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악기, 곧 국악기는 대나무나 명주실을 이용하여 만든 악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편경처럼 돌로 만들어진 악기도 있고 편종이나 방향처럼 쇠붙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것도 있으며 흙이나 가죽, 나무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여하튼 전통악기의 대부분은 자연산 재료를 그대로 활용하여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전통음악의 고저(高低), 즉 선율을 이끌고 있는 악기들은 관악기(woodwind instrument)와 현악기(stringed instrument)들이다. 관악기의 주재료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고, 현악기들은 거의가 명주실을 오동나무통 위에 얹어 소리를 내고 있다. 선율을 만들어 나가는 주된 악기들의 재료가 대나무나 명주실, 오동나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음색은 벌써 식물성 재료를 활용한 부드럽고 친환경적인 자연의 소리라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서양 음악이 금속성 악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지성의 소리요 과학적인 음악이라면, 한국의 악기들은 식물성 소재에서 나오는 따스한 감성과 서정을 느낄 수 있는 철학적인 음악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국악기의 음색은 서양악기에 비해 어둡고, 탁하며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미국에서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교포3,4세로 이어지면 모국의 역사를 알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더군다나 영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더욱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사람들에게 한국의 수많은 잔다르크를 알리기 위해서는 번역이 꼭 필요합니다만 고맙게도 미국에서 이 책 번역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다음 주 부터는 일본어 번역 작업도 들어갑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윤옥 아룀 다음은 제 책의 번역 소식을 알려준 글입니다. 참고하십시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45(2012). 9. 5. 얼레빗 독자 여러분께!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간 안녕하십니까? 지난 무더위 속에서 광복67주년 기념으로 안국역 전시관에서 국내 최초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화전을 연바 있는 이윤옥 시인의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가 미국에서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있어 독자여러분께 알립니다.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가능한 우수한 학생들이(지도교사 박혜성) 한국의 쟌다르크를 영어권에 알리고자 번역에 들어갔다는
김옥숙 명창이 이끌고 있는《경상도소리 보존회》가 2012년 9월 12일, 제11회 정기발표회를 무대에 올린다고 해서 국악계에 화제가 되고 있다. 현대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전통의 소리를 부르고 전승해 가는 과정도 벅찬 일인데, 한두 번도 아니고 열 번을 넘도록 지속적인 발표무대를 열어 오면서 전통소리의 고정 애호가를 확보해 왔다는 사실은 김옥숙 개인은 물론, 창원시의 자랑이오, 경남 예술계의 자랑이며, 나아가서는 한국 국악계의 자랑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쌍수를 들어 크게 격려하고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는 바이다. 얼핏 발표할 곡목들을 일별해 보니‘달거리’와 같은 좌창을 비롯하여 서울 경기지방과 경상도 지방의 민요가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불가의 노래인‘회심곡’도 부르고, 판굿이나 춤도 들어 있으며, 가야금병창이나 판소리와 같은 남도의 소리도 포함하고 있어서 다양한 장르를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는 재미있고 다채로운 구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무대를 준비한《경상도소리 보존회》의 김옥숙 회장은 경남 고성군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불러주는 전통의 소리를 생
-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Ⅴ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다. 전화자 교수를 만나 연변예술대학이나 조선족 예술단, 연변의 음악인들에 관한 정보도 듣고 황득주 명인과 의기가 투합되어 연변땅을 직접 방문해 보기로 마음을 통하고 동행할 연주자들 20여명이 홍콩-북경을 경유하여 연변으로 들어가게 된 과정을 이야기 했다. 북경에서 연변행 작은 비행기에 올랐다. 약 2시간 후에 몹시 흔들리던 비행기는 드디어 우리를 연변 공항에 내려 주었다. 늦은 밤이었다. 마중 나온 정준갑 일행을 따라 백산 호텔에 짐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헌 수건 2장이 서로 모양이 다를 정도로 초라한 형태의 여관이었다. 아침에 일찍 찾아준 정준갑 교수를 따라 우리 일행은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미니버스에 올랐다. 학교에 도착하니 학원의 원로 교수들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건물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사람씩 내리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연변예술학원의 김삼진 원장, 무용, 미술, 서양음악과의 부원장, 민악과의 김진,
