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주에는 춘향가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소부 허유의 이야기와 동원도리편시춘 이야기를 하였다.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임금이 허유에게 임금자리를 맡기겠다고 하자 귀가 더러워 졌다고 하며 맑은 강가로 나가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 이 광경을 목격한 소부 선비는 한술 더 떠서 그 더러운 물을 자기 소에게도 먹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동원도리편시춘이라는 시구(詩句)는 당나라 왕발의 시「임고대」에 나오는 한 구절로 봄 한때 동산에 핀 복숭아꽃과 오얏꽃을 뜻하는 말로 젊음도 잠깐이고, 따라서 인생도 무상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짧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초가삼간에 누워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을 행복으로 알던 옛 선비들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와 부를 쟁취하려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판소리 춘향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판소리를 들을 때, 어려운 고사성어(故事成語)들은 일일이 뜻풀이가 없어 그냥 넘기기도 하고, 또한 발음이 불분명하거나 이를 빠르게 부르면 그 의미를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춘향가의 시작은 창이 아닌 아니리, 즉 설명조의 말로 시작하되 그 내용은 남원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내용과 이도령이 방자에게 놀만한 곳을 안내하라고 조르는 대화로 시작된다. 이어서 중중몰이 장단에 맞추어 창이 시작되는데 그 사설은 유명한 문장가들이 놀았다는 내용만 뽑아 부른다. “기산 영수 별건곤, 소부, 허 유 놀고, 채석강 명월야의 이 적선도 놀고, 적벽강 추야월의 소동파도 놀아 있고, 시상리에 오류촌 도연명도 놀고, 상산으 바돌 뒤던 사호 선생도 놀았으니, 내 또한 호협사라, 동원도리편시춘, 아니 놀고 무엇 헐거나. 잔말 말고 일러라.” 흥겨운 중중모리 장단에 맞추어‘기산 영수 별건곤’이 시작되고 그 곳에서 소부, 허유가 놀았다는 말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어떤 선비들이기에 판소리뿐 아니라 경기 잡가나 민요의 노랫말 여기저기 나오고 있는 것일까? 이적선, 소동파, 도연명, 사호선생 등도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점을 알고 노래를 들어야 재미있다. 뿐만 아니라 “동원도리편시춘”이라는 말도 노래마다 등장하는 구절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뜻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 귀가 더러워졌다고 씻으러 간 허유와 그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는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판소리의 뜻으로 판놀음에서 하는 소리가 곧 판소리라 하였다. 소리란 곧 노래의 또 다른 명칭이다. 과거에는 잡가(雜歌), 극가(劇歌), 창가(唱歌), 본사가(本事歌), 창극조(唱劇調) 따위의 한자말도 썼으나, 요즈음에는 판소리로 굳어졌다. 판소리 하는 사람들도 창우, 가객, 광대라고 했으나 창자, 또는 소리꾼 등으로 쓰고 있다. 북치는 사람은 고수(鼓手)이다. 그러나 추임새를 잘 구사해야 명고수의 대접을 받는다. 판소리에서 말로 하는 것은 아니리, 몸짓은 발림이다. 발림도너름새또는사체라고 했는데 이는 머리, 몸통, 팔, 다리를 가리키는 말로 곧 몸 전체를 적절히 활용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소리꾼이 손에 부채를 들고 서서 슬픈 가락으로 구경꾼을 울리기도 하고 재미있는 아니리로 웃기기도 하며 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소리가 무르익으면 구경꾼들의 다양한 추임새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소리판이 저녁부터 시작되면 밤이 새도록 넋을 잃고 소리를 들었고, 겨울철에 눈이 내려도 밤새도록 자리를 뜰 줄 몰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전해오고 있다. ▲ 고수의 장단에 맞춰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르는 김수연 명창 그렇다면 어떤 명창은 6시간,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이제까지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과정, 음악적 특징, 전승계보 등을 이야기 하였다. 특히 지난호에서는 성우향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김수연 명창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는데, 어린 시절 집 근처에 국악원이 있어 그 소리들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어린 시절의 음악환경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1960년대 후반, 서울의 박초월 문하에 입문하여 박 명창의 소리 전통을 올바로 계승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1978년 남원춘향제 이후 전주대사습 등 전국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완창무대를 수시로 열어온 부지런한 명창이란 이야기, 박초월 작고 후에는 성우향 명창에게 보성소리를 익혀 두 소리제를 적절하게 흡수, 자신의 스타일로 다시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 소리뿐이 아니라 교양과 인품을 지닌 소리꾼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호부터는 김세종제 춘향가 중 소위 눈대목이라고 하는 잘 짜인 소리들을 중심으로 실제로 판소리를 감상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볼까 한다. 사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지명 등의 풀이는 1982년 한국브리태니커 회사에서 발행한 ≪뿌리깊은나무 판소리≫에 나오는 해설을 참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김세종제의 춘향가는 김찬업을 통해 정재근으로 이어지고 정응민에게 전해져서는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 이 시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어지는 전승계보를 자랑한다. 특히 판소리 심청가는 조상현과 성창순이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일찌감치 인정을 받았으나 김세종제 춘향가의 경우에는 다소 뒤늦게 성우향이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전승을 담당하고 있다. 성우향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명창으로 김수연, 안애란, 염금향 등이 있고 그리고 정회석과 염경애, 박복희, 강경아 등이 그 뒤를 이어 전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번 주 국악속풀이에서는 김수연 명창만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수연(1947~) 전북 군산생이다. 군산은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개발된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소녀 시절 김수연의 집 근처에는 국악원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대금이며 아쟁의 소리도 들려오고, 판소리나 민요창도 흘러나와 김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고 그 소리를 들었단다. ▲ 혼신을 다해 판소리 ,춘향가를 부르는 김수연 명창 한번 듣게 되면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총명한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성우향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가 6살이 되었을 무렵 가곡이며 평시조를 배웠는데, 판소리나 일반 민요를 배우려는 초보자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기교가 아니라, 힘찬 발성, 긴 호흡법, 다이나믹, 역동성 등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성우향은 18세가 되던 1953년부터 4년간 보성의 정응민에게서 김세종제 춘향가와 강산제 심청가 전 바탕을 배웠고 30이 넘어 다시 보성에 들어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다시 닦았다고 했다. 그는 소리하는 태도가 곱고, 발림 구사며, 판을 휘어잡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온 명창으로 성창순이 있다. 성창순은 1934년에 예향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성원목 역시 판소리의 명창이요, 고법으로 일가를 이룬 당세의 명인으로 어려서부터 임방울과 동문수학하였으며 한승호, 송순섭 등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렇듯 당대 판소리의 명창이자 명고수였던 아버지의 유전자는 성창순에게 그대로 이어져 소녀 성창순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판소리를 따라 부르게 되었고 북장단도 제법 멋지게 흉내를 내게 된다.
