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 이 달 균 임 떠난다고 울지 마라 봄 간다고 아쉬워 마라 절집에 남은 것은 탑 하나와 당간지주 돌 하나 바다에 던져 그 깊이를 잰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앞에 서면 그 중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탑신에 자세히 눈길을 주면 노련한 석공의 솜씨가 잘 드러난다. 아래 기단 옆면에는 12마리의 사자상을 새겼고, 위 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절터의 규모는 상당해 보이는데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은 사라지고 없다. 빈 절터엔 4t가량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석조(보물 제120호) 하나가 있는데 많은 스님이 기거했음을 짐작게 한다. 잘생긴 석탑 하나와 미려하게 지탱해 온 당간지주만 있어도 융성했던 절의 모습은 그려볼 수 있다. 기러기 한 마리로 천리 하늘의 길이를 잰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의 눈을 말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몇 개의 유물로 당시를 상상해 볼밖에. 작은 키로 어찌 바다를 잴 것인가. 그저 돌 하나 던져 그 깊이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 이달균 마을보다 탑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 덜 자란 두 그루 소나무를 굽어보는 의젓한 탑신의 무게 하늘이 낮게 드리웠다 추사의 세한도보다 석탑은 더 오래 풍장의 겨울을 온몸으로 견뎌왔다 어느새 눈발 그쳤지만 새들은 가고 없다 절묘하다. 사진작가의 렌즈는 추사의 세한도를 그대로 찍어낸다. 우리가 찾은 날, 눈발은 그쳤으나 조금씩 바람에 쌓인 눈이 이따금씩 날리고 있었다. 진입로는 잘 닦여져 있고 화장실도 잘 갖춰져 있다. ‘탑리리’라는 이름을 보면 어쩌면 마을보다 먼저 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언덕 위에 오롯이 선 탑은 연륜에 견주어 보존 상태가 좋다. 석탑이지만 목조건축의 모양을 띠고 있는데, 단층의 지붕돌 귀퉁이가 살짝 들린 것이 그런 특징을 잘 나타내준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 이 달 균 철갑도 진토된 세월이 흘렀으나 그대여 오롯하다 금동의 상륜부 투구에 일장검으로 지맥을 짚고 섰다 장부의 기개 닮은 풍모 의젓하고 석공의 섬세한 눈썰미 살아있는 휘도는 스란치마의 결도 숨겨 두었다 통일신라 때 세운 것으로 이렇게 전탑의 원형을 가진 탑은 드물다. 특히 금속제 상륜부의 구성이 오롯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유일하다. 탑신의 체감률이 매우 적절하여 안정감은 물론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선 당대 공예기술의 미려함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탑은 늠름한 남성성과 함께 섬세한 여성성까지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작품이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성주 법수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는개비에 마음 젖고, 진눈깨비에 옷 젖어도 울지마라 저만치 눈먼 세월이 간다 석탑은 보고도 못 본 척 바보가 되라 일러준다 울지마라 떠났다고 아주 떠난 것이더냐 품었다고 언제까지 내 것이다 우길 건가 절간은 자취 없으나 그 바람비 여전하다 가야산국립공원은 경남 합천군, 거창군, 경북 성주군에 걸쳐 경상남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영산이다. 주봉인 상왕봉(1,450m)과 그 주변에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 등 해발 1,0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둘러 서 있다. 그런 만큼 불교의 대명지로 이름나 있다. 법수사는 이미 폐사가 되었고, 해인사가 워낙 유명한 탓에 이 절터는 물론 석탑을 보러 오는 이도 거의 없다. 가람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산을 배경으로 쌓아올린 석축단을 보면 한때 1,000칸이 넘는 건물에 100여 암자를 거느린, 신라 애장왕이 심혈을 기울여 지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석탑은 무기교의 기교를 보는 듯 고졸한 기품이 돋보인다. 는개비 오는 날 시나브로 옷은 젖어도 상처 입은 마음 달래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보라.