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속풀이가 100회를 맞았다. 그동안 이 난에 국악 관련 내용들을 조금씩 소개해 드렸는데, 속풀이는커녕, 겉풀이도 제대로 되었는지 의문이다. 가곡과 시조, 가사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정악과 민속악은 자전거의 앞뒤바퀴와 같은 관계라는 이야기, 농악은 한국인 신명의 뿌리라는 이야기, 한국의 무형문화재 정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또 국악과 서양음악은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벽파 이창배와 경서도 민요, 관악기의 피리, 대금, 단소 이야기와 현악기 거문고 관련 이야기 등을 이 난에 소개하였다. 그 동안 재미없는 내용들을 열심히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간혹 질의나 이견에 일일이 답장을 못해 드린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 국악속풀이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시작한 글은 추임새에 인색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100회의 제목은 추임새에 인색하지 않은 세상으로 정해 보았다. 평소에도 필자는 남을 칭찬하자는 말을 자주 하는 편으로 주위 사람들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특히 무대 위에 올라있는 사람들에게 추임새가 얼마나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
속풀이 97에서는 사육신과 거문고 관련 이야기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끝끝내 반대하다가 육시를 당한 사육신과 거문고에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 성삼문과 박팽년의 집에는 손수 심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서로 바라다 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두 대감의 집안이 전복되고 육시(戮屍)될 때, 처참한 광경을 처음부터 오로지 보아왔다. 시간이 흘러 단종의 복위와 함께 사육신들도 그 결백함이 밝혀졌으나 두 대감집의 소나무도 수명을 다 하였다. 선군께서 이 두 소나무 목재를 얻어 합하여 거문고를 만드시고, 쌍절금(雙節琴)이라 이름 짓고 연주해보니 뛰어난 소리를 냈다. 유심히 들어보니 맑고도 굳센 음색은 곧은 두 대감의 성품이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충신의 집을 지키던 소나무도 주인의 성품이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그 재료로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일반 거문고와는 달리 음색이 강렬하고 굳세다는 이야기이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거문고만큼 상류 사회, 지식인 계층의 애호를 받은 악기도 드물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대부분의 고악서(古樂書)나 옛 악보들이 모두 거문고 악보임을 보아도 쉽게 짐작 할 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로부터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이 없어 홀로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독학하여 스스로 곡을 짓고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와 옥보고 작품들은 곡명이 전해 오는데, 그 악곡명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또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전해 주었는데, 귀금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임금은 윤흥(允興)이라는 고급관리를 남원 공사로 보내서 거문고 음악의 보존, 계승에 전념할 것을 명하였다는 이야기, 윤흥은 자신의 무례를 알아채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예를 갖추어 선생의 음악을 간청한 연후에 표풍(飄風)등 3곡을 전해 받았다는 이야기 등 이었다. 거문고는 6줄로 구성된 악기여서 각 줄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음색의 어울림이 일품이다. 특히 억양을 살린 음색은 더더욱 멋이 있다. 제1현은 문현이라 부르고 마지막 제6현은 무현이라 부른다. 문, 무현 안에 가장 많이 쓰이는 제2현인 유현과 가장 굵은 줄의 제3현 대현이 있다. 특히 제3현의 굵고 낮은 대현의 울림은 거문고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는 줄이다. 유현은 대현보다 완전4도 높게 조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거문고가 고구려시대 처음 전해졌고 왕산악이 대폭 고쳐 만들어 타매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해서 이름을 검은학금으로 지었다가 후에 학자를 빼고 거문고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신라 자비왕 때에 백결선생이 지었다고 하는 대악은 세모에 걱정하는 아내를 위하여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가야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까닭은 자비왕이 5세기 말엽의 임금이기에 이 시기는 아직 신라에 거문고가 퍼지기 전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거문고가 신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약 200여년이 지난 9세기 말로 보는 것이 각종 자료에 의한 결론이다. 통일신라 이후의 기록에는 신라의 3죽으로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거문고는 고구려-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귀중한 악기로 자리 잡아 온 대표적인 현악기인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왕산악이라는 악사가 있어 악기를 고쳐 만들고 곡을 짓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 고구려의 거문고 명인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의 음악조에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거문고를 백악지장(百樂之長)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나 선비, 사대부들은 거문고를 특히 애호하여 모든 악기의 으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처럼 금을 좋아 하게 된 배경은 황폐화 되어가는 몸과 마음을 닦아 천리(天理)진정(眞情), 즉 하늘의 이치에 따르고 참된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다. 선비들에게 있어 거문고는 수양의 악기로 통한다. 글공부하는 선비나 사대부의 사랑채에는 금을 걸어놓고 책을 읽다가 분심이 생기면 자연스레 거문고를 비껴 타는 것이다. 그래서 선비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말로 좌서우금(左書右琴), 즉 왼손에 책, 오른손에는 금을 든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거문고는 언제부터 연주되어 온 악기일까? 고구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처음 중국 진나라로부터 고구려에 금이 전해 졌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이것이 악기인줄은 알았으나 어떻게 타는 것인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라사람들에게 이 악기를 타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고 방을 붙여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왕산악이란 재상이 거문고를 대폭 고쳐 만들고 스스로 곡을 지어 탔다고 한다. 거문고의
