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밥그릇은 밥을 담아 먹는 그릇이다. 거창하게 사전적 의미고 뭐고 할 것 없이 세살 난 코 빠는 꼬마 친구들도 다 잘 아는 이야기를 거룩하고 숭고한 문학과 연계를 지어 논의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고무신 신고 넥타이 매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 않다는 것이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도리임을 또 어찌하랴. 밥그릇이 밥을 담아 먹는 그릇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1차원적인 생각일 뿐이며 전문인들은 하나의 같은 밥그릇을 놓고도 그 밖의 2차원, 3차원적 사유를 하게 된다. 이것은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고 사실 예술가들은 각기 자기의 전문성에 따라 앞에 놓인 밥그릇을 보며 여기에 어떤 밥을 얼마나 담아 어떻게 먹을까 하는 생각보다 밥그릇 자체의 디자인, 색상, 질료 등등에 더욱 관심이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평범한 일용품에서도 예술적인 감각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들의 직업이며 그들의 눈을 거쳐서 다시 탄생한 밥그릇은 이미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늘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이며 가치 무한한 보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또 현재형과 미래형이라는 개념이 작용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밝은 달밤이다. 실실이 천만오리 달빛은 창문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내려 방안은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훤하다. 자리에 누운 나는 이리뒤척 저리뒤척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다. 참으로 그저 잠들기에는 아까운 달밤이니 말이다.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들창을 열었다. 달빛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안을 넘쳐나게 뛰어들었다. 낟알 익는 구수한 향기가 바람결에 안겨왔다. 나는 창턱을 짚고 달빛이 꽉 찬 하늘땅을 둘러보다가 은파도를 일구며 굽이쳐간 듯이 새하얀 달빛을 비껴안고 줄기줄기 뻗어간 아득한 산마루에 눈길을 얹었다. 이때 어디서인가 가슴을 흔드는 은은한 단소 소리가 교교한 달빛을 타고 울려오는 듯하였다. 선경에서나 울려오는 듯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환각이었다. 나는 얼결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달 밝은 밤이면 언제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은은한 단소 소리였다. 내가 이런 환각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여름부터였다. 그때 나는 도거리호*들의 논전간관리*에 대한 경험을 취재하려고 원봉벌로 갔댔다. 그날도 이 밤처럼 달 밝은 밤이었다. 낮에 취재하였던 자료들을 다 정리하고 자리에 누운 나는 창가에 기웃이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야, 요것들을 보지, 여보세요, 어서 나와보세요. 네?!” 점심식사 휴식 짬에 소파에 걸터 누웠던 나는 앞뜨락에서 떠들어대는 안해의 목소리에 끌려 뜨락에 나섰다. 안해는 손바닥만큼 하게 뚜져놓은*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길 좀 보시라는 데두요.” 안해는 응석을 부리듯 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가뭇가뭇한 토양을 뚫고 파란 바늘 끝 같은 것들이 뾰족뾰족 올려 밀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벌써 햇빛을 받아안으려는 듯 여린 두 팔을 펼치고 미풍에 제법 하느작이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 어떤 새 생명의 탄생을 맞는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요것들이 모두 꽃으로 활짝 필 때면 우리 집 뜨락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한해는 나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순간 나의 눈앞에는 꽃 씨앗을 가져왔던 낯모를 로인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그날, 새살림을 갓 꾸린 우리는 날듯한 기분으로 ‘마당을 공근다’*, ‘창문 유리를 닦는다’ 하며 뻔질나게 돌아쳤다. “허 허, 새집들이에 기쁘겠군.” 