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즐겨 먹는 음식에 오코노미야키라는 것이 있다.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부침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재료의 뜻인 오코노미(お好み)를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쳐 먹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축제인 마츠리 때 노점에서 흔히 만나는 오코노미야키의 재료를 보면 양배추를 비롯한 당근, 파, 돼지고기 저민 것 등이 쓰이며 때로는 새우나 해산물도 들어간다. 한국의 부침개 재료와 비슷하지만 우리의 재료가 훨씬 다양하며 이름도 많다. 부산의 ‘동래파전’처럼 재료 속에 파를 듬뿍 넣으면 파전, 부추가 주재료이면 부추전, 녹두로 부치면 녹두전인데다가 “돈 없으면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노랫말처럼 돈 없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뜻의 빈자떡에서 유래한 빈대떡이 있는가 하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침개란 말보다는 지지미(チジミ)란 말이 더 알려져 있을 정도로 이름이 많다. 오코노미야키의 유래는 일본 세계대백과사전, 평범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곧 풍신수길 등이 활약한 무사시대에 다성(茶聖) 센리큐가 차와 함께 먹는 과자인 후야키를 굽게 한데서 시작하여 에도시대의 과자 스케소야키가 진전하여 명치시대에는 몬쟈야키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관동대지진 때에는
경과자(京菓子, 쿄가시)라는 것이 있다. 천년고도 교토에서 만드는 일본과자를 그렇게 부르는데 서양과자와 구분하려고 부르는 화과자(和菓子, 와가시) 중에서도 교토에서 만드는 과자를 특별히 그렇게 부른다. 일본인들이 갖는 교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과자에도 나타나있다. 일반적으로 경과자는 5감으로 맛보는 과자로 알려졌는데 “눈으로 색이나 형태를 즐기고 혀로 감촉과 맛을 즐기며 코로는 향기를 느끼고 귀로는 과자의 이름을 듣는다.”라는 말처럼 과자 하나하나가 손으로 만드는 예술품으로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경과자의 역사가 천 년을 넘는 것은 교토가 수도였던 시절 왕성(王城)과 귀족들이 즐겨 먹은 데다가 신사와 절이 많아 제단에 바치는 일이 많았고 또 다도(茶道)의 융성도 한몫을 거들었다. 특히 교토의 맑은 물을 경과자와 관련시키는 사람도 많다. 교토 시내 시죠도오리에는 올해로 창업 208년을 맞아 7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메야요시나가(龜屋良長)라는 경과자점이 있다. 1988년까지 가족끼리 하다가 주식회사로 만들어 종업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과자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자를 기계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경과자의 특징은 모두 손끝에서 완성되는 철저한 도제식
가곡을 비롯하여 가사, 시조를 정가(正歌)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고 있다. 정가란 속가(俗歌)의 대칭개념으로 창법이 점잖은 노래라는 의미인데, 정가를 ‘바른 노래’, ‘점잖은 노래’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특징은 첫째 박자가 느리다는 점이고, 둘째는 부르는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여 부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가곡을 고상한 이름으로는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오랜 시간 길게 기쁨을 누리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속가는 민요나 판소리, 좌창, 선소리, 병창, 무가 등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최대한 들어내는 노래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표현법을 쓴다. 그래서 속가를 들으며 사람들은 울고 웃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곡의 곡조는 남창이 26곡, 여창이 15곡이어서 총 41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곡은 모두 5장으로 나누는 형식을 취한다. 5장형식이란 시조시 초-중-종장의 노랫말을 5장으로 안배함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조 “동창이”를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이 나눠진다. 가곡의 제1장--시조의 초장 안구[內句]--- “동창이 밝았느냐” 제2장------
