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니, 궁중의 옛일부터 국가 제도, 다른 집 족보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한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서 질문하면 하나하나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혜경궁지문」, 《순조실록》, 1816년 1월 21일 / 20쪽 혜경궁 홍씨. 정조의 어머니이자 순조의 할머니인 그녀는 죽은 다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총명하다고 해서 ‘헌’, 늘 조심스러웠다고 해서 ‘경’이라는 글자를 썼다. 칠십 년 가까이 계속된 그녀의 궁중생활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런 살얼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열 살에 입궁한 혜경궁은 빨리 어른이 되었다. 1744년 가례를 올리고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약 18년 동안 이어진 불안한 혼인 생활,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외척 척결에 따른 친정의 몰락, 그리고 마침내 손자 순조가 즉위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칠십 년 궁중생활이었다. 정병설 작가가 쓴 이 책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효백 교수가 《한국 진달래 오라》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표지에는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일본 무궁화 가라’가 적혀있고, 또 표지 윗부분에 ‘어느 경솔한 자가 진달래를 놔두고 궁벽한 무궁화를 조선의 꽃이라고 불렀는가’라고 적혀있습니다. 표지에 적혀있는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강 교수는 ‘일본 무궁화를 왜 우리나라 국화로 하느냐? 그보다는 한국 진달래를 국화로 해야 한다’라고 목청껏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궁화는 일본 열도 전체에 자생함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금북정맥 이남에서만 자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일본에는 무궁화에 대해 많은 자료가 있음에 반하여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강 교수는 이런 무궁화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는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로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전에 펴낸 책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자세히 얘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책의 끝에 그럼 무궁화 대신 어느 꽃을 국화로 봐야 할지에 대해 여러 후보 꽃을 들면서 그 가운데 진달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했습니다. 그렇게 강 교수는 그 책에서는 진달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하고 책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97년부터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서 사진관을 경영했던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개인이 카메라를 소유한 시대가 와서 시골 사진관은 거의 폐업상태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유리건판에서 민초들의 순수한 삶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했다. 사진사 본인들은 인지 못 했겠지만, 그들은 시대를 새기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간도사진관 시리즈 제2권 《기억의 기록》(토향출판)을 쓴 사진가 류은규 씨의 말이다. 《기억의 기록》은 사진 류은규, 글 도다 이쿠코 씨 부부가 펴내고 있는 재중동포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값진 작품집이다. 류은규 사진가는 이어 말한다. “한국 사진사(寫眞史)라고 하면 해방 전까지의 항일운동이나 생활 모습, 광복 뒤의 우리나라 사진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북한과 중국 조선족 사진사(寫眞史)도 우리가 함께 품어야 할 범주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재중동포의 사진기록을 모으고 정리하는 일은 그동안 소홀히 해왔던 삼분의 일의 우리 사진사(寫眞史)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1993년 한중수교 이전,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정말 몰랐던 생소한 부분이다. 이번 책에서는 광복 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꽃은 무궁화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을 불렀고, 무엇보다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가 나오니까요. 그런데 왜 무궁화가 나라꽃(國花)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사실 무궁화는 공식적으로 나라꽃으로 지정된 것도 아닙니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가 ‘무궁화가 왜 나라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파고들어 《두 얼굴의 무궁화》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강 교수는 전 세계의 나라꽃을 조사해보니, 세계 각국은 나라꽃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5가지 특성을 보유했거나, 보유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⓵ 지리성 : 원산종 또는 자생지가 분포하고 있거나 국토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한 꽃 ⓶ 민주성 :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 지정이 아닌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선정한 꽃 ⓷ 역사성 : 예로부터 그 나라의 신화, 역사, 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한 꽃 ⓸ 접근성 : 국민 대다수가 좋아하고 국민 일상생활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꽃 ⓹ 상징성 : 나라와 겨레의 특징과 전통을 대표할 수 있는 꽃이거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특산종 그런데 강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왕실은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조선 왕실에 태어난 아이는 특별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핏줄로 태어난 것부터가 특별한 일이거니와, 특히 왕위를 이어갈 ‘원자’로 태어난 아이는 그 출생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존망이 그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에, 왕실에서는 자녀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 정성이 반드시 아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조기교육’은 그저 뛰어놀고 싶을 나이의 아이들에겐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물론 특별한 자질이 있는 경우에는 공부로 가득 찬 일과를 즐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버거운 일상이었다. 