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진보쵸 역 내려 와이엠시에이 가던 날 빌딩 숲 도로변 팬지꽃 반겼지 한국말 유창한 다즈케 교장 선생님 나그네 반기며 손잡고 안내한 10층 자료실 누런 낡은 신문지 속 2.8독립운동에 빛나던 영광의 얼굴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스물일곱명 내란음모죄로 잡혀가던 조선 청년들 팔 벌려 보듬어 준 사람 후세다츠지 마수 땅 와이엠시에이 하느님 보호하사 조선독립만세 열여덟 먹던 해 미야자키 농촌에서 청운의 변호사 꿈꾸며 후세 변호사 말했다지 높은 관직 보다 바른 일하며 살고 싶다고 군국주의 더러운 진흙 속에 핀 청아한 꽃 한 송이 후세 변호사 길이길이 그 이름 기억할지니 기억할지니. ▲ 1931년 무렵 후세다츠지 변호사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신인의 조선인상(新人의 朝鮮印象)>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布施辰治;1890-1953)는 그렇게 조선의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국악속풀이 145에서는 정가(正歌)를 기본창으로 하는 소리극 형태도 선을 보여 그 성공 가능성을 이야기 하였다. 정가란 템포가 느리고, 정좌해서 긴 호흡으로 불러야 하고 악기 반주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다소 까다롭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점에서 젊은 층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장르이다. 또한 판소리나 속요에 비한다면 극적 요소가 풍부하지 않은 편이어서 소리극으로서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은 종목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정작 정가극 황진이를 통해서 본 결과는 예상밖이어서 소리극으로서의 그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황진이라는 기녀는 인물이 출중할 뿐 아니라, 시가(詩歌)의 작창에도 뛰어난 여류문인으로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한 사람이어서 이야기의 구성이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여인이다. 그래서 정가극으로 공연되기 전에도 황진이에 관한 애호가들의 관심은 대단했고 공연후에도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나 주연 배우들의 노래나 연기에 관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국립국악원은 황진이 이후에도 또 다른 정가극을 시도하기에 이르는데, 201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우리 고유의 설인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이날을 맞아 그동안의 시름을 잊고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새배를 하고 성묘를 하며, 정을 다지는 하루다. 또 온 겨레는 “온보기”를 하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하느라 길은 북새통이다. “온보기”라 한 것은 예전엔 만나기가 어렵던 친정어머니와 시집 간 딸이 명절 뒤에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반보기”에 견주어 지금은 중간이 아니라 친정 또는 고향에 가서 만나기에 온보기인 것이다. 설날의 말밑들 ▲ 설날의 해돋이(여수 향일암) 그러면 “설날”이란 말에는 무슨 뜻이 들어 있을까? “설”은 먼저 "서럽다"라는 뜻이 있는데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리다',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는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본다. 또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이야기도 한다. 처음 가보는 곳은 낯선 곳이며,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새해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낯설다고 생각하여 ‘
[그린경제/얼레빗 = 김슬옹 교수]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님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낸다. 어떤 분인가를 밝히기 위해 종이로 만든 신주인 지방을 써 놓고 절을 한다. 이 지방이 지금 눈으로 보면 어색한 한문으로 되어 있다.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소상히 모르는 상태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는데 제사상을 받으시는 조상과 제사를 올리는 후손이 소통이 잘 안 되는 그런 글귀로 되어 있다. 지금 보통의 자방을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일 경우 각각 “顯祖考學生府君神位, 顯祖妣孺人 000氏神位”라고 쓴다. 할아버지인 경우 벼슬을 안 지냈다고 '학생(學生)'이란 말이 붙어 있고 할머니는 벼슬하지 못한 남자의 부인이라는 뜻으로 '유인(孺人)'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학생(學生)'은 말광(사전)에 “생전에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명정(銘旌) 등에 쓰는 존칭”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존칭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유인(孺人)'도 말광에 “생전에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의 신주나 명정(銘旌)에 쓰던 존칭”이라고 나오지만 “학생”과 마찬가지로 존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극소수만이 벼슬을 할 수 있었던 시대의 관습을 우리말 구조도 아닌 한문 구조, 그것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도쿄 오오츠카역(大塚驛)에서 와세다대학까지는 동경 순환선인 JR야마노테선(山手線)을 타면 그만이지만 이 역에는 이 전철 말고도 1량짜리인 이른바 땡땡 전차가 서는 곳이라 나는 학교에 가는 날이면 이 전철을 타고 다녔다. 옛날에 경성시내를 달리던 전차 같은 분위기의 이 전차는 달랑 1량짜리로 와세다대학에서 미노와바시까지 달리는 전차로 정식이름은 토덴아라카와센(都電荒川線)이지만 동경 사람들은 이를 땡땡 전차(일본말로는 친친덴샤 ちんちん電車)라고 불렀다. 철로 곁이 바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 행여 철로로 뛰어드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운전사가 땡땡(친친)하고 벨을 울려 붙은 이름이다. 서울에서 전차가 모두 사라지고 지하철과 전철이 들어섰듯이 일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특이하게 일본에는 이런 땡땡 전차(노면전차, 路面電車)가 전국적으로 그 시대의 낭만을 지우기 아쉬운 듯 여전히 달리며 사랑받고 있다. ▲ 동경의 명물 땡땡전차는 와세다대학에서 미노와바시까지 달린다. 홋카이도나 가마쿠라 그리고 교토의 광륭사 등에서도 1량짜리 전차를 만날 수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옛 정서를 자아내는 추억의 낭만 전차 일 수 있겠지만 도쿄의 땡땡 전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경기소리극의 제작과 이를 전문적으로 공연할 단체, 즉 경기소리극단의 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소리극에 참여할 소리꾼들과 연출자, 연주자, 무용수 등과 전문 스탭들은 어느 정도 확보가 되어 있어 당장이라도 창단된다면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소리극을 창단하는 주체는 재정능력이 없는 보존단체나 개인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국가나 지방정부, 또는 기업이라는 이야기, 정부기관이나 담당부서의 수장이 결심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처럼 생각되는데도 막상 소리극단을 창단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라는 이야기르 f했다. 그리고 소리극단의 창단과정이 어렵다고 하면 우선은 국립국악원이라든가 경기도립국악단과 같은 국공립기관들이 앞장서서 소리극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이야기, 국립국악원의 소리극 중에는 정가극 황진이처럼 정가를 기본으로 하는 작품도 무대에 올렸는데, 그 발상 자체가 침체된 정가 음악의 저변을 확대하는 길이라는 점에서 크게 환영받을 일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가(正歌)란 점잖은 선비들의 노래로 첫째는 가곡(歌曲)이고 둘째는 가사(歌詞)이며 셋