본래의 고유한 이름인 옷이나, 음식, 집이란 이름을 내주고 한복이니 한식이니 한옥이니 하는 불필요한 이름을 새로 얻은 것처럼, 가곡도 새로운 서양스타일의 가곡과 구별하기 위해 전통이란 불필요한 이름을 앞에 붙여 전통가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이 난에서도 때로는 가곡, 또는 전통가곡 등의 이름이 혼용되기도 할 것임을 양해 바란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3대(三大)성악으로는 가곡, 판소리, 범패를 꼽아 왔다. 왜 이들을 꼽아왔는가 하는 근거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역사가 오래되었고 규모가 방대하며 예술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전문인들의 노래”라는 점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전통가곡은 조선조의 선비들이나 유명 학자, 상류계층의 인사들이 애호하던 점잖은 노래이며, 판소리는 일반대중들이 즐기던 남도 지방의 극적인 긴 노래이고, 범패는 사찰에서 크고 작은 의식이 있을 때 승려들이 부르는 장엄한 불교의 성악이다. 이 중 판소리는 미(美)적 가치도 높을 뿐 아니라, 재미도 있어서 판소리가 있는 공연장이나 판소리를 기본으로 만든 창극은 언제나 많은 청중으로 성황을 이루고
국화, 오동나무, 아욱꽃, 매화, 소나무, 떡갈나무... 마치 식물원이나 정원의 꽃나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이런 모양으로 도안된 무늬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가문(家紋, kamon)이라한다. 일본은 우리처럼 족보가 없는 대신 집안을 나타내는 문양(紋樣)이 있는데 이는 가계(家系), 혈통, 문중, 지위를 나타내는 문장(紋章)으로 약 5천 종이 있다. 가문의 무늬는 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같은 자연물도 있고 거북이나 매와 같은 동물 모양도 있는데 가장 많은 가문은 식물이 37종, 우산, 수레, 부채모양이 27종, 까마귀, 학, 비둘기 같은 새 종류가 7종 등 다양하다. 가문의 역사는 천여 년 전인 헤이안시대 (平安時代, 794-1185)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역사상 가장 평안(平安)하고 문화가 찬란했던 시대인 이 시대의 귀족들은 가마나 입는 옷에 무늬를 그려 넣길 좋아했는데 이것이 발전 되어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1333)로 오면 싸움으로 날을 새는 무사시대인 만큼 가문은 커다란 깃대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적과 아군을 구분 짓는 징표로 유행하게 된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죽고 난 도쿠가와 시대에는 수백 년에 걸친 지긋지긋한
독자 여러분의 질문 중에 ‘봉선화’나, ‘바위고개’, 또는 ‘금강산’이나 ‘비목’과 같은 노래들을 가곡으로 알고 있는데, 국악방송을 들어보면 이름부터 생소한 ‘초수대엽’이나 ‘언락’, ‘편락’과 같은 긴 노래를 가곡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가곡이 어떤 노래인가? 미적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부터는 가곡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소개할 예정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애독과 질문을 포함한 많은 의견을 보내 주시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가곡(歌曲)이라 하면 아름다운 시(詩) 위에 곡조를 얹어 부르는 노래를 지칭한다. 독일에서는 리트, 불란서에서는 샹송, 이태리에서는 깐쪼네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곡으로 정의하고 있는 노래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노래와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특징적인 요소란 다음과 같다. 1. 조선조 전기에 생성된 노래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 2.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3장 형식의 시조시를 노랫말로 삼는다는 점 3. 16박자, 혹은 10박자의 길고 느린 장단에 맞추어 부르고 있다는 점 4. 반
지난 5월 15일은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아오이마츠리’ 날이었다. 3대 마츠리로는 7월 한 달 동안 하는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3대 마츠리 가운데 한 가지를 보러 간다면 단연코 ‘기온마츠리’를 추천하고 싶다. 가장 생동감이 있을 뿐 아니라 서민적이고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토신문의 아오이마츠리 홍보기사에는 연간 300건이 넘는 마츠리 가운데 최고 마츠리로 아오이마츠리를 꼽고 있다. 가모마츠리라고도 부르는 아오이마츠리의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점괘는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왔다. 점쟁이인 우라베(卜部伊吉若日子)의 조언은 튼실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는 얼굴에 동물 가면을 쓰고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사(마츠리)의식을 행하면 풍수해를 잠재울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고대에 기원을 둔 마츠리는 대부분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작 등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아오이마츠리 역시 풍수재해 예방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아오이마츠리를 주관하는 가