(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릉신복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누가 고려를 저문 왕조라 했나 북쪽엔 금당지 좌우측엔 회랑지 이 가람 흔적에 기대어 고려를 듣는다 황급히 옷깃 적시고 떠난 여우비도 하늘을 걸어와 사라지는 무지개도 해묵은 고려를 잠시 펼쳐 보인 것이리 탑 찾아 다니다 보면 의외로 지역민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땐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 게 상책이다. 정작 근처 마을 사람들도 모르는 것을 내비게이션이 아는 것을 보면 한국 정보통신(IT)산업의 척도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찾아간 신복사터탑은 화려함보다는 범박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낮은 산릉이 내려와 가지런한 솔숲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먼저 탑 앞에 배치된 보살상에 눈길이 간다. 손은 가지런히 모았는데 원통형의 커다란 관을 쓴 채 왼 무릎은 세우고 오른 무릎은 꿇어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앉음새에 따라 흘러내린 옷의 주름이 자연스럽다. 가람을 짓고 탑을 세운 고려인들의 기원이 간절했겠지만 탑과 보살상을 만든 석공의 노고가 그려진다. 연꽃 모양을 한 탑 상륜부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기단과 몸돌 각층 밑엔 고임돌을 넣어 안정감 있게 배치하였다.(시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 - 이 달 균 난 그저 말없이 천년을 견뎌왔다 남한산성 이성산성이 날 둘러 감쌌으니 오늘은 삼층탑이랑 바둑이나 둘란다 아서라 보채지 마라 벗 하나면 족한 것을 진자리 마른자리도 익히 앉아 보았으니 허명에 목숨 건 이들 진즉 다 죽었다 하네 탑 찾아가는 길은 다소 산만하다. 낚시터와 즐비한 음식점들 때문이지만 이내 어수선한 마음 추스르고 하남 동사터에 닿는다. 절터는 동북으로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이 보이는 분지에 있다. 하남 동사터는 고려 초기 하남을 중심으로 한, 한강 이남 지역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정사각형의 석탑으로, 건립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오층탑은 삼층탑과 이웃해 있으니 그리 외로워 보이진 않는다. 화려한 외형보다는 외려 담담한 격이 있어 보물다운 느낌이 든다. 탑신 구조상 불규칙하게 얹혀 있지만, 그 조화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산그늘 이우는 고즈넉한 오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 탑 사이 먼 능선에 솟아오른 첨탑도 꼭 탑을 닮았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 장항리서오층석탑 - 이 달 균 신라를 갖고 싶다면 역사도 갖고 가라 부장품이 탐난다면 정신마저 앗아가라 동탑(東塔)의 잔해 구를 때 서탑(西塔)은 울지 않았다 탑은 토함산이 굽이치다 한 호흡 가다듬는 능선 끝자락에 서 있다. 절 이름과 연혁에 대해서는 자료나 구전이 없어 마을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터’라 부르고 있다. 탑 구경 다니다 보면 애잔한 심지 돋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이 탑도 그중 하나다.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서에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서탑은 그런대로 제 형상을 갖추었기에 국보(제236호)로 지정되었으나 동탑은 원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계곡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1층 몸돌을 가져와 다섯 지붕돌을 겨우 모아 세워두었다. 서탑을 자세히 보면 정교한 장인의 손놀림이 상상된다. 어떤 연유,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이렇게 정교한 숨결을 불어넣었을까. 1층 몸돌 4면(面)에 도깨비(鬼面) 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2짝의 문, 그 좌우에는 연꽃 모양 대좌(臺座) 위에 서있는 인왕상(仁王像)의 정교함은 가히 걸작이라 할 만하다. 