[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 오래 전 한 시골마을의 추수감사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마을 아주머니들은 양동이에 막걸리를 담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게 했다. 한 서너 순배쯤 돌자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고 흥이 나 시끌벅적한 마당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내게 징채를 쥐여 주며 징을 쳐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때까지 한 번도 풍물 악기를 제대로 만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누구나 쉽게 칠 수 있으니 한번 쳐보란다. 할 수 없이, 사실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의 객기에 결국은 엉겁결에 징채를 잡았다. 아마도 술기운이 아니었으면 그때 징채를 잡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꽹과리, 장구 등 치배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징을 울려댔다. 정말 흥겨웠다. 평생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적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만일 이것이 서양 음악이었다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풍물굿은 가능하다. 풍물굿은 연주자가 관객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즉석에서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마음 되어 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사람들은 벤토(도시락)를 즐겨 먹는다. 편의점에 가면 손쉽게 사먹을 수 있도록 비닐그릇에 다양한 내용물을 담아 파는가 하면 철도역마다 에키벤(驛弁)이라고 해서 각 지방의 특산물로 요리한 도시락이 여행객들을 즐겁게 한다. 그런가하면 가정집에서도 초밥 도시락을 주문해서 먹는다. 이때의 도시락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도시락이 아니라 보통 찬합이라 부르는 큰 그릇에 담긴 것으로 손님이 왔을 때도 이것을 시켜준다. 한국에서는 도시락이라고 하면 야외나들이 갈 때 김밥 따위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쯤으로 여기지만 일본의 도시락은 그것 보다는 훨씬 다른 차원의 음식으로 이를 벤토문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하다. ▲ 편의점 등에서 파는 벤토(왼쪽) 부인이 애교스럽게 싼 벤토 벤토(弁當)라는 말은 중국 남송시대(南宋時代)의 변당(便當)에서 유래한 말로 예전에는 한자를 변도(便道), 변도(辨道)라고도 썼다. 이러한 벤토는 풍신수길시대인 안도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1573-1603)에는 오늘날과 같은 칠기(漆器) 도시락이 선보였다. 그러나 일반 서민이 쓰기보다는 꽃놀이(花見)이나 차모임(茶會) 같은 때 귀족들이 주로 썼다. 그
[그림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앞에서는 경기소리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는 임정란 명창과 《대동가극단》이야기를 하였다. 임정란은 과천에서 대동가극단을 이끌던 임종원의 집안으로 경기 소리극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는 이야기, 그래서 낙시대장 서얼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소리극을 꾸준히 공연해 왔고, 경서도 소리의 전수나 방향에 관한 학술대회도 주최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는 이창배와 정득만에게 경서도 소리를 배운 뒤, 묵계월 문하에 들어 문화재 예능보유자후보가 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향땅 과천에서 현재는 경기도 문화재의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경기소리 전수관을 운영하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는 점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동가극단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그 전통으로 경기소리극단의 창단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빼놓지 않았다. 경서도 소리의 전문가들은 임정란 명창뿐 아니라, 그 누구도 소리극단의 창단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그래서 소리극 운동을 열심히 펼쳐 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명창에 이춘희, 김혜란, 백영춘, 최영숙, 최근순, 유창, 김경배, 유지숙 등이 있다. ▲ 국립국악원 정가극 영원한 사랑 이들은 소리극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삿포로라고 하면 우동을 떠 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삿포로 맥주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춥고 황량한 땅 북해도(홋카이도) 삿포로에 맥주회사가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138년 전인 1876년(명치 9년)의 일이다. 당시 북해도 개척사들이 삿포로에 개척사맥주양조소를 설립하여 이듬해부터 냉제삿포로맥주(冷製札幌ビル)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 맥주박물관 전경(예전 삿포로맥주 공장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굴뚝과 붉은 벽돌의 삿포로맥주공장은 지금 맥주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연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눈이 한길이나 쌓인 1월 초순 맥주 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부터 친절한 직원들이 단체 관광객들을 팀 별로 데리고 다니면서 삿포로 맥주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마지막 코스에서는 맥주 1컵씩을 기호대로 골라 마시게 하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었다. 1876년 삿포로 맥주는 맥주공장을 가동한 이래 10년 만에 삿포로맥주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조와 판매를 시작하게 되며 1906년에는 일본맥주양조인 에비스맥주와 오사카맥주인 아사히맥주가 합병하여 대일본맥주주식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이 무렵 시즈오카현, 나가노현, 니이가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