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총소리가 밤하늘을 찢고 눈만 뜨면 어리둥절한 뉴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군인 이름들이 언론매체를 도배질하던 그 겨울에 육군본부에도 궁정동에도 무주공산 청와대에도 눈은 내렸다. 처음 겪어보는 극단의 회색이었다. 하늘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음악 선율도 온통 회색조(調)였다. “김대중이가 잡혀갔대.” “김영삼이 김종필이도 가택연금 당했다는구먼.” 사람들의 수근거림마저 우중충하던 세모(歲暮)였다. <손시향 - 검은 장갑. 지나가다가 밖으로 음악 소리가 새 나오기에 이 노래가 생각나 들렀소이다. 혹시 음반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음악실에서 바라본 입구 쪽 자리는 멀기도 하려니와 음악실 유리에 조명 빛이 반사돼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슴푸레 보이는 형상이나 글씨체나 신청곡으로 보아 노신사임이 분명했다. 아직 교대시간이 조금 남긴 했어도 뒷 진행자의 양해를 얻어 서둘러 음악실을 나왔다. “저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도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만 음반이 없어 들려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할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디 디제이 양반 탓이오? 괜찮으니 앉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좋든 싫든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결과적으로 인류사회에 자본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하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에 가장 알 맞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산업혁명”은 공장제 성립 이후의 시기를 가리킨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면직기계와 증기기관의 발명, 제철기술의 발달로 영국의 산업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1차 산업혁명”이란 것인데, 이 질풍노도는 구미 각국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었고 자연스레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상업주의”라는 자식 까지 얻게 된다. 윤택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해야만 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후에도 계속 산업혁명을 촉발시켜, 우리 인류는 지금 5차 산업혁명을 코앞에 두고 있다. 18세기 중엽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의 태풍은 그 발생지인 유럽을 훑고 머잖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사기노미야 무쓰히토라는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700년 동안이나 군림해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국어사전에서는 “음악”을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형식에 의해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 풀이하고, “노래”는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이라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 이전에서의 제대로 된 “음악”은 일반 백성이 가까이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악기의 연주가 없는, 극히 기초적 수준의 틀만 갖춘 농요나 구전민요들이 널리 불렸고, 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들이 한말개화기까지는 이 땅의 “대중가요”였다. “가요“라는 용어는 고려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대중음악에 국한된 용어는 아닌듯하고 이후 한말에 와서 ‘창가’, 일제 초기에는 “유행창가” 그 이후엔 “유행가”로 그 변천과정을 거쳐 1960년대 이후에 “대중가요” 또는 “가요”라는 용어가 정착하게 된다. 대중가요의 기원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 기준이 심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른 바 “현대적 작법에 따른 창작 곡”이라는 관점을 적용한다면 <낙화유수>*가 나온 1927년을 대중가요역사의 시작으로 치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우리 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경인철도회사에서 어제 개업예식을 거행하는데, 인천에서 화륜거가 떠나 삼개 건너 영등포로 와서 경성의 내외국인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1899년 9월 19일 독립신문에 실린 경인철도 개통관련 기사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6년 전 일이고, 경술국치를 당하기 11년 전 일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철도 개통은 세상이 떠들썩하게 자축해야할 크나큰 경사겠으나,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마냥 웃으며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구미 열강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극동의 작고 힘 없고 늙은,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서로 삼키겠다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청나라와 러시아,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이들은 조선지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지배와 대동아(大東亞)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경인철도 개통이 그 시발점이었다.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우리 인류는 출현의 역사가 가장 짧다.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으로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것이 대략 250만 년 전 일이고, 조금 느슨한 기준으로 라마피테쿠스를 인류의 조상으로 친다 하더라도 500만 년 정도이니 지구의 역사에서는 바로 조금 전 사건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과학발전은 선악을 떠나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 가운데 인류의 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게 바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발전일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수레의 발명과 말의 이용은 교통과 통신에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 제정로마는 제국전역에 숙박 및 편의시설을 갖춘 역참을 설치하고 공영우편제도 실시하여 교통과 통신의 혁신을 가져왔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는 교통과 통신 분야도 암흑기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하기 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19세기 초 조지 스티븐슨이 개발한 증기기관차가 상용화에 성공하고, 반세기 뒤 그레이엄 벨이 전화라는 가공할 발명품을 들고 나와 우리 인류는 대변혁을 겪게 된다. 