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기사입력 2011-04-29 오후 6:35:05 한국 사회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라는 글이 아무렇지 않게 떠다니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침략의 원흉이 아니라면 조선의 구세주라도 된단 말인가? 이런 건 마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은인일 수도 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식자층에서 왜 모를까? (☞관련 기사 :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재일조선인 인권평화운동가 서승이 "후쿠자와에 대한 표피적이고 맹목적인 긍정론을 우려한다"라고 일침을 가하는 가운데, '아시아 침략의 선동가'로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대로 들여다 본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이향철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가 번역 출간되었다. 1만 엔 권의 모델로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스승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신격화한 대표적 인물로 도쿄대학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년)를 꼽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는 마루
우리나라 음악가 세 사람을 꼽는다면, 가야금의 우륵, 거문고의 왕산악, 이론의 박연 선생을 꼽습니다. 흔히 3대 악성이라고 하죠. 가야금의 우륵 선생은 나라가 망하게 되자, 가족을 이별하고 모든 재산을 내던지면서 오직 가야금 한 대를 가슴에 안은 채 신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신라 조정에서는 당시 제2 서울이었던 지금의 충주 지방에 편하게 살게 했죠.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려고 우륵 선생은 날마다 가야금을 탔습니다. 특히 달 밝은 밤이면 뒷산에 올라 두고온 고향 하늘을 그리며 애절한 마음을 가야금에 실었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진흥왕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진흥왕의 부탁으로 신라의 세 제자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 곧 가야금뿐만이 아니라 노래와 춤까지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다 배운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배운 열두 곡을 다섯 곡으로 줄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선생은 이에 처음엔 무척 화를 냅니다. 하지만, 고친 곡을 다 듣고 나더니 “매우 훌륭한 음악이다.”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악보 없이 전해오는 우리나라 민속악 대부분은 선생의 가락에 제자의 음악이 덧
한 점 불빛도 없이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한 좁고 더러운 조선인 구역 지나 어두운 밤길을 인력거가 여관방을 향해 달린다 나는 무엇이 좋아 동경의 화려한 네온을 뒤로 하고 조선 땅에 와 있는가 도서관도 없고 강연회도 변변한 음악회도 없는 땅 메이지 40년(1907) 봄 3월 더럽고 누추한 경성에 온 것을 후회하는 총독부어용신문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 동양척식회사 땅 3정보 공짜로 빌려 8년간 사과 농사지을 땐 한몫 잡자는 뜻이었겠지 조선인이여! 조선과수사업을 번창케한 구즈미의 공적을 잊지마라 이 달콤한 사과 향기 조선은 깊이 그리고 길이길이 기억하라 외치지만 그 과수 주렁주렁 열리면 조선인 주려했나? -구즈미 구니카쿠의 애플, 이윤옥 시 - 조선의 과수사업을 번창케 한 구즈미를 조선인은 꼭 기억해야 한다고 글을 쓴 야마가타 이소오(山懸五十雄)(1869~1959)는 시가현(滋賀縣)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영문과를 중퇴한 엘리트. 형 (山縣悌三郞)이 만들던 소년원(少年園) 잡지 편집에 관여하다가 나중에는 소년문고(少年文庫), 만조보(万朝報)등의 영문담당 기자를 거쳐 경성의 총독부 어용신문인 서울프레스(ソウルプレス) 사장에 취임한다. 이 시절 '경성에는 기생
지난여름 나는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안내 겸 통역을 맡아 천년고도 교토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일행 중에 고대건축을 공부하는 분이 있어 일본 불교건축의 최고라는 뵤도인(평등원, 平等院)을 보러 교토 남동쪽에 있는 우지시(宇治市)에 갔을 때였다. 일본 돈 10엔짜리 동전 뒷면에 새겨진 뵤도인은 백제계 도래인 후지와라(藤原)가문과 관계가 있는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로 뵤도인 앞에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연못 속에 비친 건축물과 푸른 소나무의 휘늘어진 자태는 한폭의 그림 같아 건축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볼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한국 여행사들도 앞다투어 뵤도인을 새로운 코스로 집어넣고 있어 한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다. "두 분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뵤도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친 기모노 차림의 두 여인과 우리 일행은 신호등 앞에서 만났다. "기레이데스(아름답다)" 기모노 차림의 여인들만 보면 다가가 이 말을 건넨 사람은 모 잡지사 문화부 최 기자로 그 덕분에 우리는 일본전통 옷차림의 많은 여인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름답다, 예쁘다"라는 말은 여성을 꼬시는(?) 