지난주까지 태평소와 단소, 퉁소, 훈과 지 등의 관악기들을 대략적으로 소개해 보았다.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또한 낯선 용어들이 등장함으로 친숙하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한국의 전통악기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현악기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현악기란 줄을 진동시켜 고저와 가락을 만들어 가는 악기들을 말하는데, 한국의 줄악기들은 대부분 명주실을 꼬아 만든 악기들이다. 현재까지 널리 활용되고 있는 한국의 현악기 종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어서 거문고, 가야금, 해금, 아쟁, 양금, 금, 슬, 향비파, 당비파, 월금, 공후 등이 있으나 이 중 현재까지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악기들은 거문고, 가야금, 해금, 아쟁, 양금 등이고 기타의 악기들은 재현을 위한 연구 중에 있다. 한국 전통의 현악기들은 그 소리내는 방법이 크게 4종류로 압축된다. 첫째는 거문고처럼 술대라는 도구로 줄을 내리치거나 올려침으로 해서 소리를 내는 방법이 있고, 둘째로는 가야금, 또는 금, 슬의 경우처럼 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겨서 내는 방법, 셋째는 해금이나 아쟁의 경우처럼 활로 줄을
지난주에는 퉁소에 관해 소개하였다. 퉁소는 아래 위가 통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 퉁소를 통소, 퉁수, 또는 퉁애라고도 부른다는 점, 단소보다 굵고 긴 악기로 청공(淸孔)이 있어 음색이 아름답다는 점, 옛 석비(石碑)나 석상에 퉁소 그림이 보인다는 점,『악학궤범』에도 9공의 퉁소가 소개되어 있다는 점, 그럼에도 궁중음악에서는 퉁소의 사용처를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반면, 민간음악에서는 북청사자놀음의 반주음악이나 시나위 음악을 통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 우리보다는 중국의 조선족 동포사회에서의 퉁소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석전(釋奠), 즉 문묘(文廟)제례에 편성되는 관악기로 훈, 지, 약, 적과 같은 악기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문묘제례란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그들의 학문과 정신을 받드는 의식으로 여기에는 초헌, 아헌, 종헌에 따라 음악과 춤이 따르는데, 그 음악은 고려때 송나라에서 들여온 아악으로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고대의 음악을 전해 준 중국은 그 음악을 잊고 있으나 우리는 고려 때의 음악을 악보로 기록하여 지
‘퉁소[洞簫]’라는 말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 우리가 쉽게 만나는 노래는 서도소리 초한가(楚漢歌)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산(算) 잘 놓는 장자방(張子房)은 계명산 추야월에 옥통소를 슬피 불어 팔천제자(八千弟子) 해산 할 제, 때는 마침 어느 때뇨. 구추삼경(九秋三更) 깊은 밤에 하늘이 높고 달 밝은데, 외기러기 슬피 울어 객(客)의 수심(愁心)을 돋워 주고 장자방의 사향가(思鄕歌) 퉁소가락이 얼마나 애절했으면 항우(項羽)의 8천 군사가 일제히 전의(戰意)를 잃고 항복을 하고 말았을까? 퉁소를 퉁수, 또는 퉁애라고도 한다. 이 악기는 단소에 비해 보다 굵고 긴 세로악기여서 저음을 내고 있지만, 대금처럼 청공(淸孔)이 있어서 그 음색이 매우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함께 불기 시작하면 흥겹고 장쾌한 가락이나 리듬에 모두가 하나가 되는 힘을 지닌 악기이기도 하다. 원래 소(簫)라는 악기는 위가 열려있고 밑은 닫혀 있는 세로 부는 관악기이다. 위는 열려있고 아래는 막혀 있는데 소리가 날까? 가령 물병이나 술병에 입술을 대고 바람을 넣어도 소리가 나는 원리와 같다. 그러나 퉁소는 위와 아래가 통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지난 주 단소의 재료와 구조, 그리고 소리 내는 요령에 관하여 간단히 소개하였다. 단소는 퉁소에 비해 작은 소(簫)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재료로는 오죽(烏竹), 황죽(黃竹), 소상(瀟湘)반죽(半竹)이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 죽관의 제1공은 왼손의 엄지, 제2공은 왼손의 집게, 제3공은 왼손의 장지, 제4공은 오른손의 장지, 제 5공은 항상 열어놓고 연주한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소리 내는 요령은 위아래의 입술을 최대한 넓혀서 - 휘 - 하고 바람을 넣으며 단소를 드는 각도도 다양하게 시도해 볼 것과 무엇보다도 약하고 부드럽게 바람을 넣어야 소리가 잘 난다는 안내를 하였다. 국악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 될 오늘을 기다리며 나는 학생들에게 엄한 단소의 실기 교육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단소는 소리내기가 약간 까다로운 반면, 한번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반해 쉽게 놓고 싶지 않은 악기이다. 그래서 단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소를 오래 사귄 친구와 같은 악기라고 말한다. 단소가 언제부터 우리 음악에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악학궤범≫이나 영조 때의 ≪증보문헌비고≫에도 언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민간에
단소는 짧은 취악기(吹樂器, 입으로 불어서 관 안의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는 악기)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길이는 40여 cm정도, 내경의 지름이 1.2~1.3cm 정도여서 그 이름처럼 작은 악기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세로 부는 악기인 퉁소가 있는데, 퉁소는 단소보다 굵고 긴 형태이며 단소는 퉁소에 비해 작은 소(簫)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단소의 재료는 검은 색깔의 대나무인 오죽(烏竹)이나 오래된 황죽(黃竹), 또는 소상(瀟湘)의 반죽(半竹)이라 하여 유명 강가에서 자라고 있는 얼룩무늬의 대나무가 많이 쓰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료는 황죽이다. 그런데 마디가 촘촘하지 않은 일반 대나무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거나 더워질 경우, 또는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갈라지기 쉽게 때문에 비교적 단단한 재질의 쌍골죽이 악기의 재료로 좋다. 이러한 쌍골죽은 대밭에서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종의 비정상적인 대나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제품을 위한 재료로 적합하지 않기에 일찍 베어 버리기 일쑤다. 때문에 주인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쌍골죽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단소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윗부분에 U 자 형태의 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