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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어려운 백성 세금 대납해주고 세차례 옥살이 풀어 준 가문"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16)] 해남 윤씨 녹우당 종택

어초은 유효정 선생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 가문 최고 덕목으로 기려
고산 윤선도, 죽기 전 84세 때 극빈 이웃들 돕기 위해 '의장(義庄)' 마련
공재 윤두서는 가난한 이들 기근서 벗어나게 자활의 길 열어줘
후손들도 '대대로 나눔 실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종가' 만들어가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녹우당 취재를 위해 종손 윤형식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나눔을 실천한 종가를 취재하려고 한다는 말에 선생은 전화 잘 주셨습니다. 녹우당은 대대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집안의 내력입니다. 그래서 녹우당 유물전시관에도 그 점을 강조하고 있지요.” 


한국에 종택과 고색찬란한 고택은 많지만 특별히 나눔이라는 주제에 맞는 집을 찾느라 매회 어려움을 겪던 가운데 윤형식 선생의 전화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였다.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듯 기자는 상쾌한 마음으로 전남 해남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종부가 우려내온 따뜻한 전통차도 맛볼 수 있었다 


   

▲ 종손 윤형식 선생


   

▲ 녹우당 전경


대담 도중 걸려온 전화는 '한국 최고의 정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고산 윤선도의 금쇄동 관리인으로부터였다. “자네가 고생이 참 많네. 그렇게 열심히 해주니 내가 마음이 놓이네.” 따뜻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이었다. 선생은 지금의 관리인이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손수 나서서 금쇄동에 살도록 해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녹우당 대대로 나눔을 실천한 종가였음을 후손 대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 일 같이 여겨졌다. 


아무리 유명한 종가라 해도 한 집안에 두 사람 이상의 걸출한 인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은데 이곳은 다르다. 녹우당 종택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를 배출한 한국에 둘도 없는 뛰어난 집안이다. 그러나 이 종가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고산의 4대조 할아버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선생이다.  


녹우당 종택에서는 지금도 후손들이 집안의 제일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라고 한다. 녹우당 종택 족보 첫 머리에는 어초은 윤효정 공이 어려운 지경에 이른 백성들을 3번이나 구제해 주어 삼개옥문적선지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여 옥에 갇히는 사람들이 많자 이에 어초은 공이 관에 세금을 대신 내고 이들을 풀어주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3번이나 하였다는 것이다.


   

▲ 고산 충헌공 가훈 '기대아서(寄 大兒書)' 일부


이후 녹우당 종택은 이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를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다. 특히 고산 선생은 74살 되던 해 유배지 함경도 산수에서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 기 대아서(寄 大兒書)’를 통해 후손들에게 지켜야할 실천윤리를 당부한다. 이에 고산의 손자가 충헌공 가훈이란 제목을 붙여 금과옥조로 삼았다. 


1. 어려서부터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함을 즐기고 모든 것을 아껴서 생활하도록 해라.
2. 지금 해야 할 일은 바로 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마라.
3. 나에게 불행이 왔다고 그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4. 까닭 없는 우월감을 갖지 말고 상대보다 내가 무조건 낫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렇다고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도 갖지 마라.
5. 집안 일가 친족 형제 사이에 우애를 갖고 어려운 이를 돌보며 부리는 아랫사람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게 하고, 노비일지라도 일한 만큼 반드시 품삯을 계산해서 주어라.
6. 단정한 몸가짐과 단정한 말씨 바른 예의로서 상대를 대해라.
7. 어떤 상황이든지 화는 늦게 낼수록 좋은 것이다. 먼저 화를 내기보다는 상황을 먼저 깨닫고. 남의 성공을 일부러 깎아내리려 하지 마라.
8. 언제나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말로 평온함을 유지하며 생활해라.
9. 어떤 상황이든지 이익을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진심과 정의로서 말하고 행동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해라.
10.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항상 조상을 공경해라. 


구구절절 사람이 지켜야할 덕목들이다. 이 가훈만 지킨다면 성인에 이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러니 어찌 녹우당 종택이 빛나지 않을 수 있으랴.


고산은 말로만 후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었는데 언제나 가난한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84살에는 의장(義庄·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농장)’을 마련하여 의곡(義穀·옳은 일에 쓰는 곡식)을 보관해두고 극빈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선비로서의 삶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일생을 보낸 사람이 윤선도였다. 


