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송서와 율창에 관하여 소개를 하였다. 송서(誦書)란 고문(古文)이나 옛 소설과 같은 글을 읽을 때에 높낮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며 구성지게 낭송하는 것을 말하고, 시창이란 한시(漢詩)를 긴 가락에 올려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고 소개하였다. 한마디로 송서란 글을 읽는 것인데 글방에서 읽는 식과는 달리 멋을 넣어서 읽는 것이고 시창은 글을 읊되 청(淸)을 붙여서 읽는 것을 말한다.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 선생의 ≪한국가창대계≫는 송서와 시창을 별개의 장르로 설정하고 송서에는 다음과 같은 6곡을 원문과 함께 해설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1)“어젯밤 부던 바람 금성이 완연하다”로 시작하는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2)“우 근진소지의단은 의신의 평생 소원이”의 삼설기(三說記), 3)“임술지추 칠월 기망에 소자여객으로”으로 시작하는 전적벽부(前赤壁賦), 4) 후(後)적벽부(赤壁賦), 5)“굴원이 기방에 유어강담하고 행음택반 할 새”로 시작하는 어부사(漁父辭), 6)“부 천지자는 만물지역려요, 광음자는 백대지과객이라”로 시작하고 있는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 序) 등이다. 이 중에서 삼설기는 경기민요의 묵계월(본명; 이경옥)명창이 1930년대 중반, 그의 스승
국악기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옆길로 들어서서 오늘은 송서(誦書)율창(律唱)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해 보도록 하겠다. 2012년 9월 25(화) 13;00부터 서울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는 이름도 낯설은 “송서(誦書)율창(律唱)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전국학술대회가 열린다. 송서(誦書)란 무엇이고 율창(律唱)이란 무엇인가? 송서란 주로 고문(古文)이나 옛 소설과 같은 글을 읽을 때에 밋밋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며 구성지게 낭송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말엽까지도 글공부하던 선비들은 책을 읽을 때, 고저를 살려 노래하듯 책을 읽었기에 옆에서 듣던 사람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고, 본인도 글 읽는 것이 싫증나지 않아 계속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율창, 혹은 시창이란 말은 한시(漢詩)를 긴 가락에 올려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여기 율창의 율(律)은 음(音)이다. 곧 율려(律呂)이다. 율려는 음의 높고 낮은 고저를 구별하는 음이다. 서양음악의 12반음이 있듯이, 전통국악에도 황(黃), 태(太) 중(仲)등 12음이 쓰이는데, 이를 12율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창이란 말은 시(詩)를 노래한다는 말이기에 일반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삶을 마감하는 일은 슬픈 일일까? 자유를 만끽 하는 것일까? 일본의 신문지상에서 심심찮게 보도되는 이른바 “독거사(獨居死)”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일본사회에 대두 되고 있다. 일본말로는 “在宅ひとり死, 자이타쿠히도리시”라고 하는데 적당한 우리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독거사(獨居死)’로 해보았지만 “재택1인죽음”, “자기집에서 죽기” 등으로 바꾸어도 마땅치는 않다. 2012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자택에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은 10명중 1명에도 못 미치며 나머지는 모두 병원이나 양로원 등의 시설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개호보험(介護保險)”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지만 실질적으로 노부모를 보살필 여력이 없는 가족이 많은 것도 한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월말 도쿄시내에서 열린 사회학자 우에노(上野千鶴子) 씨의 ‘독거사’ 세미나에는 무려 450명의 고령자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렸다는 소식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우에노 씨는 ‘독거사’를 맞이하려면 첫째 본인의 강한 의지 둘째 경제력 셋째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천만 엔이나 하는 유료 양로원에 그간 모은 재산을
