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의 넓디넓은 땅 스이코 여왕의 도요우라궁 예전엔 소가 씨의 개인 절터 자리였었지 지금은 향원사 주지 마나님 벗들이 차 마시는 곳 가까이에 있는 아스카절 종소리 사라진지 오래 금당 부처님만 고구려 혜자스님 후손 보고 살며시 미소 짓는다. '백제 없이는 아스카는 없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남부지방인 아스카-나라-오사카 지역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연일 39도의 폭염으로 일본 열도에서 열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7월 초순 다시 찾은 나라 아스카 지역도 수은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아스카는 한자로 ‘飛鳥’, ‘明日香’, ‘安宿’ 등으로 표기하는데 모두 일본말 소리는 아스카(asuka、あすか)로 난다. 비조(飛鳥)라는 한자를 새겨 어떤 이들은 새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특별히 새와 관계있는 곳은 아니다. ‘明日香’이라고 쓰는 경우는 당시 수도가 아스카에 있었으므로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고장이란 뜻 새김이 있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安宿’이라고 쓰는 경우도 싸움이 없이 평온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래 아스카는 지금의 나라현(奈良 高市郡 明日香村)과 오사카(大阪府 羽曳野)에 있었는
7월 7일은 칠석이다. 이웃나라 일본과 똑같이 칠석 전설이 있는 한국에서는 칠석날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는 데 견주어 ‘마츠리의 나라’ 일본에서는 이 날 근사한 칠석축제(다나바타마츠리)를 한다. 견우와 직녀가 한 해에 한 번 만난다는 칠석날은 원래 음력이지만 명치시대 이후 양력만을 쓰는 일본은 칠석축제를 양력으로 치른다.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도쿄 한복판 증상사(죠죠지)에서는 올 7월 7일에 “동북부 대지진피해지원 칠석축제”를 연다고 일찍부터 광 고가 대단하다. 올해로 5번째인 이 칠석축제는 칠석 당일만 2,000 여장의 소원을 적은 종이(短冊, 단사쿠)가 높이 세운 대나무 가지(笹, 사사)에 주렁주렁 나붙고 하루 찾아오는 사람만 2,000명이 넘을 정도로 북적인다. 경내에는 대나무를 세우고 색종이를 준비하여 칠석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자기의 소원을 적어 대나무 가지에 매달 수 있게 하는데, 준비된 종이는 100엔을 받는다. 이렇게 모금된 돈은 모두 지진돕기에 쓰인다고 한다. 또한, 이날 밤은 조명을 쏘아 올리고 각자의 촛불을 준비하여 밤하늘의 반짝이는 은하수를 연출할 뿐만 아니라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도 마련되어 칠석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을 즐겁게
“시조에는 명창이 없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시조창이 너무 어려워서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 쉬워서 모두가 명창이기 때문에 없다는 뜻일까. 시조창이라 해서 명창이 없을 리 있겠는가마는 이 말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법하다. 조선조 전기부터 불리던 전문가의 노래가 가곡이라면, 이를 일반인들이 부르기 쉽도록 고쳐 만든 노래가 곧 시조창이다. 시조창을 부르기 시작한 시기를 학계에서는 대략 영조 무렵으로 보고 있다. ≪유예지≫를 비롯한 시조창의 악보는 순조 무렵부터 보이고 있는데, 이 악보를 분석한 결과 현행의 경제 평시조-京制平時調로 알려졌다. 경제란 서울 경기지방을 말함이고, 시조는 3장6구체의 시형에 가락을 얹고 장단을 붙여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경제시조의 대칭개념이 곧 향제시조-鄕制時調이다. 향제에는 지난주 소개되었던 충청지방의 내포제를 비롯하여 경상도의 영제시조와 전라도의 완제시조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이미 고인이 된 석암 정경태 명창이 완제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시조가 전국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어 이를 석암제시조로 부르고 있다. 어느 지방의 시조가 되었든 간에 시조는