   

▲ 공재 자화상(국보 제240호)


   

▲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 때 썼다는 백동경


어초은 윤효정 선생과 고산 윤선도 선생의 나눔 정신은 후대인 공재 윤두서 대에 와서도 빛을 발한다. '해남 윤씨문헌(海南尹氏文獻)' 공재공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해 마침 해일(海溢)이 일어 바닷가 고을은 모두 곡식이 떠내려가고 텅 빈 들판은 벌겋게 황톳물로 물들어 있었다. 백포(白浦)는 바다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 재해(災害)가 특히 극심하였다. 인심이 매우 흉흉하게 되어 조석 간에 어떻게 될지 불안한 지경이었다. 관청에서 비록 구제책을 쓰기는 했으나 역시 실제로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백포 사방 산은 사람들의 드나듦이 없고 또한 나무를 기른 지 오래되어 나무가 꽤 무성했다. 공재공은 마을사람들에게 함께 그 나무들을 베어내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한마을 수백호의 주민이 이에 도움을 받아 모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나 떠돌아다니거나 죽는 일이 없게 되었다.”

공재는 단순히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하는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스스로 일을 해서 기근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던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공재는 또한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재로부터 시작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림에 뛰어났다. 특히 공재의 그림을 보면 나물캐기, 짚신삼기, 목기깎기, 돌깨기 같은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어려운 삶을 사는 백성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들이다. 공재는 이뿐만이 아니라 말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며 함부로 타기조차 삼가 하여 백마도’, ‘어린 새끼와 말같은 그림도 그려 동물에게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 백성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 공재 윤두서의 '나물캐기'


고산은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후손들에게 가능하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대신 실용적인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특히 고산은 단순히 문학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당시 사대부로서는 감히 다루기 어려운 의학, 천문, 지리, 점성술, 풍수지리, 음악, 미술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이를 직접 응용하였는데 한의학에 정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고산의 위대함은 11살 때 산사에 들어가 책을 읽었을 정도로 스스로 독학하여 이 모든 학문을 섭렵했다는 데 있다. 이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해남 윤씨가의 독특한 가학으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녹우당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위대한 종가였다. 이후 공재 윤두서라는 걸출한 화원이 나왔고, 공재의 뒤 윤덕희, 윤용까지 이어지는 삼대 화가집안이 되었다  
 

   

▲ 공재와 가까웠던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편액


이러한 가풍은 400년을 이어와 지금의 후손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다. 현 종손인 윤형식 선생의 딸은 대학을 마치고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손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집을 내기도 했다. 고산에서 시작된 박학다식의 유별난 문화 가풍은 그 후손들을 문화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놀게 했고, 그리하여 끊임없이 문화의 향기를 전해주는 종가가 되었다. 

 

종손은 학예사가 있음에도 유물전시관을 손수 안내를 해주었다. 유물전시관은 고산과 공재가 종가의 선대였음을 증명하듯 국보급 유물들이 즐비하다. 특히 공재가 자화상(국보 제240)을 그릴 때 썼다는 백동경이 신기하다. 지금 거울에 견주면 그리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 거울인데도 그런 뛰어난 자화상을 그렸음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기자는 다른 유물보다 가풍(家風)-백성을 사랑한 종가라는 소제목이 성큼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 다른 유물전시관에서 이렇게 나눔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고산 선생의 종가는 나눔을 종가의 가풍으로 삼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높은 학문을 자랑하기 급급하거나 윗대는 나누고 베푸는 것을 잘했지만 후대에 와서 인색한 집안이 많은데 고산 선생 집안은 예나 지금이 한결 같아 보여 기자도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 유물전시관에 '가풍(家風)'이 '백성을 사랑한 종가'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을 둘러본 뒤 기자는 해남버스터미널로 향하고 종손 어르신은 종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박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뒤돌아보니 그 차가운 빗속을 유유히 걸어가시는 모습이 걱정이 돼 서울행 막차 고속버스 속에서 전화를 드렸다. “비를 좀 맞긴 맞았지만 따뜻한 방에서 조금 있으면 됩니다. 걱정 마세요. 그보다는 멀리 오셨는데 식사 대접도 못해 미안합니다. 언제 다시 날 잡아 오셔서 오늘 못 본 금쇄동과 보길도까지 한번 들러보면 좋겠습니다.” 


종가의 철학을 취재하다가 녹우당의 따뜻함에 흠뻑 취했다. 녹우당이 훌륭한 종가라는 명성은 고산과 공재라는 걸출한 인물과 더불어 그 후손이 지금도 여전히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