이런 서탑의 아름다움을 보면 원 형체를 잃어버린 동탑이 더욱 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달성 대견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대숲은 씻어라, 귀마저 씻어라 하고 바윗돌은 잊어라, 깡그리 잊으라는데 석탑은 그저 빙그레 웃고만 계시네 듣고 싶지 않은 말, 들은 날에 대견사터 찾아간다. 대숲에 들어 귀를 씻고 싶다. 돌로 손등을 찧어 그 아픔으로 잊고 싶다. 하지만 삶이 그리 간단하며 인연을 끊는 일 또한 그리 쉬울까. 차라리 나를 묻고, 세속과 절연하는 심정으로 길을 떠난다. 내 속마음이야 끓든 말든 탑은 언제나처럼 말이 없다. 석탑은 산 정상 암반에 건립되어 넓은 시계를 확보하고 있는데,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이 흥한다는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따라 세운 예라고 한다. 대견사엔 꽤 그럴듯한 전설도 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세수를 위해 대야에 물을 떠 놓았는데, 그 물에 대국에서 본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기에 가히 길지라 하여 이 터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견사라 했다는 구전이 그것이다. 고개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당간지주와 느티나무가 멀리 산안개를 배경으로 서 있다. 그 풍경 속에서 조금씩 모가 깎여가는 나를 느낄 수 있다. 돌아올 즈음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의 그 미움이 저만치 물러나고 있었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 - 이 달 균 사자도 절간에 오면 할 일이 있나보다 소신공양 좋다지만 몸 공양도 거룩하다 짊어진 말씀이 서 말 닷 되 하늘이 다 노랗다 두촌면 괘석리를 몸 하나로 옮겨와 읍사무소에 세웠으니 청사가 곧 절이다 부처님 경전 펼쳤으니 미륵세상은 곧 온다 이 석탑은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었다 한다. 그곳을 먼저 찾아보니 주변은 경작지로 변해 있고,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 외에 별다른 흔적이 없다. 석탑이 선 곳은 홍천읍사무소 앞마당이다. 다른 시선으로 보면 이 석탑은 가장 중생과 가까운 곳에 있다. 굳이 을씨년스럽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석탑 선 곳이 종일 경적소리 들리는 곳인데 이 또한 범종소리로 고쳐 들으면 되지 않을까. 비록 석탑의 각 부에 다소간 파손이 있고 부분적으로 마멸 흔적이 있으나 4좌의 석사자 모습이 그런대로 형태를 갖춘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다. 네 마리 사자는 투박한 연꽃을 새긴 기단 위에 뒷다리는 구부리고 앞다리는 세운 채 다소곳이 앉았는데, 위엄보다는 소박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고려 초기 탑으로 추정한다.(시인 이 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함양 승안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명산 있는 곳에 명찰이 있었고 명찰 있는 곳에 손 모은 탑 있었다 품을 것 다 품은 산이 지리산 아니던가 고려 적 한 석공은 부처님 부름으로 몸돌엔 사천상을, 머리 쪽엔 부용꽃을 미려한 부조 새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바쁜 길손이여 시절이 분주해도 이곳 지나거든 눈길 한 번 주고 가소 승안사 잊혀진 이름, 석탑 하나 의연하다 승안사터는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다. 자세히 눈길 주면 섬세한 석공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두 개의 기단이 3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맨 아래 기단부엔 연꽃 조각을 새겨 둘렀고, 두 번째 기단부에는 부처, 보살, 비천상을 새겼으며 탑신 1층 몸돌 4면엔 남방ㆍ북방ㆍ서방ㆍ동방의 사천왕상을 돋을새김(부조)해 놓았다. 사천왕상은 절 일주문에서 흔히 본 과장되고 험상궂은 모양이 아니라 미소 띤 동자상처럼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몸체 굴곡 또한 부드럽고 풍성하게 돋을새김(양각)하여 표정이 살아 있다. 현재 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두 번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이웃한 곳에 고려 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석탑이 그러하거늘 석조여래좌상인들 우여곡절이 없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