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슬옹 기자] 행소박물관과의 아름다운 인연 2010년 4월 27일. 저는 행소박물관 초청으로 훈민정음 특강을 위해 계명대학교에 도착했습니다. 학교 캠퍼스에 들어선 순간, 저는 얼떨결에 무릉도원에 빠진 사람 모양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실제 무릉도원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캠퍼스가 있었다니. 그동안 가장(?) 아름답다는 여러 대학의 캠퍼스를 두루 보았지만, 그 어떤 대학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격이 달랐습니다. 마침 꽃피는 봄이라 더욱 아름다웠던 듯싶습니다. 제가 안 가본 수많은 외국 대학 캠퍼스를 합친들 이보다 아름다울까요? 저는 저도 모르게 무릉도원의 신선이 되어 캠퍼서 여기저기를 누비었습니다.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는 발을 담그고 싶었으나 겨우 억제하고 기분만을 만끽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기분이 너무 좋아 흥에 겨워 저의 주특기인 명강의(?)를 신명나게 펼칠 수 있었습니다. 행소박물관장님을 비롯한 모든 직원 분들의 친절함은 캠퍼스 풍광만큼이나 포근했고 강연 참석자의 열의까지 더해 저는 제 생애 최고의 열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캠퍼스를 거닐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조선왕조 22대 정조 임금은 한글과 관련된 흥미로운 세 통의 편지를 남겼다. [사진 1]은 원손(영조의 맏손자) 시절에 외숙모인 민 씨(홍봉한의 며누리)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현대말로 옮겨 보면 이렇다. ▲ 정조의 원손 시절 한글 편지 숙모님께 가을바람에 몸과 마음이 평안하신지 안부를 여쭙습니다. 뵈온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받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오니 기쁘옵니다. _원손 영조 35년(1759년)인 여덟 살 무렵 썼다고 하는 이 편지는 받는이와 보내는이만 한자이고 나머지는 정겨운 한글 글씨로 되어 있다. 정조는 바로 여덟 살 때인 이 해(1759년) 2월 12일에 세손으로 책봉된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세손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연초에 쓴 편지로 보인다. 어린 나인데다가 여성과의 편지 왕래는 한글로 하는 것이 일반 관습이고 보면 한글 편지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린 나이에도 편지틀에 맞추어 외숙모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건강에도 마음 쓰는, 효성스러운 손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 2]는 세손 시절의 편지글이다. ▲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올해는 한글 창제 570돌이요 반포 567돌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 탄신 616돌이기도 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상당수의 현직 국어 선생님들조차도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고 또 현장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학계에서도 일부이기는 하나 집현전 협찬설이 맞서 있기는 하지만 훈민정음 전공 학자 가운데 친제설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협찬설은 -설조차 성립하기 어려운 매우 불합리한 의견이다. 협찬설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인 냥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렇게 놀라운 거대한 문자 창제를 어찌 개인이 혼자 할 수 있느냐는 것이며 또 하나는 민중사관에 의해 영웅주의 사관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런 혐찬설이 굳어졌다.협찬설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보나 훈민정음 관련 학문적, 맥락적 진실로 보아서도 성립하기 어렵다. 한글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 음악, 수학 등 다양한 관련 학문에 정통한 천재가 지속적인 오랜 노력 끝에 만들 수밖에 없는 문자다. 오히려 공동 연구로는 창제하기 어려운 문자다. 집현전 학자들의 참여는 창제 이후에 새 문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1443년에 세종이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한 최초의 한글 28자는 언제 어디서 처음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까? 한글이 단지 우리의 문자라서가 아니라 한글 창제는 인류 문자의 대혁명이었기에 더욱 궁금하다. 유감스럽게도 세종이 최초로 드러낸 28자의 실체는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세종은 1443년 음력 12월에 28자를 창제하였다. 물론 이 때는 문자 창제에 성공하였지만 그것을 세상에 정식 공표한 단계는 아니었으므로 일부 미진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세종이 돌아가신 뒤 편찬하여 발간한 세종실록은 전대미문의 이 놀라운 사건을 한자 단 58 자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 1] ▲ [사진 1]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1443년 12월 30일자 실록 기록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世宗莊憲大王實錄卷第一百二終"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세종은 조선의 태종 임금인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세워진 지 5년째인 1397년 음력 4월 10일, 지금의 서울인 한양 준수방 어느 저택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는 아버지 이방원이 임금이 되기 전이었으므로 궁궐 밖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한양을 열두 구역으로 나눴는데, 세종이 태어난 준수방은 그중 하나였다. 준수방은 현재 서울 종로구 통인동으로 추정한다. 세종이 태어난 집은 현재 남아 있지도 않고 복원하지도 않은 상태다. 다만 그 부근에 돌비석 하나만이 외롭게 세워져 역사를 말하고 있다. ▲ 돌비석 / 설명 : 세종이 태어난 곳을 알리는 돌비석(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세종이라는 이름은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이도(李祹)였다. 도라는 이름에는 복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도는 백성에게 복을 베푼 임금이 되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이름이 예사롭지 않은 셈이었다. 옛날에는 임금과 같이 귀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이름을 지어 주신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도를 원정(元正)이라 불렀다. 원
[그린경제=김승옹 문화전문기자] ▲ ㅁㄴㄹㅇㄹㅇㄶㄹ 그린경제 / 한국문화신문 얼레빗=김슬옹 문화전문기자
[얼레빗=김슬옹 기자]과연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반포식을 했을까? 훈민정음 반포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활짝 연 사건이기에 무척 거창하게 열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한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무척 설레는 상상 아닌가. 그러나 결론은 반포식을 안 열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 의견이다. 왜 그럴까. 첫째, 일단 반포식을 했다는 역사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훈민정음 반포를 알린 기록은 두 가지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9월 29일 기록에 是月 訓民正音成(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라고 나온다. 이때의 ≪훈민정음≫은 책 이름이다. 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책이 완성되어 간행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9월 29일에 간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기록은 달별 기록이기 때문이다. ▲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 반포식을 했다는 가정 아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가상으로 그린 그림 ≪조선왕조실록≫은 사건이 일어난 날 그 사건을 그대로 기록하는 날별 기사와 한 달 간 일어난 사건을 모아 마지막 날 모아서 기록하는 달별 기사로 나뉜다. 물론 9월 29일 사건일수도 있지만 위 기록은 이 달에라고 하여 날별 기사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