세계 공통어일뿐 실제 모습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나듯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다 / 13년간 탐라도에 내동댕이쳐진 스승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멀고먼 땅 청나라에서 구한 책/ 눈물로 마주하며 스승과 주고받던 사랑/ 추사 선생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상적의 마음을 그린 것/ 대정고을의 가득한 푸른 솔향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라. -추사 유배지에서 ‘이한꽃’- -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후지츠카 씨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난단다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단다 / 13년간 까닭 없이 외로운 땅 탐라도 / 내동댕이쳐진 스승 그리며 / 먼 땅 청나라에서 스승께 드릴 책 한 짐을 지고 왔단다 / 눈물겨운 추사 선생 /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이상적 마음을 그린 것이란다 / 그 이름 만고에 남는 것은 / 고독한 스승을 돌본 갸륵함 때문이라고 / 후세 사람들 아낌없이 입을 모은다. -이한꽃 시 ‘이상적 님’-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이 난세지음(亂世之音)이다.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꽉 차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매개수단이 말(言語)이라면 이 말에 고저를 넣어 길게 부르는 것이 곧 노래이기에 이를 영언(永言)이라고도 했다. 얼핏 생각하기에 음악과 정치, 정치와 음악은 별로 관계가 없을 법한데, 옛사람들은 음악이 곧 정치이고 정치가 곧 음악이라고 생각해 온듯하다. 문기악지기정-聞其樂知其政이란 말이 있다. 그 나라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정치수준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악여정통의-樂與政通矣 곧 음악은 정치와 더불어 통한다는 말도 있고 예악형정 기극일야-禮樂刑政 其極一也라고 해서 예의범절이나, 음악, 정치, 법률의 극점은 하나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정치와 음악이 무관하지 않음을 깨우치도록 하는 말이다. 공자가 갑(甲)이라는 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농부가 부르는 즐겁고 희망에 찬 노래를 듣고 그 나라의 정치가 순조롭게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옆의 을(乙)이라는 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탄식조의 원
[우리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얼마 전, 국회의원을 지낸 K씨, 그리고 모 은행장을 지낸 P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K씨가 실토하는 말이 나는 추임새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서 교수의 추임새에 인색한 세상이란 책을 보고 조금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하자 P씨가 추임새라니요? 추임새가 무슨 말입니까? 새 이름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것이 한국의 고위직 인사들이나 지식인 사회의 서글픈 실상이려니 생각하며 추임새에 관해 설명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추임새란 남을 추켜 주는 말이다. 남을 칭찬해 주어 더욱 힘을 내도록 격려해 주는 말이다. 판소리 부르는 모습을 보면 소리하는 사람 옆에 북통을 마주하고 앉아서 열심히 북을 치는고수(鼓手)가 있는데 그는 북만 열심히 치는 것이 아니라, 대목 대목에서, 또는 구절 끝에서 얼씨구 으이, 좋지, 좋다 잘한다 등의 조흥사(助興詞)를 발함으로 해서 창자(唱者)의 흥이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추임새이다. 목청을 돋우는 소리, 대사를 읊조리는 아니리, 춤을 곁들인 여러 가지 동작, 즉 발림을 섞어가며 3~4시간, 길게는 7~8 시간이상 판소리를 연출한다는
동해 한 점 외로운 섬 독도 고래로 우리가 지켜 온 섬 어느날 오천년 종묘사직 부수고 나라 삼키더니 나가사키 히로시마 폭탄 맞고 되찾은 국토 무슨 심보로 자기땅이라 우기는 가 금세기에 나라 잃고 찾은 반쪽 광복 서럽다해도 그 외로운 섬 우기는 일 더욱 서러워 아! 세상사람들이여 어찌 이 노릇에 침묵하는가! 날강도의 국토 침탈에 어찌 눈감는가! 일본의 지식인들이여 어찌 침묵하는가! 강제로 땅 뺏어 코흘리개 어린애들 책에 실으면 참 역사 바른역사 되는 줄 알지만 하느님은 안다네 그런 억지 그런 생떼 천벌 받아 마땅한 죄 국토 강탈 독도 강탈. ------------------------------------------- 지진참사 와중에도 독도 야욕 드러낸 일본 [논단] 일본은 독도를 교과서에 싣겠다는 선전포고를 즉각 중단하라! 이윤옥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국 방송은 일본처럼 모든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24시간 보도 체제로 들어가 경쟁이 치열했다. 지금도 일본 재해 지역의 보도를 시시각각 전하고 있을 만큼 이번 대재앙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크다. 가족을 잃은 사람, 집과 직장을 잃은 사람은 물론이고 아예 마을 자체가 싹쓸이된 모습을 보면
진보쵸 역 내려 와이엠시에이 가던날 빌딩 숲 도로변 팬지꽃 반겼지 한국말 유창한 다즈케 교장 선생님 나그네 반기며 손잡고 안내한 10층 자료실 누런 낡은신문지 속 2.8독립운동에 빛나던 영광의 얼굴 최팔용,김도연,백관수... 스물일곱명 내란음모죄로 잡혀가던 조선 청년들 팔벌려 보듬어 준 사람 후세다츠지 마수 땅와이엠시에이 하느님 보호하사 조선독립만세 열여덟 먹던 해 미야자키 농촌에서 청운의 변호사 꿈꾸며 후세 변호사말했다지 높은 관직 보다 바른 일하며 살고싶다고 군국주의 더러운 진흙 속에 핀 청아한 꽃 한송이 후세 변호사 길이길이 그 이름 기억할지니 기억할지니.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 (布施辰治 1880 ~ 1953.9.13)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新人의 朝鮮印象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布施辰治;1890-1953)는 그렇게 조선의 인상을 쓰고 있다. 그 무렵 한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