[그린경제=서한범 국악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 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일곱 해 동안 춘향가를 비롯하여 심청가와 수궁가를 배웠고 임방울 명창으로부터도목이 좋은 놈 처음이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이야기, 김명환에게 북을 배우면서 소리 사설을 잊어버려 선생으로부터 혼이 난 이야기, 천자뒤풀이대목을 무려 1500번이나 불렀다는 이야기, 그는 맑고 힘찬 목을 타고 난 위에 공력이 녹아있어 한번 듣게 되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하여 다시 듣고 싶은 소리로 꼽힌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정응민의 제자로 성우향이 있다. 그는 193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고 그가 6살이 되었을 무렵에 큰아버지인 성차옥은 그에게 가곡이며 평시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물론, 젊은 국악인들도 판소리와 가곡, 판소리와 시조는 전혀 다른 장르의 노래인데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판소리와 가곡, 판소리와 시조창은 목 쓰는 법이나 표현방법에 있어 전혀 다른 장르의 성악이다. 그럼에도 장차 판소리 명창을 꿈꾸고 있는 어린 소리꾼에게 먼저 가곡이나 시조를 지도했다는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열두어 살 무렵 마을에서 단가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운 뒤 정응민 선생 댁을 찾아가 집안일을 도우며 일곱 해 동안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 세 바탕소리를 익혔다. 소년명창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임방울 명창으로부터도목이 좋은 놈 처음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다가 김명환으로부터 북을 배우면서 소리와 어울리는 북이 재미있어 정작 주전공 분야인 소리의 사설을 잊어버리기도 하여 선생으로부터 혼이 난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었다.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어린 소년은 그 이튿날, 하직 인사도 못 드린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얼마 동안은 모진 맘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특히 선생 앞에서 막히기 일쑤였던 천자뒤풀이 대목은 무려 1,500번이나 불렀다하니 그의 집념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조상현 명창이 소리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밤이나 낮이나 선생이 계신 회천면 쪽을 향했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선생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고 한다. 3개월이 지나면서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그의 아들 정권진을 소개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를 듣고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소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 50년대 후반에는 군산, 대구, 대전 등지의 국악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국립창극단과 교육현장에서 공연과 후진양성을 병행하였다는 이야기, 그만의 특이한 훈련방법으로 정응민의 판소리 바디를 충실하게 이어받은 명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호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 전승의 특징을 가장 명쾌하게 전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유영대교수의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자들이란 글을 보면 조상현에 관한 재미있는 글들이 있다. 이을 참고해 보면 조상현의 선친은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서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 소리를 하는 조상현 명창 열두어 살 무렵 마을에서 소리하는 분에게 단가 몇 마디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싹수가 있다고 칭찬이 자자해 지자, 그는 열세 살 되던 해 회천면의 정응민 선생 댁을 찾아간다. 선생 집에 들어가 집안일을 도우며 그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1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이 박유전의 강산제 심청가와 수궁가 등도 익혔다는 이야기, 제자들이 말하는 정응민은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는 스승이었으며, 제자를 심하게 다그치거나 야단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보성소리의 이론적 기반은 정심(正心), 정음(正音), 사채라는 이야기, 재미위주의 소리나 너름새를 원한다고 해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성소리를 진중한 무게, 남다른 품격이 느껴지는 소리라고 입을 모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정응민은 그의 아들 정권진이 판소리를 시작하려 하자 노력 끝에 명창이 된다 하여도 대우도 못 받고 고되니 그 공을 학문하는데 쓰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자에게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판소리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전통음악분야에서도 자녀에게 세습을 원치 않은 부모의 만류 이야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소리가 좋아서, 악기를 만지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춤을 배우기 원하는 자녀들을 집안에 감금시켜 놓고 바깥나들이를 금지시킨 부모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경험담이다. 그래서 부모 몰래 집을 뛰쳐나가 갖은 고생을 이겨가며 소리를 배우고 재주를 익혀 왔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