내포제 시조란 내포지방에 전해오는 노래를 말한다. 내포지방이란 충청남도 서해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홍성, 당진, 서산, 보령, 연기, 부여, 청양, 논산, 예산, 서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시조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 또는 “태산이 높다하되”처럼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형식을 취하고 있는 3~4조의 시형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포제 시조는 서해 바닷가에 살고 있는 충청 지역민들이 즐겨 불러온 고유한 시조가 될 것이다. 참고로 경상도 지역의 시조를 영제, 전라도 지방의 시조를 완제, 서울 경기지방의 시조를 경제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역에 전해오는 시조를 분류하는 이름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충청남도는 내포제 시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시조인들은 《충남통합시우회》를 조직하여 해마다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전국 시조창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 중심에 김연소, 이규환, 김영숙 등과 같은 시조인들이 있다. 충남문화재로 지정할 당시에는 소동규 명인이 초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그 뒤로 김원실 명인이 2대 보유자가 되어 도내에 각 지부를 조직, 세를 확산해 오면서 선생의 유지를 충실하게 이
뭐니뭐니해도 일본의 여름은 마츠리(祭,matsuri, 축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교토에는 예전부터 전해 오는 유서 깊은 마츠리가 많은 데 7월 한 달 내내 하는 기온마츠리(祇園祭)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이 마츠리를 보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호텔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만한 경제적 효자 상품도 없을 것이다. 기온마츠리의 유래는 전염병이 확산 되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전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노미코토)의 노여움으로 알았다. 그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기온사(祇園社) (현재 야사카신사)에서 병마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 66개의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가마 66개를 만들어 역병(疫病)을 달래는 “어령회(御靈會)”를 지낸 데서부터 기온마츠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사노미코토가 신라의 우두신이란 기록이 있다. ≪교토 속의 조선(京都の中の朝鮮)≫을 쓴 박종명 씨는 서기 656년 가라쿠니(韓國)의 대사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가 일본에
국악속풀이 이번 주 이야기는 가곡에서 잠시 벗 어나 가야금병창에 대해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가야금병창이란 창자 스스로 가야금을 뜯으며 단가나 민요, 판소리의 눈대목 등을 부르는 연창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기존의 노래뿐 아니라 새롭게 창작된 노래도 가야금을 뜯으며 부른다. 우리의 전통성악 가운데 반주악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성악은 가곡이 유일하다. 반주악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 부분이나 간주 부분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음높이를 지정하고 유지해 주는 역할에서부터 선율의 흐름, 빠르기, 음악적 분위기를 반주진이 이끌게 마련이어서 창자가 도움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때로는 이러한 틀이 장애가 되어 오히려 창자의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88서울 올림픽 전야제 행사로 고 박동진 명창이 판소리 한 대목을 관현악 협연으로 부른 다음, 무대 뒤로 나와서 “ 나는 다 필요 없어, 북 제대로 치는 놈 하나만 있으면 된단 말이여~” 불평 섞인 실토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곡을 제외한 여타의 노래들은 반주가 있으면 좋고 여의치 않으면 장고나 북을 반주 삼아 부르는 노래가 일반적이다
눅눅한 장마철이 계속되면 쨍하고 볕 드는 날이 그리워진다. 빨래도 안 마르고 집안은 눅지다. 그뿐만 아니라 특히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아이들에게 장마철은 길고 지루하다. 이때 일본에서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데루데루보우즈(てるてる坊主) 인형을 만든다. 