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제79돌 광복절 행사가 정부 주최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주최 기념식으로 각각 열린 것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친일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반대하면서 따로 기념식을 단행했다. 윤석열 정부는 최근 말썽이 된 건국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광복회는 논평을 통해 “1948년 이승만의 건국절 주장은 선열들의 피로 쓴 독립운동의 역사를 혀로 덮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세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첫째,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후유증일 것이다. 1948년 9월에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이승만의 방해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법에 따라 특별재판소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형 1명을 포함하여 12명밖에 안 되었다. 그마저도 실제 사형 집행은 1명도 없었고, 대부분 감형이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26,529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청 재판에 가장 먼저 끌려 나온 피고들은 나치 협력 언론인들이었다.
[우리문화신문=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 구한 말 ‘한자-한문 폐지론’이 힘을 얻어갈 때, 그에 대한 중요한 반발의 큰 줄기 하나는 글이 도(유교)를 담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따라서 유교 교양을 가진 선비들은 한자-한문 폐지를 곧 유교윤리 철폐로 인식하였다. 대동학회의 여규형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라는 기표와 유교라는 기의가 단단하게 맺어져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다. 한자-한문 폐지와 신식 교육의 도입, 유교적 인재를 선발하던 과거제도 폐지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관이 있었다. 그렇지만 서양 사람이 세운 배재학당에서도 한문은 주요 교과목이었다. 어쨌든 한문만 배우던 서당 교육에서 보면 큰 변화였다. ‘한자 폐지-한글로만 쓰기’ 운동의 주역이었던 외솔 최현배는 유학을 어떻게 보았을까? 1922년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우리말과 글에 대하야”에 유교와 한자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 드러나 있다. “(땅이름 등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고, ‘아버지’를 ‘부친, 춘부장’ 식으로 바꾸어) 무슨 말이든지 한어로 하면 점잖게 보이고 우리말로 하면 상되게 보인다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나쁘고 남은 훌륭하다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저는
[우리문화신문=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 한겨레신문 지난 6월 22일 치에는 한겨레말글연구소 김진해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한글의 역설”이란 글이 실렸다. 우리말에 영어가 많이 섞여 있게 된 것이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고 한글 탓이라는 주장이다. 한글은 소리만 본뜰 뿐 뜻을 담지 않아 몸놀림이 가벼워 들리는 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적는데 한자는 뜻이 소리와 함께 있어서 매번 소리로 적을지, 뜻으로 적을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으로 진단하였다. ‘电视’(텔레비전=전기+보다), ‘电脑(’(컴퓨터=전기+뇌), ‘电影’(영화=전기+그림자), ‘手机(’(핸드폰=손+기계)을 보기로 들었다. 한글만으로는 문제가 많고 한자를 써야 영어를 막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조선의 선비들은 빼어난 글자인 한글을 ‘언문’, ‘암클’이라 얕보고 중국 글자를 떠받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5세기부터 한글이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였을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한글은 소설이나 편지 같은 사적 영역의 문서에서나 쓰였다. 한문을 잘하면 과거를 통하여 출셋길이 훤하게 열렸다. 학문이나 교육이 한문 경전을 읽고 풀이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과거 답안을 한문으로 제출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