≪왕생요집(往生要集、984年)≫을 써서 헤이안시대 유명한 승려로 자리매김한 원신 (源信, 942-1017)스님은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9살에 히에이산(比叡山)에 맡겨져 승려의 길을 걷게 된다. 어머니의 간절한 불공 덕인지 15살의 원신스님은 무라카미왕(村上天皇)의 신임을 얻어 왕실법회를 맡을 수 있는 엘리트 강사로 발탁되는데 이때 무라카미 왕은 원신스님에게 면포 등 두둑한 하사품을 내린다. 뛸 듯이 기뻐하며 원신스님은 첫 왕실 출입으로 받은 귀한 물건을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들뜬 마음으로 보낸다. 그러나 아들이 보내온 왕실 하사품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어머니는 원신스님께 되돌려 보내면서 한 통의 편지를 담아 보낸다. “보내주신 물품은 기쁘게 받았습니다. 왕실 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학승이 되었으니 더없이 기쁩니다. 그러나 왕실 출입을 계기로 여기저기 유명 강사로 불려다녀 세속적 고승(高僧)으로 화려한 대우를 받고 그럭저럭 지내라고 출가시킨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미 늙어서 이제 얼마 살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그대가 성인(聖人)이 되어 나를 보러 온다면 나는 그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며 원신
이달 24일(화) 오후 3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산타령의 예능보유자 황용주(黃龍周)사범이 예악 생활 55주년을 기념하여 발표공연을 펼친다고 한다. 축하의 글과 함께 산타령이란 어떤 음악인가 하는 점을 2회에 걸쳐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길을 걷는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 터에 10년, 20년도 아닌 55년을 오직 경기소리, 그 중에서도《산타령》을 부르며 외길을 살아온 황용주 사범은 후학들로부터 존경과 축하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의 기념공연 무대는 경기소리 전반이지만, 그 중심은 역시 경기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산타령》이 될 것이다. 입창(立唱)형식, 즉 서서 부르는 이 노래는 좌창의 12잡가와 함께 경기소리의 대표적인 노래로 꼽고 있다. 구성악곡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차례로 부르는 것을 기본 틀로 하는 연창형식의 노래이다. 《산타령》은 예로부터 예인집단에 의해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주로 사찰의 의식이 끝난 후, 산타령과 민요로 일반 대중을 위로하였고, 도시와 농촌에서는 넓은 마당에서 불을 밝히며 참가자들과 함께 즐겼던 노래가 바로 산타령인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현악기들은 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채 따위로 켜서 연주하는 발현악기(撥絃樂器)에 가야금과 거문고, 활로 현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에 해금과 아쟁이 있다. 이 중 1500년 전의 가야금이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면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국의 유명한 악사 우륵과 그의 음악을 높이 인정했던 진흥왕의 만남이 결정적이라 말하고 싶다. 가야국이 망하자 가야금 한 틀을 품에 안고 신라로 투항한 악사 우륵(于勒) 선생을 신라에서는 국원성, 지금의 충주지방에 살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륵은 단순한 악기연주자가 아니라, 가야국에서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일을 비롯하여 대소사를 주도하고 결정하던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였기에 신라에서는 그를 딴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해 특별히 보호 관찰했던 것이다. 고향땅을 등지고 충주에 정착하게 된 우륵 선생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가야금을 타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일 가야금만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꽃피고 새우는 봄이나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동산에 올라 가야금을 타면서 고향을 그리워했고, 가을밤 중천의 달이 높이 솟아도 서러움에 복받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