신명호가 쓴 책,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은 조선 왕실의 태교부터 육아, 청소년 시기의 갈등 해결 방법까지 자녀교육의 모든 면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았나 싶어질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조선 왕실을 보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p.243)좌의정 채제공: 회의를 시작한 지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원자는 마치 심어 놓은 나무처럼 단정하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는 <고향의 봄> 동요의 노랫말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 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지금도 ‘새터마을 소답꽃집’으로 불리는 그 집이다. 한국 조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 조각가, 김종영은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태어났다. 조은정 작가가 쓴 이 책, 《생각을 새긴 조각가, 김종영》은 한국 조각계의 거목인 김종영의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미술관’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어린이미술관’ 시리즈는 ‘온 가족이 보는 예술책’답게,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고도 알차게 내용을 담아냈다. 김종영의 증조부 김영규는 조선이 강제로 합방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했다. 그리고 1915년, 증손자 김종영이 아버지 김기호와 어머니 이정실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종영은 집안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사랑방에서 글씨를 쓰고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며 자랐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30년, 일본인이 세운 학교가 아닌 민족재단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동기 채백 교수가 쓴 책 《민족지의 신화》를 보았습니다. 채 교수는 오랫동안 부산대 교수로 근무하다 2022년 8월 정년퇴임 하였습니다. 내가 부산에 근무할 때 동기들 모임으로 가끔 만났던 채 교수가 책을 냈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두었었지요. 하지만 그동안 앞선 자기 차례를 주장하는 책들을 먼저 보다가 얼마 전에야 이 책을 보았네요. 아참! 책이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채 교수는 명예교수로 물러나 있었네요. 그동안 교수 정년퇴임은 선배들 이야기이지 우리에게는 아직 미래의 일인 걸로 치부했는데, 어느새 지난해, 올해에 걸쳐 동기들이 다 강단을 떠납니다. 한 친구는 늘 학교 연구실로 향하던 발길이 어느 순간 멈추니, 우울증이 왔었다고도 하더군요. 저도 정년으로 작년에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 업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그래도 변호사로서의 업무는 계속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근하면 기록 보고, 소속 변호사가 써온 서면도 검토해야 하며 재판에도 나가야 하니, 아직은 뒷방 신세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거~ <《민족지의 신화》 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얘기가 엉뚱한 길로 빠져들었네요. 채 교수는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오래전 4·1아우내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아우내(병천, 竝川)에 수년 동안 머무르면서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과 생가, 열사를 기념하는 공원을 나의 산책 코스로 정하고 거의 날마다 그곳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나는 유관순 열사의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는 《김구응 열사 평전》(틈새의 시간 출간)을 쓴 전해주 성공회 신부의 말이다. 전해주 신부는 충남 아우내(병천) 성공회교회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뜻밖에 ‘4·1아우내 만세운동’의 주역이 유관순 열사(이화학당 유학생, 당시 17살)가 아닌 당시 지역 유지이자 아우내에 첫 근대식 학교인 청신의숙(靑新義塾)을 세우고 더 나아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김구응 열사(당시 32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글줄깨나 쓰는 신부'로 알려진 전해주 신부는 아우내 성공회교회에 부임한 뒤, 4년 뒤에 맞이할 성공회교회 100돌을 기념하기 위한 ‘100주년 교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회사(敎會史) 집필을 위해 교회에 보관되어 오던 1920년~30년대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김구응 열사였다. 그 자료는 강애단 신부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1월 17일. 대련 수상경찰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는 짧았다. 그가 살다 간 태산 같은 인생에 견주면 허무한 결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간다지만, 30년이 넘는 숱한 시련에도 건재했던 아버지였기에 아들 이규창의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는 곧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가 대련으로 간다는 정보가 어떻게 일본 경찰에게 들어갔는지 모든 연결망을 동원해 샅샅이 알아보았다.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이 누구인지 찾게 될 때는,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김은식이 쓴 이 책, 《이회영-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는 1910년, 망국의 파도가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그해, 일제의 치하에서 단 한 해도 살 수 없다며 1910년 12월 30일 재산을 처분해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일가의 이야기다. 나라가 망했을 때 조상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으며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권문세족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책에 소개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자결, 사설 게재, 무장투쟁을 하는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대다수 양반은 일제가 던져주는 달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구절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봄은 왔다. 비록 35년이나 걸렸지만, 빼앗긴 들은 주인을 찾아 기름진 옥토가 됐다. 특히 우리 문화에 푹 빠진 한류 팬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 만큼 문화 강국이 됐다. 그러나 봄이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위세가 맹위를 떨칠 때, 우리 문화의 정수이자 보배라 할 만한 문화유산도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 책, 《빼앗긴 문화재에도 봄은 오는가》에 실린 열 가지 유산이 특히 그랬다. 이 책은 다양한 경로로 나라 밖으로 빠져나간 문화재를 다루며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고,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의 문화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생생히 일깨워준다. 만약 식민지 시절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문화재가 오롯이 우리 곁에 있었을 텐데, 절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책에 실린 가야 문화재, 경복궁, 경천사 십층석탑, 고려청자, 몽유도원도, 북관대첩비, 의궤, 유점사 53불, 인쇄술, 수월관음도가 모두 보배 같은 유산이지만, 특히 경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