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국악과 서양음악, 서로 다른 것이 각자의 특징이다 국악이란 용어를 글자의 뜻 그대로 새기면 “대한민국 음악”이다. 이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 곧 “한국음악”이다. 우리말을 국어, 또는 한국사라고 부르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국사, 또는 한국사로 부르는 것처럼 국악이란 용어나 한국음악이란 말은 우리나라의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국악이란 용어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모든 한국의 음악이란 포괄적인 개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일부 제한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음악 속에는 100여 년 전부터 이 땅에 유입된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고 서양음악의 음계나 리듬, 하모니 등 서양어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들이 음악이란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악이란 용어는 한국 음악 가운데서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전래해 오고 있는 전통적인 음악, 또는 이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 창작된 음악 등을 지칭하는 일부 제한된 의미가 진한 것이다. 음악계의 최대행사로 알려진 대한민국음악제가 있고 대한민국국악제가 별도로 열리고 있는 점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전해오는 음악이나 이를 바탕으로 창
지난주까지 속풀이에서는 우리음악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지 못하게 된 배경이나 원인을 살펴보았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 우리역사가 기능이나 기술을 천시해 온 악습이 아직도 잔존한다는 점 둘째, 일제의 강점하에 너무도 긴 문화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는 점 셋째, 혼란의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점 넷째, 수용의 태세도 갖추지 못한 사이에 밀어닥친 서양 문물의 홍수를 맞게 된 점 다섯째, 전통음악과 관련한 교육정책의 부재 혹은 국악교육의 부재 탓에 전통음악의 독특한 예술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음악문화의 수인(囚人)을 만들어 온 점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은 지난 시대의 정황을 만들게 된 배경이었고 현재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전통음악을 대하는 일반 국민의 시각이나 인식이 전대(前代)에 비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는 점은 우리의 경제력이 오름에 따라 국제적 문화교류가 빈번해 지고 있어 우리의 전통음악이 자주 국내무대나 외국무대에 올려지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국의 위상이 각 분야에 걸쳐 현저한 상승곡선을
전통음악에 대한 세계인들의 격찬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이전에 견주어 달라진 인식이 거의 없다는 점이 바로 문제점이다. 겉으로는 목청을 높여 ‘전통예술의 진흥’을 부르짖고 있지만 아직도 전통음악은 구시대의 낡은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야금이나 거문고와 같은 악기를 나무토막으로 내버려두는 문화적 상황도 여전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음악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는 중이다. 그래서 앞에서는 첫째 원인으로 과거 우리 역사가 기능이나 기술을 천시해 온 악습이 아직도 잔존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둘째 원인으로는 일제의 강점하에 너무도 긴 문화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우리음악에 대한 자긍심을 갖지 못하게 된 배경이나 원인 세 번째로는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945년 8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해방을 맞았으나, 미(美) 군정하의 어수선한 정국이 당분간 이어졌고, 1948년 남한 단독의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곧이어 남북한 동족 사이 6·25전쟁을 겪게 되었다. 전쟁이란 승자도 패자도 피해를 감수해야만 되는 어리석은
지난주까지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한 감정을 세계의 유명음악인들에게 들어 보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표현만 다를 뿐, 한결같이 “매우 훌륭한 음악미와 차원 높은 예술성을 지닌 세계적인 음악”임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우리 전통음악에 대하여 한국인로서의 자긍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을까? 아니면 변화없이 그대로일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목청을 높여 ‘전통예술의 진흥’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많이 늘어난 듯하지만, 아직도 전통음악은 구시대의 낡은 유산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은 듯하고 그렇기에 특수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상황이다. 필요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입으로는 ‘민족문화의 창달’을 외치면서도 행동은 가야금이나 거문고와 같은 고금을 나무토막으로 내버려두는 문화적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김씨가 백자를 방치해 두었다가 남의 충고로 그 가치를 확인했던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전통음악에 대해서는 세계의 유명 감정가들이 음악미와 예술성을 인정했음에도 아직도 이에 대한 인식은
국악속풀이 47에서는 유럽의 유명 신문들에 실린 감정평을 소개하였고 그들이 인상깊게 이야기하는 종묘제례악과 대취타를 간단히 소개하였다. 다시 국악이란 항아리를 들고 여섯 번째의 감정가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중국의 음악인 차이링의 말이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듣고 느낀 점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매우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서양음악은 물론, 인도의 불교음악에서 받는 느낌과도 다르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동방 민족을 대표하는 독특한 종교관과 신(神)적 정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한국의 음악이 서양음악과는 다르고 인도의 불교음악과도 받는 느낌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동양을 대표하는 독특한 종교관을 내포하고 있어서 신비롭고 그러기에 신적인 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여러 감정가의 논평과 다르지 않다. 이상, 만나본 외국의 저명 음악인들 외에도 한국의 전통음악을 감상하고 느낀 논평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는 내용은 같고 표현만 다를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의 전통음악은 매우 훌륭한 음악미와 차원 높은 예술성을 지닌 세계적인 음악임을 이구동성으로 인
