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가현 호남시 불교미술 서울 나들이 비파호를 끼고 있는 시가현은 일본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많이 간직한 도시들 가운데 4번째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의 보물들이 “일본 불교미술 비파호 주변의 불교신앙”이란 주제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릴 예정(12월 20일~)이다. 시가현에 있는 절과 신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국보 4건과 중요문화재 31건 등 모두 94점을 선보인다. 이러한 기사가 실린 2011년 11월 22일 자 교토신문을 오려 보내온 분은 시가현 상락사의 다케우치 씨이다. 붉은 단풍이 상락사를 물들이던 지난 11월 21일 나는 백제계 양변 스님의 발원으로 지어진 상락사를 찾았는데 상락사 들머리에 있는 삼성신사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절 안내소에 있는 다케우치 씨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 다케우치 씨는 “좀 더 알아보고 한국으로 자료를 보내겠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3주쯤 지난 엊그제 명동 로얄호텔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재일교포 오영환씨였다. 시가현에서 다케우치 씨와 친하게 지내는 분이라며 서울 나들이 길에 다케우치 씨의 삼성신사(三聖神社)에 대한 자료를 손수 가지고 왔다면서 전해준 누런 봉투 속에는 다케우치 씨가 직접 붓으로
연말에 붐비는 도쿄 재래시장 ‘아메요코’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바쁘다. 특히 외국에서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일본에 있을 때 마음이 착잡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 있는데 우에노에 있는 재래시장인 ‘아메요코(アメ橫)’ 시장이다. 우에노 역에서 오카치마치 역까지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는 ‘아메요코’시장은 옷, 구두, 꾸미개(액세서리) 따위의 잡화를 비롯하여 사탕이며 과자는 물론이고 채소와 생선, 과일 따위를 파는 식품 가게 등 가짓수도 헤아릴 수 없는 점포가 들어서서 장사를 하는 것이 꼭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분위기다. 특히 아메요코 시장의 유래가 재미있다. 2차 대전 패전 뒤 사탕(일본말로 아메)을 팔던 가게가 200여 곳이 있어 붙여졌다는 이야기와 당시에 일본에 남아 있던 미군들이 본국에서 가져온 꾸미개나 값싸게 들여온 텔레비전, 냉장고 따위를 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부르던 ‘아메리카요코쵸’가 줄어서 ‘아메요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패전 뒤 일본의 경제가 어렵던 시절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던 수도 도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시가현(滋賀)은 교토와 오사카에 면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곳은 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55건의 국보 그리고 806건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국보보유로 치면 교토부, 도쿄도, 나라현, 오사카부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에도시대에는 강남, 강서, 강동 지역으로 나누던 것을 명치시대 이후에는 비파호를 중심으로 호남, 호동, 호북, 호서 4곳으로 생활권역을 구분하고 있다. 예부터 관동지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특히 가을철 단풍의 명소로 꼽혀 단풍철에는 숙박을 정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이에 맞춰 “호동3산 순례”라든가 “호남3산 순례”와 같은 유서 깊은 절 순례코스를 만들어 놓고 임시버스를 운행하는 등 지역 관관협회의 홍보도 매우 적극적이다. “호남3산 순례길”을 나선 것은 지난 11월 21일 월요일이었다. JR고세이 역에서 탑승한 임시버스는 맨 처음 우리를 선수사에 내려 주었다. 국보답게 고색창연한 본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종목은 병창에 3인, 가야금 산조에 3인이 각각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가야금 산조의 경우, 19세기 말 김창조가 가야금으로 산조를 타기 시작한 이래 수없이 많은 명인이 명멸하며 그들의 산조를 남겼다. 현재 가야금산조의 유파에는 박상근류, 성금련류, 심상건류, 김윤덕류, 강태홍류, 김병호류, 최옥삼류, 김죽파류, 서공철류, 유대봉류, 김종기류, 신관용류 등등 그 외에도 여러 유파가 전해오고 있으나, 현재의 예능 보유자는 김윤덕류의 1인과 김죽파류의 2인 등 3인이 인정되어 있다. 유파마다 보유자를 인정하는 문제는 현실적으로 불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파마다 전수조교를 지정하여 각 산조의 특징을 잃지 않고 계승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제는 그 유파의 음악적 특징이나 문화재적인 가치가 인정되므로 적극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의 체제로 이어진다면 김윤덕류나 김죽파류 등 일부의 산조만이 문화재로서의 보호를 받으며 배우려는 학생들이나 애호가가 많아 활성화될 것이고 기타의 산조 후계자들은 상대적으
무형문화재 기ㆍ예능보유자를 도와 전수교육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전수교육조교이다. 인기있는 일부 종목에서는 그 경쟁이 보통 치열한 것이 아니다. 힘든 이수자의 과정을 끝냈다는 의미와 함께 보유자가 되기 위한 직전 코스이기 때문이다. 전수교육조교는 어떠한 과정으로 선정되는 것인가. 문화재법 시행규칙 제22조 전수교육조교와 관련한 주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는 자신의 전수교육을 보조하게 하기 위하여 이수증을 교부받은 자 중에서 문화관광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교육 조교가 되고자 하는 자를 문화재청장에게 추천할 수 있다. 다만, 보유자의 사망 또는 인정해제 등으로 추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문화재 위원회의 해당분야 분과위원회의 위원 또는 전문위원에게 추천을 의뢰할 수 있다. 제3항. 전수교육 조교가 되고자 하는 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문화재청장이 선정하고자 하는 전수교육 조교 수의 2배수 이상을 추천한다. 제4항. 