흰 천으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 처마 밑에 매달아 두면 비가 그친다는 속설을 가진 데루데루보우즈의 유래는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랑(晴娘)” 낭자의 전설로부터 비롯된 중국의 청랑낭자 인형은 종이로 만들며 여자모양으로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견주어 일본의 데루데루보우즈는 헝겊으로 만들고 남자 모양에 빗자루를 들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데루데루보우즈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헤이안시대(에도시대라는 설도 있음)로 보고 있으며 헤이안시대에는 기우제(祈雨祭)라든가 기청제(祈請祭)를 주로 승려들이 담당했던 관계로 데루데루보우즈 인형이 박박 머리의 남자 승려 모습이 아닌가 하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히요리보우즈(日和坊主)라고도 불리는 데루데루보우즈는 머리를 위로해서 처마 밑에 달지만 거꾸로 달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뜻도 있으며 요사이는 흰 헝겊이 아니라 색색의 헝겊으로 만드는
가곡이야기 4. “삭대엽의 순 우리말은 자진한잎이다.” 《대악후보》나 1580년대의《금합자보》에 실려있는 만대엽이 가곡의 원형임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러한 만대엽은 늦어도 17세기 후반까지는 화려하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중대엽에게 자리를 내 주기 시작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다. 1680년대에 제작된《신증가령》이라는 악보에는 중대엽이나 삭대엽이 각각 1, 2. 3으로 확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초엽부터는 만대엽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가 하면 위세를 떨치던 중대엽 역시 평조의 음계를 잃는 등, 점차 그 기세가 꺽이기 시작하면서 가곡의 중심은 가장 빠른 템포의 삭대엽으로 옮겨지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삭대엽(數大葉)이란 무슨 뜻일까? 삭(數)은 자주 혹은 잦게(빠르게)라는 의미이다. 수로 읽기도 하나 그럴 경우에는 세다의 의미가 된다. 대(大)는 크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한’으로 읽었다. 대전(大田)을 ‘한밭’이라고 했던 것처럼 크다는 뜻을 우리말로는 ‘한’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엽(葉)은 잎이나 갈래 등의 뜻을 지닌 글자이기 때문에 음악용어로는 ‘악곡’이 될
“하얀 바탕에 자양화(紫陽花)를 수놓은 일본 옷을 입은 세쓰코는 여학생의 정복을 입고 있을 때는 느껴 보지 못한 성숙한 여성을 느끼게 했다.” 소설가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오는 꽃 이름 자양화는 무슨 꽃일까? 감이 안 잡히겠지만 수국(水菊)이라 하면 얼른 알아차릴 사람이 많다. 베이지색깔에 꽃송이가 탐스러워 보이는 이 꽃은 부처 머리같이 생겨서인지 불두화(佛頭花)란 이름도 갖고 있다. 이 꽃을 일본에서는 “아지사이(あじさい)”라고 부른다. 이 말의 원뜻은 남색이 모인 것이라는 뜻의 “아즈사이(集眞藍)가 와전되어 아지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지사이가 한자로 자양화(紫陽花)라고 불리는 것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라일락 비슷한 꽃에 붙인 이름을 헤이안시대 학자 원순(源順)이 아지사이에 갖다 붙인 것으로 중국의 자양화와 일본의 아지사이는 다르다. 한국에도 중국산 자양화로 추정되는 꽃이 영의정을 지낸 만정당(晩靜堂) 서종태(1652-1719) 시문 등에 보인다. 아지사이는 장마 무렵에 피는데 한국보다 장마가 한 달이나 빠른 일본에는 지금 아지사이 천국이다. 꽃 색깔도 연보랏빛부터 붉은빛까지 실로 다양한데다가 시내에도 가로수(화)로 흔히 볼 수 있어 일
《산타령》에는 경기산타령, 서도산타령, 남도산타령 등이 있다. 남도는 다르지만, 경기와 서도의 산타령은 전반적인 악곡의 구성이나 선율의 진행이 유사한 편이어서 이들 노래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의 산타령이 다른 지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27년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는 경기산타령은 불규칙리듬이 많고 서도산타령은 비교적 규칙적인 점, 서도는 템포가 빠르고 요성이 격렬한데 비해 경기는 비교적 느리고 매끈하다는 점을 들면서 “서도 산타령은 경기산타령의 변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 학자들이 서도의 사거리를 주장하는 것과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경기나 서도 할 것 없이《산타령》은 오랜 역사와 음악적으로 다양한 특징들을 지니고 전승되어 오는 전통의 소리이다. 자칫 이에 대한 보존정책이나 전승과정을 소홀히 했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을 잃을 뻔했던 종목이기도 한 것이다. 국가에서는 1969년, 《산타령》을 무형문화재 19호로 지정하면서 뚝섬패의 한인학 후계자인 김태봉, 과천패 소완준의 제자 정득만, 왕십리패 이명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