고맙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알리기 위한 몸부림으로 시도한 시화전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이번 시화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김철관 기자(한국인터넷신문기자협회장)가 취재해주셨습니다. 무더위 속에전시장을 찾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또한 전시장 발걸음은 못하셨지만 마음으로 항상 응원해주시는 여러 선생님들께도 깊이 고개 숙여 감사 말씀 올립니다. 그리고 행사기간 내내 나오셔서 당번으로 현장을 지켜주신 분 언론에 홍보해 주신 분 후원금을 보태 주시면서 용기를 주신 분 먼 걸음을 마다 않고 대전에서, 인제에서 달려와 축사를 해주신 분 수원에서 애국지사를 모시고 와 사회를 봐주신 분 특히 개막전 행사와 개막식 마무리를 해주신 남은혜 명창과 신재창 가수님 시루떡과 다과, 음료를 준비해 주신 분 화분과 화환으로 행사장을 빛내주신 분 마무리날 땀 범벅으로 전시장 정리를 도와 주신 분... 한분 한분의 정성과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시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광복절이나 삼일절 같은 뜻 깊은 날에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케 되는 계기가 되었기에 이번 행사를 마련한 저로서는매우 기쁩니다. 이
후지와라마사코 씨 가족을 만난 것은 시화전 이틀째였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문화쉼터전시실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전시장을 기웃거리는 일본인을 만났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전시실 앞에 세워두고 전시된 시화에 눈길을 두고 있는 것이 관심 있어 말을 붙여 보니 한국에 여행 온 가족이었다. 한국말은 “안녕하세요?” 밖에 모르는 이들이지만 전시된 내용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에 관한 시화전이라고 하니 두 눈이 동그래진다. 후지와라 씨는 60대 중반의 여성으로 일본에서는 기모노 관련 일을 하면서 일본에 유학 온 외국인들에게 기모노를 소개하며 직접 입혀주고 사진도 찍게 하는 등 일본 전통문화 보급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후덕한 이웃집 아주머니 인상의 후지와라 씨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한국에는 처음 왔는데 사실은 가까운 나라라 일찍 와보고 싶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를 알고 있어 늘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커 보였다. 나는 후지와라 씨 가족에게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비행사가 되어 일본왕이 사는 황거(皇居)를 폭격하려 했던 권기옥, 만세운동을 부
-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Ⅳ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행사가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통하여 연변대학과 연결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1990년 한ㆍ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던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민족의 전통소리를 배우고자 한국《국립국악원》으로 유학을 온 전 교수를 만나게 된 배경을 잠시 이야기 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고 황득주로부터 전 교수를 소개받고 우리 3인은 반포 삼거리 식당에 가서 불고기와 냉면으로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맥주도 한잔 곁들였다. 그 당시의 우리와 중국의 화폐가치를 기억나게 하는 일이 하나 생각난다. 3인이 식사를 끝내고 75.000원을 계산 했는데, 전교수가 영수증을 자꾸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무심코 주었더니 그의 말이 “야, 내 3달 치 신봉을 한자리에서 먹어 치웠습네다”라고 놀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고참 대학교수의 1개월 급여가 우리돈으로 25,000원이었음을 알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젊은 교수들은 2만원 미만이었을 것이고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전문 연주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사람들
한국인에게 있어서 8월의 의미가 남다르듯 일본인에게 8월의 의미는 남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그를 입증하듯 8월로 접어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둘러싼 언론과 방송의 보도가 경쟁적이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현장은 평소보다 많은 일본인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국립 나가사키 원폭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당시의 정황이 적혀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기념관 안에는 멈춰버린 시계며 원폭 핵심지에서 700미터나 떨어진 이와키마치 초등학교에 다니던 14살 츠츠미양의 시커먼 도시락도 전시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준비하고 있는 연변예술대학 교수진들의 환영사를 소개하였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정례적인 우리의 만남이 우리 민족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길에서 더욱 공고한 초석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더하여 이러한 교류의 장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점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 행사가 시작된 계기는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만나면서 연변의 교수들을 소개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교류가 가능해 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화자 교수는 누구인가?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990년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의 교포인 연변대학의 전화자 교수로부터 한국에 와서 민족성악인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배우겠다는 유학의 뜻을 전달받았다. 그의 내한 목적이 남쪽의 노래를 배워 그의 입신이나 더 큰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변의 지역민들이나 대학의 제자들에게 남쪽의 소리들을 배워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