우리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한 나라의 문화수준은 특수한 몇몇 경우를 빼고 나면 대체적으로 국력과 궤를 같이하는데, 특수한 경우란 어느 한 민족의 고유문화가 선진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와 선진문물이 들어와 그 나라의 실정에 맞게 변화하고 발전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는 것으로, 다방은 그 후자의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이른 바 “70,80 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이 청춘을 보냈던 음악다방을 회고하면서 다방이 흘러온 길을 따라가 본다. 차를 마시는 장소에 대한 기록은 ‘다연원(茶淵院)’이라 하여 통일신라 문헌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니 천년이 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방(茶房)’이라는 용어는 고려 때의 기록에 나타나긴 하나 차를 마시는 곳은 아니고 차와 술, 과일 등을 관장하는 국가기관이었다 한다. 이 땅에서 차(茶)가 가장 많이 음용되던 시기는 요즘을 빼고 나면 고려 때이다. 이는 불교의 융성과 맞물려서 절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말미암아 차 문화는 된서리를 맞게 된다. 조선사회에서 맥이 끊기다시피 한 차가 역사에 다시 등장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렇게 된 얘기라 한다. 어느 광역시에 있는 방송사의 송출직원이라니까 업무상으로도 음악과 그다지 관련이 있는 직책은 아니다. 또한 음반 유통업계나 음반 수집가나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그의 존재는 전혀 알려진 게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이른바 "촉"이란 것이 있었는지 아니면 누가 귀 뜀을 해 주었는지, 그는 횡재와 명성을 한 손에 거머쥐는 선택을 하게 된다. 십 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가 근무하는 직장에는 "계륵"* 같은 골칫덩이가 하나 있었다. 사세의 확장으로 방송 기자재는 자꾸 늘어나는데 보관할 공간은 줄어만 갔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하나 둘 음반실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씨디(CD)도 구닥다리라고 안 트는 세상에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4만 여장의 엘피(LP)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는 눈초리였다. 마침내 위에 계신분이 매각 형태의 처분결정을 내린다. 그냥 내다 버려도 아까울 게 없겠지만 혹시나 문제라도 생길까하여 판다고 해본 것이다. 우리나라 방송사의 간부치고 음악에 조예가 있거나 최소한의 애정이라도 있는 간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야한다. 그걸 그가 솜씨 있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이고 아이들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아이들 버릇없다고 혀 차지 마라. 저 밖에 모른다고 흘기지도 말고 감정이 메말랐다고 탄식도 하지마라. 하늘에서 떨어졌겠는가, 땅에서 솟았겠는가. 아이들이 거울이다, 잘 들여다보아라. 거울에 비친 저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예절이 밥 먹여 주냐고 남 생각은 뭐하러 하냐고 돈 안 되는 일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우리의 모습이며 내 새끼 귀하다며 호호 불기나 했지 좋은 학교가라며 학원으로만 돌렸지 더불어 살아가는 법과 사랑의 소중함과 지혜가 지식보다 위라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다. 설명해보라. 컴퓨터 게임이 아이들을 망친다하면서도 게임 시장이 몇 십조 짜리라며 육성하는 현실을 몇이 하면 도박이고 카지노에서 하면 오락이 되는 현실을 필부의 거짓말은 왜 죄가 되고 위정자의 거짓말은 왜 기술이 되는지 설명해보라. 아직도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지구의 나이가 육천 살이라 우기는 자들이 여전히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설명해보고 정직하면 가난하다는 공식에 대해서도 아이들 앞에 나서서 설명해보라. 요즘 아이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뭐가 자나갔을까? 눈 위에 뚜렷이 남은 이 자국은. 나무토막을 끌고 간 자리도 아니고 커다란 짐승이 지나간 자리는 더욱 아니니, 넓이로 보나 자국으로 보나 눈썰매 자리임이 틀림없다. 대설, 대한이 다 지나도록 눈 한 송이 구경할 수 없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조바심이 났으랴. 분명 어린 자식의 보챔을 당해내지 못한 아비가 첫 눈이 내리자마자 동 트기를 기다려 이 솔밭에서 눈썰매를 끌었을 것이다. 첫 발자국을 찍지 못한 아쉬움도 잊은 채 썰매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 본다. 그 자리엔 아비의 사랑이 남아있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남아있고 옛 기억의 아련함이 남아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지나갔다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자국을 남긴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바람과 저 부드러운 새털구름조차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기며 자나간다. (2)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찔렀다. 고향땅 해주에는 벌써 남풍이 불어와 봄 내음이 가득하겠지만 북국 만주의 사월은 봄이라도 봄이 아니었다. 중절모를 고쳐 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사보국(一死報國, 한 목숨을 바쳐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사방이 고요했다. 매미소리만 빼면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죄다 논밭으로 나가고 느티나무 숲을 가득 채우던 형아들의 웃음소리도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풀밭의 소도 더위에 지친 듯 다리를 펴고 앉아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나그네조차 없어 사공은 주막 마루에서 졸고 있고 나룻배도 더운지 강물에 드러누워 등을 식히고 있었다. 먹을 거라곤 없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주전부리거리라곤 없었다. 강가로 나가 물억새 싹을 뽑아 씹어도 보고 말*을 건져 씹어 봤지만 역시 맛이 없었다. “아이스 께끼!” 형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느티나무 그늘에서 혼자 비석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총각이 나무통을 둘러매고 널브러진 시간을 깨우며 마을을 훑고 다녔다. 처음 보는 사람에다 처음 듣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 나는 까까머리 총각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 총각은 “배텃거리”를 돌고 “배기미” 마을을 거의 다 돌도록 그 신기한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했다. “께끼”를 못 팔아 짜증이 났는지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내가 귀찮았는지 “께끼”장수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스 께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