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정순임 명창은 해마다 여름, 경주 보문관광 단지 내에 있는 야외무대에《유관순 열사가》를 비롯한 《이차돈》, 《놀보전》과 같은 창극을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려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8월 초, 경상도 일대에 국지성 소나기가 예고되어 있어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단원들은 수궁가를 바탕으로 마당극 개념을 도입한 《약 일래라, 토끼 간이 약 일래라》를 총연습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위한 무료 봉사였기에 하늘이 도왔는지 끝날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경주에서 창극이 공연될 수 있는 배경은 정순임의 열의와 경상북도의 지원, 그리고 그를 돕는 스태프와 제자들의 의욕이 충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극을 오페라 혹은 가극이라 부른다. 창극은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소리극이다. 경기소리나 서도 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극은 창극이라 부르지 않고 경서도 소리극이라 부른다. 창극의 기본은 판소리이다. 소리가 어느 정도 익어야 창극이 가능한 것이다. 소리가 익지 않으면 아무리 연기가 훌륭하고 사설을 재미있게 옮긴다 해도 가슴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정순임은 제자들에게 소리공부를 가장 중요하다고
지난 7월 초, 중국 연변에서는 한국전통음악학회와 중국 연변예술대학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13회 전통음악교류회가 열렸는데, 학술 토론과 공연 교류 행사에 국내 유명 교수들과 명인명창 40여 명이 참가하여 교류회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긴 바 있다. 이 행사에 참가했던 판소리 명창 정순임 씨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을 실연하였는데, 소리도 소리이려니와 멋들어진 발림(사설에 맞는 몸동작)으로 객석의 열띤 갈채를 받았다. 중국의 연변지역이란 곳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중조(中朝)변경지역이다. 폭 30~40m의 두만강은 노래 가사에 나오는 환상적인 푸른 물이 아니라 뿌옇다 못해 완전히 죽어 버린 강이 되었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인 중국의 도문 시와 남쪽인 북한의 남양 땅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다. 이 연변지역은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언어나 음식의 불편이 거의 없다. 거리의 간판은 모두 한글을 먼저 쓰고 밑에 한문을 달아 무엇을 하는 건물인지 무슨 물품을 파는 곳인지 알 수 있어 딴 나라 같지 않고 친숙하다. 연변은 전통문화를 비롯해 여러 방면으로 북한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그
18. 공자는 정(鄭)나라의 음악을 미워했다 지난주 속풀이 17에서는 정악(과거 아악이라고 부르던 음악)과 민속악의 용어를 설명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상하의 개념이나 우열의 대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음악적 환경이나 성격, 또는 표현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국 전통음악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온 상대적 관계로 마치 자전거의 앞, 뒷바퀴와 같은 존재임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아악이란 무슨 말인가? 아악이란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 용어이다. 첫째는 아정(아담하고 바른)하고 고상한 음악이라는 의미, 둘째는 중국 고대의 음악으로 고려조에 들어온 이후 국가의 각종의식에 쓰였던 음악, 셋째는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아악, 당악, 향악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아악이라 함은 세 번째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과거 임금이 거처하던 궁궐 안에서는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아악도, 당악도, 그리고 고려나 조선을 통해서 작사 작곡된 향악도 연주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국가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들여 온 아악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기존의 아악, 당악, 향악을 묶어 넓은 의미로 아악이
9. 백제 성왕이 최초로 불상을 보낸 절 향원사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턱턱 차오르는 아스카의 더위는 말 그대로 찜통 속이다. 한국과 달리 바람 한 점 없이 푹푹 쪄대는 아스카의 한 낮은 수은주가 39도를 오르내렸다. 나라현 타카이치군 아스카촌 (奈良県 高市郡 明日香村)에 있는 향원사는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절로 일본의 사서(史書)에 일찌감치 그 이름이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552년에 백제 성명왕이 금동 석가불을 보내왔는데 향원(向原)에 있는 개인 집을 깨끗이 치운 뒤 절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가정집을 고쳐서 임시로 절로 사용한 것일 뿐 제대로 된 절은 이후 50여 년이나 지나야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야마토(645년에 일본이라는 국호 생김)조정에서는 불교 공인 후 불상을 안치할 절을 지을 기술자도 없고 승려도 없으며 경전도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꾸준히 한반도로부터 경전을 지닌 고승(高僧)들이 건너가고 대규모의 목수들이 파견되어 불사(佛事)를 한 결과 비조사(飛鳥寺,아스카데라),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노지), 법륭사(法隆寺,호류지)들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향원사가 자
17. 정악과 민속악의 관계는 자전거의 앞 뒤 바퀴와 같다. 지난 금요일, 독자가 쓰는 얼레빗은 서도소리를 전공하는 학생의 글로 정악과 민속악에 관한 개인의 의견이 재미있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이를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되면 정악은 바른 음악, 존귀한 음악이고 이에 반해 민속악은 바르지 못한 음악, 저속한 음악으로 이해하는 독자가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양자는 우열의 개념이 아니다. 정악은 음악을 표출하는 방법이 민속악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단아하게 들린다. 그래서 예부터 아정하다는 의미로 아악(雅樂)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아악이라는 용어 대신 정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는 아정(雅正)하다는 말에서 아악이나 정악을 동의어라 보기 때문이다. 민속악은 속된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원래 ‘속(俗)’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풍속, 바램, 이어감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의 풍속이며 백성이 이어가는 순수한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얼레빗 독자들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국악용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중국 당 나라에서 당의 악기나 음악이
