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4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 참사가 발생해 어린이 20명을 포함한 26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 얼마 안 돼 어제 또다시 10대 청소년 2명이 길 가던 여성에게 돈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13개월 된 아기 머리를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는 외신을 접했다. 살해된 아기 어머니의 겁에 질린 모습이 티브이 화면 가득 비추고 지나갔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는 듯 경찰들이 폴리스라인 언저리를 서성거리는 것을 보면서 16세기 일본사회에서 엄포를 놓아 무기 회수를 꾀했던 풍신수길의 ‘무기회수령’이 떠올랐다. 풍신수길은 주군인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가신 아케츠미츠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살해당하자 기회를 꿰차 천하를 거머쥐었지만 혹시 모를 백성들의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길까봐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정권을 잡은 지 오래지 않아 무기회수령(刀狩令, 1588.7.8)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무기 회수령은 다음 3가지 항목을 들어 선포하였다. 1. 백성은 칼(刀, 脇差), 활(弓), 창(槍), 총(砲) 등의 무기 소지를 금한다. 불필요한
“욕심 때문에 가문과 형제를 버리는 일은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로 시작되는 사이카쿠 쇼코쿠바나시(西鶴諸國ばなし, 권2-7화)의 이야기는 320여 년 전 일본의 이야기지만 21세기인 오늘 한국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시나노 지방에 사는 여든여덟 살 되는 노인이 아들 둘을 불러다 앉히고 유언하기를 집안의 재산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골고루 사이좋게 나눠가지되(작은 왕겨라도 나누라) 특히 집안의 보물인 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팔아치우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첫이레가 되기 전에 재산 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 에도시대(1603-1868)의 유산상속은 대개 유언에 따랐으나 상황에 따라 달랐다. 이 두 아들은 아버지 유언대로 똑같이 재산을 나눴지만 아버지가 아끼던 소중한 칼 한 자루에 이르러 다툼이 일었다. 칼을 두 쪽으로 나눌 수 없기에 둘 중에 하나가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집안 문중 사람들이 중재하기를 나머지 재산은 똑 같이 나눴으니 칼은 형인 장남이 갖는 게 좋겠다고 했으며 형 역시 칼이 몹시 갖고 싶었다. 그러나 동생이 승복을 안 하는 바람에 형은 칼 한 자
경주라고 하면 불국사를 떠올리듯 우지차 (宇治茶)로 유명한 우지시(宇治市)의 명소를 꼽으라면 단연 평등원(平等院, 뵤도인)을 들 수 있다. 평등원은 부처님을 모시는 절인데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봉황당(鳳凰堂) 건물은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교토의 문화재 (古都京都の文化財)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양식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다. 봉황당 앞에 파 놓은 아담한 연못이 마치 거울같이 투명하여 물 위에 비친 봉황당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봉황당 주변의 정원 역시 잘 꾸며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봉황당은 원래부터 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권력자인 후지와라 (藤原道長)씨의 별장이었던 것을 1052년에 절로 쓰면서 평등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평등원이 지어질 무렵의 일본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 말기로 정국은 혼란하였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말법사상이 자리하여 극락왕생과 정토신앙이 확산되던 때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법(正法)이 행해지는 시대를 지나 껍데기로만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깨달음이 없는 시대인 상법(像法) 시대를
1392년 조선개국과 함께 창건된 경복궁은 이후 경회루, 자선당, 흠경각 등의 크고 작은 전각을 추가로 지어 명실상부한 궁궐의 면모를 보였으나 1900년대의 민족 수난기를 맞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흉물스럽게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광복이후 여러 논란 끝에 1997년 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2000년부터는 경복궁 복원 사업이 이뤄져 2006년 건청궁의 복원 등 본래 모습을 하나둘씩 찾아가는 모습이 다행스럽다. 일본에서 지인들이 오면 반드시 들르는 이곳에 서면 경복궁의 쓰라린 역사를 새기지 않을 수 없다. 1915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1910년 8월 29일)된 지 5년째 되는 해로 일제는 이 “조선통치 5년”을 기념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골똘한 궁리에 들어간다. 궁리 끝에 1913년 “통치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1913년 제국회의에서 예산을 책정하여 장소를 경복궁으로 정하는 총독부 고시령을 1913년 8월 6일 내린다. 조선물산공진회란 한마디로 박람회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을 박람회장으로 꾸며 더 이상 궁궐에 대한 미련을 두지 못하도록 철저한 계산 하에 궁궐 파괴에 몰입한 것
일본에는 많은 약탈 조선문화재가 소장 되어있으며 일본은 조선 약탈문화재의 박물관이다 이 말은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만든 식민지 하에서의 조선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 공개라는 책의 머리말에 있는 말이다. 도쿄의 한인타운 중심가인 신오쿠보에 세워진 순수 일본인들이 만든 고려박물관 입구 커다란 액자 속에 걸린 설립취지문 또한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의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일본과 코리아(한국 조선)의 역사,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며, 풍신수길의 두 번에 걸친 침략과 근대 식민지 지배의 과오를 반성하며, 재일 코리안의 생활과 권리 확립에 노력하며, 재일 코리안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전하기 위해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한국의 2호선처럼 도쿄 순환선이라고 해도 좋을 야마노테선(山水線)을 타고 신오쿠보역에 내려 쇼쿠안도오리(거리)라고 불리는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광장이라는 한국 슈퍼가 눈에 띈다. 바로 이 부근이 한인타운인데 길거리에는 한글 간판이 즐비하고 지나다니면서 부딪히는 사람들도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다. 고추장, 된장, 새우젓은 물론이요, 각종 라면, 김, 밑반찬에서부터 곰탕, 사골국, 삼계탕 등 봉지만 따서 데우면 즉석요리로서 먹을 수 있는 온갖 물
