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황규현 애원 음반표지 목이 메어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님은 철새 따라 가버렸네 허무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소리 그대는 아나요 무정한 내 사랑아 몸부림 쳐봐도 재회의 기약 없이 가버린 그님을 소리쳐 불러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얼마 전 40년 만에 동두천을 다녀왔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옛 모습을 잃은 건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그나마 변하지 않고 있는 개울과 역 광장을 토대로 옛 모습을 그려 보았다. 미군 제2사단이 있던 자리며 개천을 따라 늘어선 기지촌자리, 자취방이 있던 생연리. 본토음악 배우겠다고 전국의 기지촌을 떠돌던 시절, 동두천읍 보산리는 기지촌의 대명사이자 8군무대의 대명사였다. 오늘은 기지촌과 8군무대를 회상하며 얘기꽃을 피워본다. 일반적으로 기지촌에 있는 클럽과 8군무대를 같은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 둘 사이엔 엄연히 경계가 있다. 8군무대는 부대에 부속된 클럽을 지칭하는 용어로 장교들이 출입하는 officers 클럽, 하사관들을 위한 NCO 클럽, 사병들이 이용하는 EM클럽이 있었다. 8군무대에 서기 위해선 미 국방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장계현 음반 표지 동녘에 해뜰 때 어머님 날 낳으시고 귀엽던 아가야 내 인생 시작 됐네 열두 살 시절엔 꿈 있어 좋았네 샛별의 눈동자로 별을 헤던 시절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 했네 너밖에 몰랐고 너만을 그리며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던 밀어 그러나 둘이는 마음이 변해서 서로가 냉정하게 토라져 버렸네 새파란 하늘처럼 그렇게 살리라 앞날을 생각하며 인생을 생각 하리 벽면을 빼곡히 채운 LP판을 보니 제가 처음 음악다방에 갔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대학생이던 저의 형은 음악다방과 생맥주집 구경을 고교 졸업선물로 제게 주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며 듣고 싶습니다. 민생고를 덜어보려고 음악카페를 할 때였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들어온 한 중년이 일만 장이 넘는 음반에 넋을 빼앗겨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한참 만에 신청곡 쪽지를 보내왔다. 그래, 한때는 매일 전파를 탈 만큼 인기가 좋았었지. 신청곡이 나가는 동안 나 역시 그 시절 추억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내가 처음 다방에 갔을 때 커피 값이 30원이었던가? 50원이었던가? 자장면이 35원 이었으니까 50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한국문화신문=김상아 기자] ▲ 나훈아의 고향 음반 표지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역 이뿐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 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 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 때 흰 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 역 고향 역 가운데 코스모스는 그리움이다. 아득한 그리움이다. 그날,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에 나부끼던 영월역의 코스모스는 역사 처마의 단청처럼 고왔다. 삭도에서 날리는 석탄가루에 새까매진 플랫 홈이 배색이 되어 더욱 그랬다. 서울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명절이나 쇠고 가라며 붙잡던 이웃들. 타관살이가 정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며 눈물로 배웅하던 반장 댁. 그들을 뒤로한 채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로 우리 모자가 떠나던 날, 그때는 몰랐다. 코스모스 씨방 속에 그리움의 가시가 여물고 있다는 것을. 제천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탔을 때부터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새 세상에 정신이 팔렸다. 영월선의 딱딱한 의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푹신한 중앙선 의자는 신천지로 향하는 철부지 소년의 포근한 꿈을 부추겼고, 서울거리를 가득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우리는 그녀 아버지의 의뢰로 혹시 정보기관의 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체 없이 서울을 벗어나기로 하였습니다. 계절은 벌써 가을의 끝자락에 와 있었습니다. 야간열차는 우리의 앞날만큼이나 캄캄한 어둠속을 달려 부산역에다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남국이라고는 하지만 늦가을 새벽바람은 사정없이 우리 몸을 파고들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도피 길에 올랐기에 아침밥을 사먹고 나니 벌써 주머니가 바닥이 났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굶으며 무작정 거리를 헤맸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피로와 허기에 지친 우리 몰골은 영락없는 노숙인이었습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여행 왔다가 여비가 떨어져 그러니 차 삯을 빌려주면 나중에 우편환으로 꼭 보내드리겠노라고 통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전 몇 닢도 아닌 돈을 선뜻 내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후덕하게 생긴 약사분께서 속는 셈치고 천 원짜리 지폐 열장을 금고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우리는 허기를 때우고 다시 새벽열차에 몸을 싣고 나의 외가로 향했습니다. 절망이 비구름처럼 몰려와 객차 안을 덮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여행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잠 못 이루는 영혼들의 다정한 벗 DJ께. DJ께서 들려주시는 흘러간 노래들을 들으니 옛사랑이 생각나 이 사연을 띄웁니다. 젊음의 싱그런 내음이 백양로를 가득 메운 우리 학교의 축제기간이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학우들이 모두 축제장으로 나가고 없는 텅 빈 도서관에서 창백한 얼굴로 아침부터 법전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지났는지 허기가 느껴진 나는 학생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문리대 앞을 막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요란한 함성이 들려와 발길을 옮기니 배구시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간호대학과 음악대학간의 여자부 시합이었습니다. 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구경을 하고 있는데 코트안의 열여덟 명선수 가운데 유난히 내 눈길을 끄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키도 그리 크지 않은데다 실력이 가장 떨어진다고 판단해서인지 후위 수비수를 맡고 있었습니다. 상대편 선수들은 그녀를 타깃으로 정해 집중적으로 그녀에게 서브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관중들은 그녀가 공을 못 받을 때마다 박장대소했고 그녀는 속이 상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습니다. 결국 간호대의 전략이 주효해서 그녀가 속한 음대가 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다시 도서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부부의 연은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연인들 가운데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한 채 가슴 아픈 이별을 하는 쌍들도 많다. 