바야흐로 일본은 불꽃놀이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 밤 크고 작은 강가에서 쏘아 올리는 형형색색의 불꽃은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준다. 십여 년 전 요코하마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도쿄의 찜통더위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을 때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친구 우키코가 나에게 보여 줄 게 있다며 불꽃놀이에 초대했다. 항구도시 요코하마는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이면 닿는 곳으로 도쿄보다 집값이 싸고 주거환경이 좋아 도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너무 늦지 않게 오라’는 우키코의 성화에 불꽃놀이 세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벌써 불꽃놀이 장소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불꽃놀이에도 명당자리가 있어서 유로석을 뺀 곳으로 불꽃을 쏘아 올렸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아침부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역시 좋은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로 자리 쟁탈전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서너 시간씩 불꽃을 쏘아대니 좋은 자리 쟁탈전이 날만도 하다. 한국에서는 한여름의 고정행사인 일본의 불꽃놀이를 하지 않기에 나는
지난주에는 어렵사리 연변예술대학과 첫 교류 음악회를 갖게 된 과정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도 연변의 조선족 음악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하겠다. 어렵게 성사된 연변대학에서의 교류 음악회를 끝낸 그날 밤,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우리의 만남을 서로 자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다음날 ‘들놀이’ 행사로 이어졌다. 연변대학의 교수와 직원들은 우리 일행을 위해 먹을거리를 다양하게 준비해서 강가로 나가 하루를 즐긴 것이다.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동포 음악인들이라 해서 그런지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들의 태도에서 순수한 인간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7월, 연변 예술대학을 방문하던 그 해, 우리의 초청을 계기로 연변예술학원은 중대한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는데, 바로 음악학부 내에 민족음악과, 줄여서는 민악과로 부르는 학과를 새롭게 신설한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의 국악과혹은 한국음악과와 같은 것이다. 한국은, 1959년도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제외한다면 70년대에 와서야 겨우 한양대, 이
날은 더워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가운데 오카데라(岡寺, 나라현 타카이치시 아스카무라 오카 806)를 찾아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천여 년 전 백제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라면 도중에 목적지를 바꾸고 싶을 만큼 칠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가시와라진구마에역에서 1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600엔짜리 1일자유권 버스를 타고 오카데라마에(岡寺前)에서 내려 한 십여 분 거리지만 경사진 언덕 위의 절까지 가기에는 숨이 차오른다. 절로 가는 길은 작은 승용차 하나 다니기도 버거울 만큼 좁았고 양쪽으로는 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한국에 그 흔한 마을버스는 아예 길이 좁아 엄두도 못 낼 곳에 오카데라는 자리하고 있었다. 절 입구에서 300엔의 입장료를 내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긴다. 보아하니 저 밑의 아스카데라(飛鳥寺) 까지는 한국인들이 찾아 와도 이만치 떨어진 언덕에 자리한 오카데라(岡寺)를 찾는 한국인은 드물었을 듯싶다. 이곳은 사전에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면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절이다.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국 33 (西三十三箇所) 관음도량 성지 중 7번째 절이라고는 하나 우리 일행이 절을 찾았을 때는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오카데라는 동
필자는 얼마 전, 중국 연변예술대학에서 열린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에 37명의 회원과 함께 참가하였다. 국악속풀이 이번 주에는 올해로 13회를 맞게 된 한ㆍ중 실연교류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는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의 전통음악학회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는 연중행사이다. 말 그대로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 연변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조선족 음악에 대한 학술적인 강연과 토론을 통해서 학문적 교류를 하고 그리고 겸해서 양쪽에서 연행되고 있는 전통음악의 실연을 통하여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연구모임이다. 이 교류행사는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최초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1990년 7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체결되기 직전, 필자는 국내 저명 국악인 20여 명과 함께 처음으로 연변 예술학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어서 조선족 음악에 대한 정보는 접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선족들이 어떤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르며 지내는지? 또한, 어떤 음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더욱이 민족음악을 지도하고 있는 대학이 있는지? 있다면 교육체계는 어떠한
가곡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시조 이야기로 흘렀다. 향제시조의 한 갈래인 충청 지방의 내포제시조이야기도 했고, 이어서 시조에 명창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면서 시조의 일반적 이야기도 잠시 하였다. 이번 주에는 가곡, 시조와 함께 정가(正歌)에 포함시키고 있는 가사(歌詞)이야기를 잠시 해 보기로 한다. 남창 가곡의 예능보유자인 김경배 명인의 아호가 소하(韶荷)이다. 그가 이번에 가곡이 아닌 12가사 전곡을 한 장 음반으로 담아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축하의 의미를 담아 축사를 보내면서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은 서초구 우면동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국악원이 1950~60년대 말까지는 종로구 운니동 비원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0년대 말, 지금의 국립극장이 서 있는 장충동 남산 중턱으로 옮겨가기 전까지가 운니동 시대이다. 이 당시 국립국악원은 일반 시민들을 위한 월례국악강습회를 10~15일간 치른 다음, 반드시 국악감상회를 원내의 작은 공연장에서 열곤 하였는데, 그 공연장의 이름이 바로 춤일(佾), 풍류소(韶)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