일본의 3월 3일은 히나마츠리(雛祭り)라고 해서 여자 아이를 둔 집안의 잔칫날이다. 이날 여자 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히나인형을 장식하는 데 이 히나인형은 장차 아이에게 닥칠지 모르는 사고나 질병 또는 나쁜 액을 물리치는 뜻에서 장식하는 것이다. 보통 히나인형의 장식 시기는 입춘 무렵부터이며 늦어도 2월 24일까지는 장식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미난 것은 3월 3일이 지나면 집안에 장식해 두었던 히나인형을 재빠르게 치워야하는데 적어도 3월 중순 까지는 치워야한다. 꾸물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지면 장차 딸아이의 혼사가 늦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일본에 있을 때 필자는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에 있는 친구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그 집 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마침 히나인형을 장식한다고 해서 함께 거들었다. 사이타마의 주택들은 도쿄 보다는 공간이 제법 넓어 거실에 3단 정도의 히나인형을 장식해놓을 수 있었는데 이에 견주어 도쿄의 경우는 방도 좁고 거실도 좁아 3단 짜리 히나인형을 놓을 공간은 없다. 친구 딸과 나는 커다란 히나인형 상자에서 인형을 꺼내 붉은 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인형들을 장식해 나갔다. 가장 윗줄에는 왕과 왕비를 상
“러일전쟁은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전쟁이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는 러시아도 중국도 아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우리 중·고교 교과서는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다.” 이는 “다시 보는 러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이경재 씨가 2012년 8월 27일 전북일보에 쓴 글이다. 엊그제 2월 10일은 한국 고유의 명절이었으나 이날은 109년 전 러일전쟁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고유의 명절이 지난지도 얼마 안 되는데 하필이면 러일전쟁 이야기를 들쑤셔 내느냐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오늘은 이 러일전쟁 때 생긴 약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금도 하나의 고유명사로 쓰일 정도로 입지를 굳힌 배탈설사, 위장약이 있는데 “정로환(征露丸, 세로칸)”이 그 약이다. 설사 멈춤 약으로도 알려진 정로환은 일제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때인 1905년 일본에서 러시아로 파병하는 병사의 설사병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 만주에 파병된 일본병사들은 원인모를 병에 걸려 하나둘 죽어 나갔는데 이를 보다 못한 일본정부는 그 원인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 결과 만주의 나쁜 수질 곧 물갈이로 인해 설사병이 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도쿄에는 오래된 서점가가 있는데 간다진보쵸(神田保町町)에 있는 고서점가가 그곳이다. 도쿄에 있을 때 필자는 시간만 나면 이 거리에서 하루 종일 책 구경을 하며 지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싼 책은 10엔짜리부터 좀 비싸다고 해도 1천 엔 정도면 사고 싶었던 책을 손에 쥘 수 있어 부담이 적은 곳이다. 책이란 비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을 만났을 때 기쁜 것이기에 필자는 쓸쓸할 때나 우울할 때, 기쁠 때나 심심할 때 등 틈 만 나면 이곳 서점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좋은 책을 발견하고는 밤새도록 독서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우리나라에도 청계천일대에 헌책방가가 있긴 하나 일본 간다의 고서적 거리와는 좀 다르다. 그것은 “헌책방”과 “고서적”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이미지만큼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물론 간다의 고서점가에도 싼 책들이 즐비하지만 가게에 따라서는 3~400년 된 고서들도 많은데 그 값이란 몇 십만 엔에서부터 몇 백만 엔씩 하는 것도 있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때도 많다. 일본의 유명한 고서적 거리인 ‘간다지역’은 명치10년(1880) 때부터 이 지역 일대에 들어선 명치대학, 중앙대학,
- 이하라사이카쿠의 ‘한국판 장화홍련전’과 비슷한 이야기 - “예전에 히다(지금의 기후현 북부)지방에 한 무사관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관리가 산길을 가다가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이르렀는데 한 선인(仙人)이 길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쫓아가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그래도 자신이 무사인데 그냥 돌아가기는 뭐하고 해서 선인이 간 발자국을 따라 가다보니 큰 바위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무사관리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깜깜한 동굴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안쪽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약간 밝은 빛이 보여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맑은 물속에 빨간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지 않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안쪽으로 4~500미터쯤 더 깊숙이 더 들어 가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황금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금은보화와 백옥으로 장식된 건물이 즐비했다. 자신이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는 분명히 한겨울이었는데 그곳은 사방에 꽃이 만발하고 종달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이 휘황찬란한 마을을 구경하다 무사관리는 그만 졸음이 몰려와서 한쪽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그 순간 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일본말에 “닛코를 보지 않고는 (일본을) 봤다고 하지마라 (日光を見ずして結構と言うこと莫れ)”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닛코(日光)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관광지이다. 도쿄에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닛코는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3대 장군인 덕천가광(德川家光) 묘는 서기 2000년도에 350년 만에 일반에게 공개했는데 그때 마침 필자는 와세다대학에 있을 때여서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덕천가강의 사당인 도쇼궁(東照宮)은 지은 지 400년이 되었지만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도쇼궁의 정문인 양명문(陽明門)은 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일본 국보이다. 또한 도쇼궁 전체(社殿群)는 199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도쇼궁에는 신큐사라는 신위를 보관하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 유명한 3마리 원숭이 조각상이 있다. 지붕 처마 부분에 3마리의 원숭이 상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은 모습인데 서양에도 "Three wise monkeys"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유명하다. 봐도 보지 않은 듯, 들어도 듣지 않은 듯,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것은 전통시대 한국의 여성에게도 해당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