일손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보니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새하얗게 센 낯선 로인 한 분이 돛천멜가방*을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우리들의 옛말에 “곰이 옥수수따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곰이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옥수수를 따는데 오른발로 딴 이삭을 왼쪽 겨드랑이게 끼고 나서 왼발을 들어 한 이삭을 따려하니 그 겨드랑이에 끼어있던 먼저 딴 옥수수가 빠져버리는데 그러자 다시 오른발을 들어 또 다른 이삭을 따서는 왼쪽 겨드랑이에 낀단다. 곰이 이렇게 온 하루 온 밭을 다 헤매며 옥수수를 따도 결국에는 한 이삭만 들고 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온 하루 옥수수밭 한 뙈기를 다 버려놓고 나서 달랑 한 이삭만 들고가는 곰, 뒤뚱뒤뚱 걸어가는 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처구니없어 “참, 미련한 곰이구나.”하고 제 딴엔 개탄하는 이가 있다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아직 세상 돌아가는 리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만약 정말 하느님이 계시여 하늘에서 곰이 옥수수를 따는 모양을 굽어본다면 “그 자식 참 귀엽구나.”라고 하시며 빙그레 웃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리치를 곰만이 먼저 깨닫고 그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량손의 떡”이라는 말에 이어지는데 욕심스레 량손에 모두 떡을 쥐고나면 이제 또 다시 무엇을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아귀에 모두 무엇인가를 꽉 움켜쥐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한 그루 나무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이면서 하루의 길이를 다 못 사는 그것들을 안쓰러워하다니… 금을 그어 놓고 저들끼리도 알아 못 듣는 말을 하면서 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차례진 삶의 길 목 그 끝까지 서로가 서로에게서 부끄러움을 배우며 우리는 모두가 한 생을 살려고 여기에 온 것 아닐까 가을국화 한 송이도 풀 매미 한 마리도 며칠로 이어지는 연휴를 맞아 찾아오는 술친구들도 별로 없고 하여 할 일 없이 거울에 마주 서서 혼자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써보았던 이 시 한 구절이 생각나서 가만히 읊어보았습니다. 이 시의 몇 구절을 외우면서 거울 속에 비쳐진 저 터덜터덜한 모양을 보니 찬찬히 보면 볼수록 잘 난데 한곳 없이 참 여러분들에게 미안하게도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부끄러운 생각, 이 별난 부끄럼타기는 요즘 와서 퍽 자주 갈마들더니(서로 번갈아들더니) 설을 쇠고 나이 한 살 더 먹고 나서 더욱 짙어갔습니다. 그처럼 기세 좋던 30대라는 것도 이젠 1년이라는 카드 한 장밖에 남지 않았고 이 나머지 한 장의 카드만 써버리면 “흔들리지 말라”는 불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비너스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주재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따라서 비너스의 동상은 고대그리스로마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미학적인 감각과 동경을 그녀 한 몸에 담아서 정성껏 빚어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퍽 흐른 뒤에 신화역사의 두터운 지층 속에 묻혀있던 그 비너스동상이 발굴되어 후세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처럼 아름다운 여신의 몸은 두 팔 없는 상태였다. 미와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동상이 두 팔을 가진 원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한없는 아쉬움을 안고 사람들은 여신상의 원래 모습을 복구하려고 여러 가지로 시도하여 보았다. 팔을 들어 머리위에 손을 얹어보게도 하였고 팔을 내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을 쥐여보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 만족스럽지 못하였으며 두 팔이 없는 비너스보다 못하게 보였다. 두 팔이 없는 비너스, 비너스는 두 팔을 버림으로써 후세의 우리들에게 무한한 상상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두 팔이 없는 비너스를 마주 보면서 저마다 각기 무수하게 많은 아름다운 팔을 비너스에게 달아주면서 가장 완미한(완전하여 결함이 없는) 자세를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가위, 바위, 보-” 참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두 손가락을 척 빼들면 가위, 주먹을 내들면 바위, 손바닥을 쫙 펴면 보, 가위는 보를 베고 보는 바위를 싸며 바위는 가위를 부실 수 있고… 이렇게 순환 식으로 접전하면서 기회포착과 순발력과 판단력을 비기고 의지와 지혜를 겨루는 아이들의 놀이입니다. 