한국의 전통악기들 중에서 입으로 불어 소리 내는 악기를 흔히‘피리’또는‘퉁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잘못 전해오는 명칭인 것이다. 모차르트의 유명한 오페라 중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마적(魔笛)을 우리말로는 요술피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적(笛)을 피리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휘파람을 구적(口笛), 입피리라는 말도 쓴다. 그러나 우리음악에서 말하는 적, 예를 들면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같은 악기는 취악기이지만 종적(縱笛)이 아니라 횡적(橫笛),즉 가로 부는 취악기를 의미한다. 피리는 반드시 소리를 유발하는 혀(舌), 또는 서를 관에 꽂아서 세로로 부는 관악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입으로 부는 악기를 모두 피리요 퉁소라고 구분 없이 부르는 것은 마치 서양의 관악기를 금관악기든 목관악기든 모두 나팔이라 통칭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전통음악에서의 피리는 대나무 관대, 즉 죽관(竹管)에 8개의 구멍을 뚫고‘겹혀(double reed)’흔히‘서’라고 하는 리드를 꽂아 부는 악기를 말함이다. 피리처럼 겹혀를 쓰는 서양 관악기에는 오보에(ob
오사카 백제사와 예산 향천사 뜰을 거닐며 일본 최고(最古)의 설화집으로 고대 일본인들의 불교의식과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 있는데 ≪日本現報善靈異記≫가 그것으로 줄여서 ≪日本靈異記≫ 라고 부르는 이 책은 헤이안시대 (平安時代.794-1192) 초기에 쓰인 것으로 상·중·하권으로 나뉘며 모두 11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승이야기를 비롯하여 위로는 왕부터 귀족,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책 ‘상권 14’에는 백제 고승 의각스님 이야기가 있어 흥미를 끈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의각스님은 원래 백제국 스님으로 사이메이왕(37대 齊明天皇, 재위 655- 661) 때에 일본에 건너와서 나니와쿄(難波京)의 백제사에 살았다. 의각법사는 키가 7척(210미터)으로 불교에 널리 통달했으며 항상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때에 혜의(慧義)라 불리는 스님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나와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흘깃 의각스님 방을 바라보니 그 방에서 신기한 광채가 새어나왔다. 혜의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손가락으로 뚫고 들여다보았더니 단정히 앉아서 경을 독송하고 있는 의각스님 입안에서 별안간 광채가 났다.”는 내용이다. 일본 최고(最
일본에서 건너온 화투를 보면 12달을 상징하는 것들이 거의 꽃과 나무 그림이다. 1월을 나타내는 것은 소나무고, 2월 매화, 3월 벚꽃, 4월 흑싸리, 5월 난초, 6월 모란,7월 홍싸리, 8월 달, 9월 국화, 10월 단풍, 11월 오동, 12월 수양버들을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화투에는 식물들이 그려져 있을까? 서양의 카드에는 다이아몬드나 왕관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답은 일본의 고전 속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나팔꽃으로 불리는 아사가오는 일본의 평안시대(平安時代, 794-1192) 이후 문학작품 속에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하나는 무상함이요, 다른 하나는 남자에 대한 사랑이다. “아침에 일어나 꽃을 보려하니 벌써 시들어 버리는구나”(新古今集), “믿음직한 그대 얼굴을 보는 듯 피어난 꽃”大和物語과 같이 나팔꽃에 대한 시가 있는가 하면 일본 고전수필의 백미라고 하는 즈레즈레구사(徒然草, 139단)에는 봄과 여름의 꽃으로 제비붓꽃(杜若), 패랭이꽃(撫子), 등나무(藤), 황매화(山吹)를 꼽고 있다. 특히 등나무는 일본 최고의 시집인 만엽집에서 ‘가난한 어부가 해 입는 등나무 옷’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고킨슈(古今集)에
일본인들처럼 오마모리(부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신사(神社)나 절에 가면 반드시 부적을 파는 곳이 있는데 다양한 모양새만큼이나 지니고자 하는 목적도 제각기 다르다. 좋은 일이 생기도록 비는 뜻에서 몸에 지니는 것으로는 운이나 복 불러오기, 건강 지키기, 학업성취, 이사안전, 교통안전, 안산기원, 연애성취, 금전운, 사업번창, 출세, 승진 등 인간세상에서 빌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 대상이며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는 액막이(厄除け)나 마귀 쫓아내기(魔除け) 용 부적을 몸에 지니기도 한다. 또한 가정이나 회사, 절, 신사 같은 공간에 걸거나 놔두는 오후다お札)는 크기가 크지만 오마모리(お守)는 몸에 지니는 것으로 크기도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많다. 이러한 부적은 가방이나 자동차 안에도 놓고 책상 위에도 놓아두는 등 사람에 따라서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부적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부적을 파는 곳은 주로 신사와 절인데 신사에서 파는 것은 부적이 곧 신체(神體)를 뜻하는 것으로 신사의 이름이나 축복의 말이 쓰여 있으며 신사에 모시는 신상(神像)의 다양한 모습으로 부적을 만들어 팔고 있다. 절에서 파는 부적은 그
