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양삼승 변호사가 《법과 정의를 향한 여정》이란 책을 내셨습니다. 양 변호사님은 1999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법복을 벗으신 뒤 변호사로 일하시면서 대한변협 부협회장, 영산대 석좌교수 등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고교 11년 선배이시지요. 저번에,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선배님의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책을 보니 선배님이 그동안 변협신문과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언론에 기고한 글, 한국법학원 주최의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등 주옥같은 글을 모아 책을 내셨더군요. 선배님의 아버님은 양회경 전 대법관이십니다. 대법관님은 1971년 6월 국가배상법 위헌 여부가 쟁점이 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할 때 위헌 의견을 내셨지요. 그리고 유신 선포 이후 그때 같이 위헌 의견을 낸 8분의 대법관님들과 함께 타의로 옷을 벗어야 했지요. 헌법재판소가 문을 연 이후 많은 위헌결정이 내려진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배님도 1992년에 위헌제청을 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이를 받아들여 위헌결정을 내린 것이 있더군요. 그 당시 선배님은 형사부 부장판사로 있을 때인데, 한 사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9) “사장님, 회사에 그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의 문화 사업만으로도……” “윤 부장!” 창기는 자금 걱정을 하는 부장의 말을 잘랐습니다. “사람이 말이지,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일세.” 그 말은 바로 창기가 돈을 버는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돈은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 있는 거라고 창기는 굳게 믿었습니다. 한창기. 1976년 3월, 《뿌리깊은나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잡지의 편집인이다. 《뿌리깊은나무》는 출판인 한창기의 오래된 꿈이었다. 어릴 때부터 좋은 책을 만들고 싶었던 꿈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김윤정이 쓴 이 책, 《책바보 한창기 우리 문화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되다》는 우리문화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했던 지성인이자, 책과 잡지를 발행하며 우리문화의 뿌리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었던 한창기의 삶을 다룬 책이다. 그의 삶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어릴 적 건강이 좋지 않아 학교에 업혀 다니면서도 공부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촌음을 아껴가며 공부하고,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은 놓치지 않고 질문하는 열정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워낙 공부를 잘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4) 견훤은 절영마를 왕건에게 바쳤다. 그런데 미래를 예언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무척 후회를 했다. ‘절영마를 보내면 백제가 망한다.’ 고민하던 견훤은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 돌려받기를 청했다. 왕건은 웃으면서 허락했다. 《해동악부》 중에서 어떤 보물이든, 보물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이 녹아있다. 그러나 그 어떤 귀중한 보물이라도 세월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천 년이 넘는 세월과 함께 전설로 묻혀버린 보물도 많다. 그렇게 사라진 보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후대 사람들의 귀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설흔이 쓴 이 책,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역사 속 보물 이야기》는 낙랑의 자명고, 신라의 만파식적처럼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보물과 함께 그림자보다 빠른 말 ‘절영마’, 책을 으뜸가는 보물로 여겼던 책장수 ‘조신선’처럼 생소한 보물과 인물도 다룬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절영마’다. 절영마 이야기는 조선의 대학자 이익이 쓴 《해동악부》에 나온다. 《해동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시의 형식으로 쓴 글이다. 이익은 절영마 이야기를 통해 견훤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p.65) 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1)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일세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메꽃 같은 우리 딸이 시집 삼 년 살더니 미나리꽃이 다 피었네 표독한 장희빈, 천사 같은 인현왕후, 사랑에 눈멀어 부인을 내치는 숙종… 어느덧 역사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선명한 선악의 구도는 어쩔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대립이 수많은 사극에서 무수히 변주되는 까닭이다. 인현왕후 폐비는 당대에도 참 충격적인 사건이기는 했다. 조선 개국 이래 왕후가 폐출되어 사가로 나가게 된 것은 처음이었으니, 당시 지식인들과 관료들은 군주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젊은 임금 숙종의 혈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임생이 쓴 이 책, 《인현왕후전》은 계축일기나 한중록과 더불어 대표적인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작자는 인현왕후를 모시고 있던 궁인이라는 설도 있고, 왕후 폐출에 반대하던 박태보의 후예나 왕후의 친정 가문에서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줄거리는 대체로 다 아는 바다.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 당시 병조판서이던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름답고 덕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 옛집 새로 옮겨 이 물가에 지으니 그대 허술한 집 찾아와 어찌 견디냐 묻네 만 권 책의 훈기를 내가 경모하니 한 바가지의 물로 사는 삶에도 진정한 기쁨을 느끼네 스물여섯 해 전 마음먹었던 것을 오늘 되새겨 보매 근심은 동해물로 달려와 측량할 수가 없구나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일단락짓고, 자기 고향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읊은 시다. 20대 후반부터 꿈꿔 왔던 소망이 이제야 실현된 것을 기뻐하며, ‘만 권 책의 훈기’와 ‘한 바가지의 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이황은 대학자이자, 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생활’을 오래 한 관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학문 쪽에 더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온전히 학문에 집중하려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지은 서당이 계상서당이었다. 이 책, 《퇴계 이황》은 2,500년 유교 역사를 소설로 그려낸 최인호 작가의 《유림》을 청소년용으로 각색한 책이다. 동화작가 표시정이 쉽게 풀어쓰고 최인호가 머리말을 붙였다. 조광조, 공자, 이이 등 유교 사상계의 걸출한 인물을 다룬 최인호의 《유림》 6부작 가운데 여섯 번째 책이다. 