전수교육 조교를 선정하고자 하는 때에는 문화재위원회의 해당 분과위원회의 위 원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제18조를 보면 “문화재청장은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로 하여금 해당 중요무형문화재의 전수교육을 3년 이상 받은 자에 대하여 기능 또는 예능을 심사하여 그 기능 또는 예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는 자에게 전수교육 이수증을 교부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전수교육 이수증을 발급한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는 1월 이내에 그 사실을 문화재청장에게 알려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과거에는 문화재청이 주관하던 이수증 교부의 권한을 보유자들에게 맡겨 놓고 이수증을 누구에게 발급했는가에 결과만 알려주게 되어 있다. 이수증 교부문제로 무형문화재의 해당 종목마다 반목과 불신의 벽이 높아만 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문화재청의 편의주의는 그 원인을 제공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위 내용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으로 해당 문화재의 교육을 3년 이상 받은 자를 이수대상으로 한다는 점, 이들에 대한 기예능을 심사하여 상당한 수준임을 판단하는 방법, 이수증을 보유자나 보유단체가 발급하고 그 결과를 문화재청장에게 알린다는 사
문화재는 유형과 무형으로 구분된다. 유형이란 남대문이나 석굴암과 같이 형체가 있는 문화재이고 무형은 인간의 기예능과 같이 형체가 없는 문화재이다. 무형문화재 종목 안에 성악이나 기악과 같은 전통음악, 전통무용, 의식이나 놀이 등 등이 포함된다. 문화재 업무를 총괄하는 곳이 문화재청이다. 국악인 중에는 뜻밖에 무형문화재 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필자 역시 이 분야가 매우 중요한 문제점들을 다루는 분야이기에 학술대회에 참여해 논문을 발표하거나 토론에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해 보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가능한 한 현장의 목소리들을 청취해서 핵심 사안에 접근해 보려고 다수 전승자나 학자, 관계전문가, 일반 애호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던 것이다. 대부분 전승자는 본인들의 입장만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행정당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학자나 전문가들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행정당국과 전승자들을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어 대조를 이루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들은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은 지정이니 보유자를 비롯
지난 10월 21일, 경기도 김포에서는 사단법인 ≪우리소리보존회≫ 이사장 조옥란 명창 외 공연자 60여 명이 김포지역의 어르신 위안을 겸한 제5회 시조발표회를 열어 가을밤 운치를 한껏 멋지게 장식하였다. 조옥란 명창은 여류 시조인으로 이름을 굳히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오래전에 전국 시조대회를 휩쓸다시피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얼마 전에는 경기민요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경기 국악제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차지하여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한 장본인이다. 시조의 명창이 경기민요계를 제패하였다는 점으로도 그의 시조창 실력이나 민요창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받고도 남는다 하겠다. 필자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출강할 때로 기억된다. 미모의 한 수강생이 매일 강의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데, 늘 책상 위에 녹음기를 앞에 놓고 앉아서 다소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가령 시간 중에 시조에 관련된 내용이거나, 또는 민요에 관련된 내용이면 그에게 시범창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가 불러주는 노래소리에 모두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목소리도 목소리이지만 목구성이 뛰어나고
“지금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은 오오츠시청 서쪽에 있다. 일찍이 북원(北院)에는 신라선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과 승방이 있었으나 명치유신 때 정부가 신라선신당과 페노로사묘(1853-1908, 미국인으로 일본의 미술을 서구에 소개함)가 있는 법명원(法明院)만 남기고 모두 헐어 버렸다. 전후 미군의 캠프로 쓰이다가 현재는 오오츠시청과 현립오오츠상업고교, 황자공원이 들어 서 있다.” 위는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 누리집에 있는 신라선신당의 이야기로 당시에는 무척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본당 건물 하나만 달랑 남아있다. 삼정사는 일본 남부 시가현(滋賀縣) 오오츠 시에 있는 유서 깊은 절로 원래 이름은 원성사(園城寺)이다. ‘三井’이라 하니까 우물이 세 개나 있어 보이는데 실제 이렇게 절 이름이 바뀐 것은 우물과 관련이 있다. 삼정사 안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천지왕(天智天皇), 천무왕(天武天皇), 지통왕(持統天皇)이 태어났을 때 산탕(産湯, 갓 태어난 아기 목욕물)으로 쓰였다고 해서 붙인 것으로 이 절이 고대 황실과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지증대사 원진으로 원진스님(円珍,814-891)은 도쿄대 이노우에(井上光貞) 교수가 쓴 《왕인의 후
우리 애들 어렸을 때만 해도 돌잔치는 집에서 치르는 줄 알았다. 지금은 이십대 중반이 된 아이들이 첫돌을 맞았을 때 친정어머니의 일손은 바빴다. 수수팥단지를 만들고 삼신할머니에게 올릴 시루떡도 손수 쪄내느라 좁은 집은 수선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금반지 반 돈이라도 해 들고 찾아오는 일가친지를 맞아들일 준비도 하고 돌날 아침 돌잡이 상도 따로 봐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을 집에서 하는 아이 엄마는 없다. 아이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백일과 돌잔치는 어느새 거대한 이벤트화 되어 호텔마다 젊은 부부들의 아기 돌잔치 예약이 넘쳐난다. 손님들도 금값이 비싼 지금은 현금 봉투를 들고 돌잔치가 열리는 뷔페식당이나 값비싼 호텔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돌잔치는 어떠한가 보자. 일본은 돌잔치가 없다. 엑? 하고 놀랄 분들이 계시겠지만 태어나서 치르는 첫 생일인 ‘돌’이라 부르는 특별한 잔치는 없다. 그 대신 ‘오미야마이리(お宮參り)’라고 해서 핏덩이를 막 벗어난 한 달 정도 되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신사 참배를 한다. 그 이후에 남자아이는 3살과 5살 때 여자아이는 3살과 7살이 되는 해에 일본 전통옷을 곱게 입혀 신사 참배를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