사실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각기 다르게 형성된 성격을 맞추어 간다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인가?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기에 헤어짐도 어려웠지만, 요즘은 만나기가 쉬워진 탓인지 헤어짐도 쉬운 것 같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剛愎)해진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타인의 사고와 가치관이 자신과 다르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자신만이 옳다고 우기고 융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기와 독선이 남녀관계라고 다를 바 없어 상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결별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개인의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경우에는 그래도 마음에 상처가 덜 남는다. 둘 사이의 마음이 잘 맞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라 할지라도, 부부의 연이 닿질 않아 아픈 이별을 해야 하는 연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 경우엔 평생 쓰라림을 달래며 살아가야 한다. 전생에서 수백 번의 인연을 쌓아야 부부가 된다는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요행히 사고를 당하지 않고 몹쓸 병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나도 이러겠지. 전신마취 할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들다나다 하겠지. 사랑하는 나의 딸은 동공 풀린 애비 눈을 바라보다가 혹시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떨리는 입술에 귀를 갖다 대겠지. 애비가 눈을 감을 때마다 맥박을 짚어 보다 지쳐 잠이 들겠지. 나의 친구들은 나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다녀갈까? 어쩌면 나와 비슷한 시간에 내 친구 하나가 이 푸른 별을 떠날지도 모르지. 1부 방송을 마치고 광고가 나가는 틈에 잠시 전화기를 켰을 때였다. 형님. 이모할머니께서 위독하답니다. 당숙께서 꼭 좀 연락 달라고 하십니다. 사촌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우리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땐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뵈었는데, 이젠 기억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이모할머니 소식이었다. 몇 십 년 만에 들려오는 소식이 임종소식이란 말인가? 혈연의식이 희미해지고 전통이 무너져 내린다며 개탄을 하던 내가, 나도 모르게 시류에 휩쓸려 버린 것을 자책하며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길에서 그냥 지나치면 못 알아보겠구나. 당숙과 겸연쩍은 인사를 나누고 침대로 눈길을 돌리니, 이 세상 사람이라 하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는 작품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정신적 위기가 찾아오면 일부러 눈을 가리고 생활을 했다 한다. 한 일주일쯤 그렇게 하다보면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살아나고 마음의 눈이 띄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미안이나 유리알 유희같은 걸작들이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물들이다. 필자도 그것을 흉내 내어 봤으나 일주일은커녕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안대를 벗어던지고 말았다. 헤르만 헤세는 네 살 때 이미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의지력을 지닌 아이라는 평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나와는 그릇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내가 함부로 흉내 낼 일이 아니었으나 그 잠깐 동안의 경험에서 그나마 건져진 것은 있다. 헤세의 정신력에도 탄복했지만 평생을 앞을 못 보고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의 의지력에 경탄과 함께 존경심이 인 것이다. 시력상실은 삶의 90%를 잃은 것이라 한다. 일반인들은 모르고 살지만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그만큼 비중이 큰 것이다. 그 절대적 비중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은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세상은 공평하다는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칠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조그만 산골학교 운동장에도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도 더위에 지쳐 잎이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지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마저 둔탁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덥다고 투덜대거나 눈빛이 흐려진 아이는 한명도 없었다. 비록 꽁보리밥에 고추장밖에 없는 점심이지만 꿀보다 달게 먹고 서로 뒤질세라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학교에 있는 공이라곤 바람 빠진 축구공 하나밖엔 없었지만 남자아이들은 먼지가 뽀얗게 일도록 공놀이를 하였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나 오자미던지기를 하며 놀았다. 어느새 즐거운 점심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우물가로 몰려들어 두레박물을 돌려 마시며 타는 목을 적시고 있을 때였다. 머리카락이다! 한아이가 자지러지는 듯 소리쳤다. 모두들 놀라서 들여다보니 정말로 머리카락 두어 가닥이 떠 있었다. 사람이 빠져 죽었다! 아이들은 혼비백산하여 교실로 도망쳤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용이 되려는 이무기를 소사아저씨가 삽으로 찍어 죽여서 우리가 소풍 갈 때마다 비가 온다고 하더니 이제는 사람이 빠져죽고. 내가 혼잣말
[한국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며칠 전, 구름이 성난 태양열을 양산처럼 가려주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에 오랜만에 산행에 나섰다. 비 오리 떼가 자맥질하는 시내를 건너서 조붓한 산길로 접어드니 벌써 풀잎이며 나뭇잎들의 엽록소가 검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저것들이나 내 인생이나 한풀 꺾인 건 마찬가지구나. 반백의 청승을 읊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목화밭에서 비단 같은 꽃잎들이 솔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인지라 한걸음에 달려가 보니 일찍 꽃을 떠나보낸 가지에는 제법 꽈리만큼 자란 열매가 달려있었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어른들 몰래 따먹는 몇 알 풋 목화는 낮잠보다도 맛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 콧잔등 시큰둥해지며 풋 목화 한 알을 입으로 가져갔다. ▲ '하사와 병장' 음반 표지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을 약속 하던 곳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우리 처음 헤어진 곳도 목화밭이라네 기약도 없이 헤어진 곳도 목화밭이라네 서로멀리 헤어져도 서로가 잊지 못한 곳 조그만 목화밭 목화밭 나 이제사 찾아온 곳도 목화밭이라네 그리워서 찾아온 곳도 목화밭이라네 그 소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