 하는 고마운 풀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그런가 하면 고만고만한 것들이 모여 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환경이 좋지 못한 물속이나 습지에서도 줄기차게 퍼져 나가서 인제 그만 되었다고 '그만이풀'이라고 부르던 것이 고마리로 변했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마리는 형제들이 많지요. 메밀과에 속하는 식물들과는 잎과 꽃이 비슷한데다 모여 피었을 때의 느낌까지 많이 닮았습니다. 며느리밑씻개나 며느리배꼽 그리고 미꾸리낚시와는 꽃만 보고는 쉽게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닮아서 형제간으로 볼 수 있고 줄기에 가시가 있는 것까지 닮은 쪽(물들이는 풀)이나 여뀌 식물과는 사촌 간이라 할 수 있지요. 고마리는 하수구나 개천 등 더러운 물 주변에서도 잘 자라서 더러운 물을 정화해주지요. 워낙 생명력이 강해 많이 퍼져 나가 인제 그만 되었다는 뜻에서 고마리라 불린다지만 그래도 더 많이 오래도록 피어있으면 좋겠습니다. 더러운 물도 정화하고 도시에 찌든 우리 마음도 정화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너무 큰 욕심일까요? 참
8월에서 10월까지 시골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꽃 고마리를 보셨나요? 그런데 고마리는 왜 그런 이름을 지녔을까요? 먼저 고마리는 수질정화에 뛰어난 구실을 하는 고마운 풀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그런가 하면 고만고만한 것들이 모여 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환경이 좋지 못한 물속이나 습지에서도 줄기차게 퍼져 나가서 인제 그만 되었다고 '그만이풀'이라고 부르던 것이 고마리로 변했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마리는 형제들이 많지요. 메밀과에 속하는 식물들과는 잎과 꽃이 비슷한데다 모여 피었을 때의 느낌까지 많이 닮았습니다. 며느리밑씻개나 며느리배꼽 그리고 미꾸리낚시와는 꽃만 보고는 쉽게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닮아서 형제간으로 볼 수 있고 줄기에 가시가 있는 것까지 닮은 쪽(물들이는 풀)이나 여뀌 식물과는 사촌 간이라 할 수 있지요. 고마리는 하수구나 개천 등 더러운 물 주변에서도 잘 자라서 더러운 물을 정화해주지요. 워낙 생명력이 강해 많이 퍼져 나가 인제 그만 되었다는 뜻에서 고마리라 불린다지만 그래도 더 많이 오래도록 피어있으면 좋겠습니다. 더러운 물도 정화하고 도시에 찌든 우리 마음도 정화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너무 큰 욕심일까요?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