사쿠라(벚꽃)가 온 나라에 지천이다. 그 꽃을 보고 즐기는 말이 한국에서도 보통명사화 된지 오래인데 이름하여 벚꽃(사쿠라)놀이이다. 일본에서는 사쿠라를 보고 즐기는 것을 하나미(花見)라고 한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꽃보기’이다. 하나미(花見) 속에 벚꽃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지만 하나미라고 하면 봄철 벚꽃놀이를 가리킨다. 벚꽃이 나라꽃(가을에 피는 국화는 천황가의 문양)인 일본사람들은 이 꽃이 피길 기다려 색색의 하나미벤토(벚꽃놀이 도시락)을 싸들고 사쿠라 나무 밑으로 몰려든다. 삼삼오오 가족단위 또는 회사 동료끼리 모여 도시락을 나누고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은 일본인의 연례행사 중 으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가 헤이안시대(794-1192)에는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최고가집(最古歌集)인 만엽집(万葉集)에 벚꽃을 읊은 노래가 40수 (매화는 100수)나오다가 헤이안시대의 작품인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에서는 이 숫자가 역전된다. 따라서 헤이안시대부터 하나미(花見)란 거의 벚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은도 번쩍이는 보석조차도 귀한 자식에 이르겠는가” -銀も金も玉も何せむに勝れる子に及かめやも,(万葉集 ⑤-803)- 후쿠오카현 남부 인구 4만여 명의 조용한 도시 가마시(嘉麻市) 누리집에는 만엽시인 산상억량(山上憶良, 660-733, 야마노위에노오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편찬된 만엽집万葉集, 만요슈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학이다. 천황으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읊은 노래가 20권에 4516수(首) 실려 있다. 치쿠호(筑豊, 지방이름)에도 그가 지은 수십 수의 노래가 전한다.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던 치쿠호는 다자이후정청(太宰府政廳)이 있던 곳으로 세토내해 물길을 타고 바로 수도(나라 ‘奈良’)로 연결되던 곳이다. 당시 관내의 지방군수로 부임한 산상억량은 특히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로 유명한 시인이다. 귀족이면서 항상 가난한 사람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슬픔을 노래하여 그들을 높은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산상억량이 백제출신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밝히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크다.
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縣 萩市) 를 찾은 것은 죠카마치(城下町)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죠카마치란 일본국어사전에서 “전국시대로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다이묘(大名)의 거성(居城)을 중심으로 한 도시”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서 오래된 일본 전통가옥을 구경 할 수 있어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죠카마치는 하기시 말고도 성주(城主)가 살던 곳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지방정부에서도 이들 고건축물을 복원하고 당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관심이 많다. 무사 시절에는 북적였는지 모르겠지만 인구 5만의 하기시는 조용하다 못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하기시내를 전망 할 수 있는 지월산 등산로에서 만난 노년의 아저씨는 천년고도 교토가 찾아드는 관광객으로 번잡해졌다면서 더 조용한 곳을 찾아 하기시로 이사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 하기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전통가옥을 살피다가 뜻밖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으니 그 이름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였다.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토기념관과 고택에 이르는 곳에는 이토의 밀랍인
사가성혼마루역사관(佐賀城本丸歷史館)을 찾아가던 날은 볼을 스치는 2월의 바람이 아직 쌀쌀했다. 후쿠오카 옆 도시 사가현은 일본열도의 남쪽 지방이라고는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조용한 중소도시의 한적함이 한눈에 느껴지는 사가 시내는 자동차들의 속도도 느리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다지 바쁘지 않다. 사무라이 시절 성주가 살던 사가성(佐賀城)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조선시대 원님이 살던 곳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은 새로 말끔하게 단장하여 역사자료관으로 쓰는 사가성의 본관 건물 안에는 때마침 꽃꽂이 전시회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일본에서는 사철 꽃꽂이 전시회가 열리지만 특히 1월과 2월에는 신년 축하 의식으로 이르는 곳마다 꽃꽂이 전시회가 한창이다. 흔히 이케바나(いけばな, 生け花、活花、揷花)라고 불리는 일본의 꽃꽂이는 다른 말로는 카도(かどう,華道, 花道)라고 한다. 일본말로 ‘카도(華道)’라고 부를 때에는 꽃꽂이보다는 넓은 범위로 ‘구도(求道)’의 냄새를 풍긴다. 이케바나에는 여러 유파(流派)가 있으며 양식이나 기법 따위가 유파별로 각양각색이다. 일본 이케바나의 유래는 불교에서 꽃을 바치는 공화(供花)에서 그 기
*2011년 11월 9일부터 수원일보에서, 2012년03월07일부터는 제주해피코리아뉴스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국내외로 뛰어 다니며 그동안 사회에서 조명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내어 한분 한분께 드리는 '헌시'를 짓고 이분들의 일생을 요약하여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라는 책으로 엮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 독립운동가들은 12,000여명이 훈포장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200여명 밖에 훈포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200여명의 이름조차 모르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유관순열사' 외에는 더 이상 모르는 우리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널리 소개하여 이분들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의 작업은 200여명을 모두 알리는 그날까지 이어 갈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청주에 사시는 분이 여성독립운동가의 자료를 보내 오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제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분들은 저를 불러 주십시오. 서간도의 북풍한설 속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생을 건 이분들의 삶을이해하고 고난극복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나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