그 어떤 거추장스러운 유희도구도 필요 없이 하나 이상의 상대만 있으면 놀 수 있는 이 놀이, 아이들과 함께 이 “가위 바위 보”를 놀다보면 저도 모르게 아이들처럼 이 놀이에 깊이 빠져 들어가 흥분해하는 자신과 만나게 되며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대대로 전해내려 온 아이들의 놀이문화 한가지에도 우리 조상들의 무한한 슬기가 담겨있음을 알게 되고 끝없는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가위 바위 보”는 우리들에게 먼저 모든 일에 도전적인 자세로 맞서라고 합니다. 상대와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어야 만이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객체로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여기에는 또 자신이 꼭 이긴다는 자신감과 함께 완전한 실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이 완전한 성공과 완전한 실패가 반반씩임을 알려주는 위험지수도 포함되어 있다는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그것은 결국 “아름답다”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사물, 상태, 현상, 관념 등 각 방면에서 그 대상의 미적 의미를 추출하여 지시하는 어휘로 다시 말하여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을 일컫는 말로 “아름답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백두산에서 백두산을 마주하고 또 백두산을 둘러보면서 “아름답다” 이 말의 참뜻을 다시 새겨 보게 되었다. 지난여름, 식구들과 함께 백두산행을 하였다. 다행히 백두산자락에 태를 묻고 이 성스러운 산을 머리에 이고 사는 은혜를 입은 우리는 다른 곳에서 사는 이들보다 백두성산과 자주 만나게 된다. 나도 지금까지 이 성산에 오른 것이 어림잡아도 열 번은 훨씬 더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직장관계나 행사차로 아니면 국외 관광객들과 곁들어 다니다니 거의가 새벽같이 출발하여 길에서 몇 시간을 끄덕끄덕 졸다 산문에 도착하여서는 휘리릭- 지프차를 나누어 타고 산정에 올라 “만세!”나 “야호-”를 몇 번 외치고 바삐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백두산정에 올라 그 무궁한 조화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자연과 마주하는 것이 마냥 새로운 감동을 받아 안는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내가 취재를 끝마치고 하숙집 뜰에 들어설 때는 날이 어두운 뒤였다. 동분서주하며 온종일 바삐 돌아치다나니 맥이 진하였다. 내가 지친 다리를 끌고 하숙집 문턱을 넘어서자 아래목에 쪼크리고 누웠던 주인집 어머니가 기척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았다. “그새 쪽잠이 들었댔군, 어서 올라오게. 온종일 다니느라니 얼마나 시장하겠나.” 주인집 어머니는 인츰 취재가방을 받아 구들우에 놓고는 행줄를 감아쥐고 가마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새하얀 밥김과 함께 구수한 토장국냄새가 한몸에 감겨들었다. “웃마을에서 대충 요기를 했는데요.” 저고리단추를 벋기며 내가 이렇게 말하자 주인집 어머니는 대뜸 언성을 높이였다. “그렇게 끼니를 때워서야 쓰나, 어서 이리 오게. 속이 비면 잠도 잘 안 오는 법이네.” 주인집 어머니의 책망에 나는 그저 벙긋 웃고 말았다. 하긴 웃마을에서 떠날 때 저녁이라고 먹긴 했지만 밥상 위에 차려지는 기름기 도는 이밥과 두부장을 보니 군침이 스스르 돌았다. 내가 밥상에 마주앉자 어머니는 삶은 달걀을 발라 내 앞에 놓으며 무작정 많이 먹으란다. “우리 아들놈도 언제 졸업하여 제 노릇을 하겠는지?” 시뻘겋게 고추가루를 버무린 두부장을 맛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현대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오늘의 우리시대를 “속도”라는 한마디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는 어느 스마트폰의 광고카피 “빠름~빠름~빠름~”이라는 문구처럼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바뀌고 빠르게 변하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스피드(Speed)”라는 용어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마저 뿌리째 뒤흔들어 놓고 있다. 남보다 빠르지 않으면 뒤쳐지고 뒤쳐지면 사라지고 지워지고 곧바로 끝장나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을 안겨주는 이와 같은 “무한경쟁의식”은 우리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그저 앞만 바라보고 무작정 내달리게 한다. 이러한 “쾌속질주”를 선호하는 사회환경은 우리들의 심리상태를 자극하여 많은 이들의 눈앞에 다만 목적과 결과만 보이게 한다. 이 “목적”과 “결과”만을 추구하는 “속도의 시대”에 간과되고 외면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 “목적”과 “결과”를 이뤄내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시작으로부터 끝에 이르는 사이의 그 수많은 시간들, 그 “과정”이라는 시간이 뭉텅 잘려나간다면 우리가 바라던 “목적”과 “결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