“명치44년 2월(1911년) 조선은행 건축도 무사히 낙성식을 마쳐 나는 은행 측으로부터 5천 엔을 보너스로 받았다. 그 돈으로 경성 남대문 밖 봉래정 봉학산에 내 집을 지었다. 부지는 5,000평으로 남산이 바라다 보이고 한강물이 마치 정원수처럼 발아래 굽어보이는 명승지인데 내 나이 33살 때 일이다. 봄이면 산 정상에 올라 한강의 경치를 즐기는데 마치 극락에 이른 것 같았다.” 33살 청년의 나이에 부지 5천 평의 대저택을 지을 만큼 조선에 건너온 초보 건축가의 조선생활은 풍족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전인 1907년에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조선에 건너와 조선은행의 공사 감독을 맡았다. 한반도와 만주의 경제권을 쥐려는 포석으로 착수한 일본 제1은행 한국 총지점(조선은행 본점)이 조선에서의 첫 공사 감독이었다. 일본 하마마츠 출신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2.8-1963.12.21)는 일본의 건축가로 조선, 만주를 비롯하여 출신지인 시즈오카 현의 공공건물 건축에 많이 관여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공부가 죽기보다 싫어 아버지로부터 무척 꾸지람도 많이 들었던 그는 전기기사가 꿈이었으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여 훗날 조선은행의 설계를 맡게
“메이지신궁은 메이지천황의 성덕을 영원히 존경하고 사모하고자 국민들의 뜨거운 정성으로 만든 곳입니다. 이곳은 메이지천황과 쇼우켄황태후의 신령을 기리는 곳으로 정초 신사 참배지로 전국최고의 참배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이지신궁의 한국어판 자료에는 친절하게 메이지신궁의 역사와 경내도 그리고 신사참배 방법 등이 자세히 쓰여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하라주쿠와 NHK방송국에서 가까운 이곳은 일본 최고의 신사참배지로 부각되고 있을 뿐 아니라 꽃창포 정원으로 유명하여 종종 일본인 친구들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하곤 한다. 육중한 도리이를 지나 20여만 평에 이르는 경내에는 명치왕 사후에 전국에서 보내온 10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마치 원시림에 들어선 기분이다. 일본의 신궁(神宮)은 신사(神社)나 대사(大社) 보다는 급이 높은 곳이지만 신사이든 신궁이든 한국의 사당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들 시설은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시설이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사당과 같은 역할이지만 다른 점은 문중 단위가 아니라 전 국민이 참배한다는 점에서 좀 독특하다. 또한 메이지신궁 같은 곳과 달리 후시미이나리대사 같은 곳은 농업번창의 신을 모시는 등 반드시 죽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국악기는 약 60여종에 달한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악기가운데는 음악 연주용이 아닌 의식에 필요한 의물(儀物)에 가까운 것도 있고, 사용법을 잃고 보관되어 있는 악기들도 포함되며,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과 같은 음악에 상징적으로 편성되는 악기들도 상당수 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악기들을 제외하면 약 20여종의 악기가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이 국악기를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전통적으로 해 오던 계통에 따른 분류와 재료에 따른 분류가 있고 현대의 분류법에 따라 연주법(演奏法)에 의한 분류방법, 민족음악학적인 분류법 등 네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구분하고 있다. 첫째의 분류방법은 음악의 계통에 따라 구분하는 분류이다. 음악의 계통이라 함은 과거 우리 음악의 갈래를 의미하는 말로 중국 고대의 아악(雅樂)인가, 중국의 속악인 당악(唐樂)인가, 한국땅에서 생성된 향악(鄕樂)인가 하는 분류에 따라 그 악기가 어느 계통의 음악에 편성되어 쓰였는가 하는 즉, 용도에 따른 분류방법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의 분류에서는 향부악기로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향피리, 소관자, 풀피리 등 7종이 있고 당부악기에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