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재담소리를 복원하여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백영춘은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연으로 소리꾼이 되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장터에서 무나 배추 또는 파를 단으로 묶어 파는 일을 돕기도 했는데, 파 단을 셀 때 단순하게 수량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가락이나 장단을 넣어 구수하고 음악적이어서 주변에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여서 시장 내에서 밖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한국 장단(長短)은 3분식 구조인데, 장-단의 단조로운 구조보다는 중간에 단 장-으로 변화를 주어야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 백영춘은 작업장에 갈 때면 늘 라디오를 지니고 다니면서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겻들였다. 그가 좋아했던 명창 중에서 장학선(1905~1970)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 다나베가 쓴대동강주유기(大同江舟遊記)에 나오는데, 대동강에서 4인의 기생과 뱃놀이를 할 때, 제일 소리가 뛰어나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15세의 장학선(張鶴仙)이었다는 이야기, 그녀는 10세 때 평양 관우물 소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3월 29일 저녁 정효재단 설립기념으로 백영춘, 최영숙 등이 무대에 올린 개막 공연 이야기를 하였다. 주로 서울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창과 장대장타령이라는 재담소리를 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 스승 이창배 명인의 활동이나 공적으로는 노랫말 속에 나오는 어려운 고사(古事)나, 한문구(漢文句)의 해설, 부정확한 발음이나, 왜곡된 표현, 저속한 내용은 수정하였으며 그래서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전통민요의 교재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날 개막공연은 박춘재의 재담소리와 이창배의 경서도소리가 중심이었지만, 앞으로 이어지는 4개월간의 공연에는 회심곡 탑돌이 등의 불가(佛歌), 무가(巫歌), 신민요 등, 경서도창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노래를 포함하며 공연과 함께 명창으로부터 소리도 배우고, 대화도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창배 사범과 함께 경서도창 전승에 공이 있는 정득만 명창 과천패 소완준의 제자로 산타령을 이어오는 한편, 시조와 가사, 긴잡가도 잘 불렀으며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귀에 익힌 재담소리를 백영춘에게 일러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현재의 경서도 명창 중에서 이창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의 맥(脈)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서 국악인들이 공연 무대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 대관 비용이 만만치 않아 공연이 활발치 못하다는 점, 소극장의 활용이 점차 많아지는 추세에, 때마침 서초동에 문화재단이 설립되어 그 기획공연으로 소리의 맥(脈)을 올린다는 점, 이는 1910년대 박춘대의 재담(才談)소리와 1950년대 이후 이창배(李昌培) 명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경서도 소리를 더 올곧게 지켜가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재담소리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익살과 해학으로 상황에 맞도록 진행해 나가면서 소리와 춤, 연기로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민속극의 한 장르라는 점과 주권을 잃고 실의에 차 있던 일제강점기 박춘재의 재담은 큰 위로가 되었다는 점도 말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60년대 이후에는 이를 계승 하려는 전승자가 없어 단절위기를 맞았다는데 다행히 백영춘이 토막소리 위에 당시의 음반자료나 녹음자료, 또는 원로들의 구술자료와 문헌자료 등을 활용하여 완전하게 재현했다는 점, 그래서 우리는 재담소리가 어떤 소리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번 공연에도 장대장타령을 비롯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정효국악문화재단 기획공연 백영춘-최영숙의 소리의 맥(脈)Ⅱ 지난주에는 정효재단 설립기념으로 기획된 백영춘과 최영숙이 준비해 온 공연- 박춘재, 이창배 제, 소리의 맥(脈)을 찾아서와 관련된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 공연은 2016년 3월29(화)부터 7월12일까지 4개월에 걸쳐 진행된다는 점, 경기, 서도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재담소리의 저변확대를 위한 특별 기획된 시리즈로 마련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연은 물론이고, 명창이 지도하는 경서도창의 실습 참여와 대화의 시간도 갖게 된다는 점을 얘기했다. 특히 3월 29(화), 오후 7시에 예정되어 있는 개막 공연은 아리랑과 재담소리로 준비하였다는 점, 낯선 이름 정효국악문화재단은 국공립 재단이 아니라 사설의 문화재단으로, 이는 평소 국악을 애호해 오던 어느 독지가가 국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서초동에 3층 건물을 마련하고 1층은 공연장, 2층은 국악박물관, 3층은 경서도창악회와 재담소리보존회원들이 모여 자유롭게 연습과 공연이 용이하도록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라는 점, 국악인들이 발표무대를 갖고 싶어도, 극장대여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는 예가 허다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함제홍-함재운-함화진으로 이어진 아악가문의 이야기를 하였다. 제3대 명완벽에 이어 4대에는 김영제, 그리고 5대는 함화진이 아악사장에 올랐는데, 이들은 악기나 악보, 악사의 확충 등, 아악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공헌하였다는 이야기, 김영제 아악사장은 관악보 정리와 악기 보수, 함화진은 아악보급에 용력하여 당시 이화 여전에 국악강좌를 처음 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악연주회를 통해 아악에 대한 인식제고에 노력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함화진은 2대 아악사장을 지낸 함재운의 아들이며 단소 잘 불기로 유명했던 함제홍(별칭이 함소)의 손자로 그의 집안은 함제홍-함재운-함화진으로 이어진 아악의 명가라는 이야기, 함화진은 악리(樂理)에 밝아서 아악생 양성에 필요한 《아악개요》를 비롯하여 《악기편》, 《이조악제원론》, 《증보가곡원류》, 《조선음악통론》, 《조선음악소사》 등을 지었고, 해방 이후에는 대한국악원을 창설하여 국악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이야기도 했다. 