이황이 정계 은퇴를 결심한 데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영조 선생이 펴낸 《한국문화 이야기》는 봄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책이다. 우리의 뿌리인 전통문화가 먼 나라 이문화처럼 생소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글과 책이 너무 어렵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책의 지은이는 그 점에서 이정표를 세웠다. 쉽고 산뜻하여 잘 읽힌다. 자칫하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한다. 게다가 장황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 지은이는 특히 우리 글 우리 말을 되살려 쓰는 데 공을 그윽이 들였다. 외래어 오남용으로 우리 글 우리말이 누더기가 되어버린 우울한 시대를 이 책은 작고 맑은 소리로 일깨운다. 또한 일본에서 들어온 한자말을 우리말로 바꿔쓰자는 제안도 신선하다. 이를테면 ‘문학’ 대신 ‘말꽃’을 쓰자고 한다. “서양 사람들이 리터러처(literature)라고 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문학’이라 뒤쳐(번역)쓰고 있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서 쓰고 있습니다. 문학은 글월 ‘문(文)’ 자 뒤에 배울 학(學)’ 자를 붙인 말인데 예술을 뜻하는 말에 왜 배울 ‘학(學)’ 자를 붙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말꽃’은 새로 태
[우리문화신문=정석현 기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질병은 무엇일까? 질병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물이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질병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으리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물이요, 음식일진대 말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인 ‘삼킴곤란(연하장애)’이라는 병에 걸려 완치까지의 병상일지 《삼킴곤란(연하장애),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를 쓴 저자 김영조 씨는 이 책의 집필 동기를 “그동안 이와 관련한 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 책을 베끼거나 의학용어를 남발하는 수준이어서 실제 환자인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삼키지 못하는 절망'에서 ’삼키는 기쁨‘의 과정을 적은 이 경험담이 삼킴곤란 환우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뜻에서 이 책을 썼다.”라고 했다. 저자가 책에서 "주치의가 삼킴곤란의 예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를 추정컨대 환자에게 잘못 말했다가는 추궁을 당할 소지가 있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환자의 처지에서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절실했다. 그래서 저자는 병실에서 하루하루의 기록을 써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삼킴곤란(연하장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할머니 세대가 ‘가장 예뻤을 소녀시절’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었던 생생한 기록입니다. 열두 분의 할머니와 한 분의 할아버지 증언을 바탕으로 그 당시 청소년들이 경험했던 삶의 단면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 아카이브는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우리 민족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엮은이 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들의 생생한 구술 자료인《내가 가장 예뻤을 때》(도서출판 얼레빗)가 지난 6월 25일 출간되었다. “나는 1927년생 퇴끼띠고 98살이야. 퇴끼띠가 새벽에 났기 때문에 어디 가면 먹을 게 많이 생기는 거야.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농사지으셨어. 7살 먹어 어머니 재혼 가고, 12살 먹어 아버지 돌아가서 부모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일제시대에 지집아(기집애) 공출 보낼 적에 일본에 안 붙잡혀 가게 할라고 우리 고모, 고모부가 시집을 새벽에 보냈어. 너무 일찍 보냈다고. 공출 안 갈라고 내가 15살 10월에 시집을 왔다고. 형제는 나 하나, 외동딸이야.” -정선 출신 김옥련 할머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황과 이이.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은 조선 중기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조선의 사상사를 한 단계 발전시킨 거목들이다. 지금도 천 원권과 오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왠지 모를 친근함을 주지만,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견줘서 살펴본 일은 드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관직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경세가이기도 했지만, 조선 지성계를 주름잡는 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이황은 분주한 관료 생활보다 오늘날의 대학 총장과 흡사하게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더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다. 조남호가 쓴 이 책, 《이황 & 이이,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는 비슷한 듯 다른 두 사상가의 모습을 견줘 보여주는 책이다. 둘은 ‘리(理)’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사상적으로 대결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공부를 힘껏 돕기도 했다.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49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황의 사상적 스승은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인 주희였다. 주희를 평생 흠모했던 이황은 주희의 문집인 《주희대전》을 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얼굴 좋은 것이 (相好) 몸 좋은 것만 못하고 (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身好)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不如心好) 마음 좋은 사람, 호심인(好心人). 마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김구 선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할 때든, 그 일이 ‘곧고 옳은 일인지 잘 판단하고, 실천하며, 또 그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사람’. 말은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란 참 어렵다. 이 책, 현상선의 《나의 소원》은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펴낸 그림책이다. 김구가 평생토록 추구한 가치, ‘마음 좋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어릴 때의 일화를 풀어낸다. 메시지가 단순한 것 같아도 독자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야기는 ‘창암’이 겪은 일에서 시작한다. 창암은 김구의 어릴 적 이름이다. 창암의 집안은 상민이었다. 그가 살던 해주의 양반들은 뿌리 깊은 선민의식이 배어있어서인지, 상민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창암의 할아버지가 양반들이 쓰는 갓을 쓰자 옆 마을 양반들이 갓을 뺏어 찢어놓기도 했다. 신분의식이 비교적 희미해진 구한말이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