또 형식을 중요시하고, 느린 템포, 표현을 절제하는 대궐의 아악이 일반인들에겐 호응을 받기 어려웠지만, 아악부의 책임자들이나 악사들은 앞으로 아악부가 헤쳐나가야 할 각종 난관에 봉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8.15광복이 궁중음악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광복 전에는 이왕가의 보호를 받던 아악부마저도 신분 보장이 되지 않아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나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조선총독부 내에 어용단체였던 조선음악부는 징용이나 노무 동원이 면제되는 대신, 농어촌이나 광산, 전방을 쫓아다니며 위문공연을 해야 되었다는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음악관장기관의 명칭이 장악원(掌樂院)이었으나 일제하에서는 이왕가의 아악부로 격하되었고, 아악부의 최고 책임자를 국악사장이라 부르면서 국악이란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190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770여명의 악인이 있었으나 해마다 감축이 되어 아악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끝내는 아악부의 폐지가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이야기,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조선악개요》를 써서 일본 악부(樂府)에 전했는데, 이를 확인한 일본 음악인 상진행이나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 히사오) 등은 이왕가의 아악이야말로 예술성이 높은 음악임으로 아시아의 자랑, 세계의 자랑거리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일본정부에 건의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악사 충원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8.15광복 직전의 국악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모든 분야가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조선음악협회도 그랬다는 점, 그래서 쟁쟁한 명인명창들이 개인적이고 창의적인 예술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점, 광복이 되자 조선음악단이나 조선가무단 등은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었고, 종전의 이왕직아악부는 구황국아악부로 별도의 독립을 하였음을 얘기했다. 또 재야 국악인들은 1945년, 10월에 국악원을 만들었으며 48년에는 대한국악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함화진을 대표로 부원장은 박헌봉, 그리고 유기룡, 이병성, 김천흥, 최경식, 임서방, 김아부, 남경흥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는 점도 아울러 얘기했다. 가무연구회는 해방 이후 회원 수가 많아졌는데, 그 까닭은 흩어져 활동하던 소리꾼들이 몰려들었고, 가정으로 돌아갔던 여류 국악인들이 다시 합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라는 점, 여기서 벽파는 각종 사업진행이나 민요가사 수정, 신(新)가사의 작사, 그리고 왜곡된 가사를 바로잡는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 해방이 되면서 애호가들이 대한국악원으로 배우러 나왔다는 얘기도 했다. 특히 대학생들의 참여가 고무적이었다는 점, 또한 권번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벽파 이창배의 《가요집성》은 경서도 소리꾼들에게는 교과서가 되었기에 지역마다, 혹은 명창마다 조금씩 다르게 불러온 고어(古語), 또는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사설들은 고쳐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난주에는 가무연구회의 활동, 조선 총독부내에 《조선음악협회》이야기를 하였다. 협회 내에는 일본음악의 방(邦)악부, 서양음악의 양(洋)악부, 그리고 조선악부가 있었는데, 이 조선악부는 음악단과 가무단이 존재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광복을 앞둔 1940년대 전후는 태평양 전쟁이 긴박해지고 있던 시기여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음악단이나 가무단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실기와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기예증을 받을 수 있었고, 기예증이 있어야 위문공연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위문단은 가는 곳마다 그 인기가 대단해서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이 큰 소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당시《조선악부》책임자로는 함화진, 조선음악단 단장에는 박헌봉, 조선가무단 단장에는 최경식이었고 여기에 소속된 연주진용은 심상건, 이충선, 김계선, 김봉업, 임유앵, 박초월, 장채선, 이창순, 경부용, 산타령의 엄태영, 최정식,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일제강점기 말 가무연구회의 자체발표회나 흥행 공연에서 산타령을 불렀던 이창배와 정득만(鄭得晩)을 소개하였다. 정득만은 선소리 산타령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최초의 예능 보유자 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벽파 이창배와 함께 80년대 초반까지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애쓴 명창이라는 이야기, 20세 이후, 문세근과 최경식에게 배웠으며 맑고 높은 목소리를 지니고 있고, 특히 사설지름시조를 비롯해 12잡가 중 유산가, 소춘향가, 제비가와 노랫가락, 건드렁타령,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잘 불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창법 중, 조르는 목은 누가 흉내를 내지 못했으며 강약이 분명해서 맛깔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이야기, 아끼는 제자가 공부를 소홀히 한다면 찾아가 지도해 줄 정도로 경기소리의 내일을 걱정했던 명창이었다는 이야기, 정득만이 부르던 산타령은 과천패의 모갑이 소완준이 전해준 산타령이며 합창으로 부르는 경우, 가사나 가락, 장단, 시김새가 서로 다르게 전해오고 있는데, 이를 인지한 벽파 이창배는 사설만이라도 통일시키기 위해 《가요집성》을 저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벽파 이창배가 지은 《가요집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변방잔존(邊方殘存)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의 뜻은 대도시나 중심지는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옛 문화를 접해보려면 변두리 지역이나 또는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외국이어야 더욱 확실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태리의 스파게티를 먹으려면 미국 뉴욕의 리틀 이태리에 가던가, 한국의 옛 음식을 먹으려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야 된다는 의미가 된다. 1935년에 제작한 《조선어독본》이라는 고음반 6매는 지난 2004년에 CD음반으로 다시 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당시 사범부속초등학교 학생들이 책 읽는 방법을 실제 녹음한 것이라는 이야기, 지금이라도 책 읽는 방법을 전국 지역으로 확산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북한이나, 연변지역, 또는 세계에 나가있는 교포들까지도 확산해야 송서율창의 확산 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훈민정음 스물여덟글자 중 지금은 스물네 글자만 쓰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표현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 사람의 소리는 영혼의 소리여서 축문이나 종교의 의식에서 소리 내며 읊는 전통이 이어진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 외의 송서 율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