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교수]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최창남의 경서도 소리발표회와 제자들이 준비한 고 백인영 1주기 추모음악회 이야기를 하였다. 다시 가야금의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앞에서는 가야국의 우륵(于勒)악사가 신라로 투항하여 충주 지방에서 가야금 활동을 하던 곳을 지금 사람들이 탄금대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고, 제자들이 새롭게 고쳐 만든 음악에 대하여 우륵 선생은 낙이불류(樂而不流)애이불비(哀而不悲)라 하여 정악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악하죄호(樂何罪乎), 곧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다고 하는가! 라는 말로 신하들을 설득하여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았다는 진흥왕의 이야기도 하였다. 진흥왕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과연 우리가 가야금과 그 음악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던 진흥왕의 존재가 곧 가야금의 오늘을 이어준 결정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 판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현악기이다. 줄은 모두 12줄이다. 가야금은 12줄 모두를 기러기발 모양의 안족(雁足)위에 얹어 놓고 이것을 움직여가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지난주에 이어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즉흥음악의 선두주자였다는 점, 음악적 재기(才氣)를 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는 점, 17살에 KBS 목포방송국의 전속악사로 있으면서 퓨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명인명창들의 음악인생을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을 탄탄하게 만들어 왔다는 점들을 이야기 하였다. 그 다음 추모의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 고 백인영 명인 추모공연에서 명인들이 함께 연주한 시나위 합주 백인영 선생! 지상파 방송을 통해 국악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연예와 오락, 그리고 사극(史劇) 드라마의 반주음악이나 영화음악에 있어서도 당신의 아쟁이나 가야금 소리는 빠지지 않았지요. 아니 빠지게 되면 극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오. 당신이 구슬프게 문질러 대는 아쟁소리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고 가야금 12줄이 희롱하는 소리에는 여인들의 고달픈 삶이 녹아 있어서 많은 사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주에는 소리판을 펼치게 된 경서도 소리의 간판, 최창남 명창 이야기를 하였다. 나이 80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는 한창 때 최창남씨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멤버들이 공연에 참가한다고 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흥행이 안 된다는 증언을 해 주었다. 19세에 벽파 이창배 문하에 들었는데 그는 경서도 소리에 알맞은 맑고 구성진 목과 넓은 음역, 기교나 표현력이 특출나서 수료와 더불어 보조강사로 채용되었다는 점, 타고난 목과 강유(剛柔), 명암(明暗),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현란한 기교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그의 영역이어서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리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기로 한다. 그는 가야금과 아쟁의 명인이었으나 지병으로 작년 가을 고인이 되었다. 그의 타계 1주년을 기리며 제자들과 선후배 음악인들이 1013년 10월 13(일) 오후 5;00시에 대치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에서 추모음악회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2013년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게 된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로움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전통을 잊지 않고 충실히 지켜가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지닌 명창이란 점, 그는 산타령의 예능보유자이며 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연창하는 소리로 답교(踏橋)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란 점,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 말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이 총 동원되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계약이나 흥행이 어려웠으며 공연이 끝나면 팬들이 최창남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구한말 유명했던 선소리패들은 이태문의 뚝섬패, 이명길의 왕십리패, 권춘경의 동막패, 소완준의 과천패, 그 외에도 성북동패, 쇠붕구패, 아오개패, 진고개패, 방아다리패, 배오개패, 자하문밖패 등이 있었다고 하나 변화의 물결에 밀려 전문적으로 부르던 소리패에 의한 연창(演唱)은 이미 맥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 따르면 고종 때의 명창으로 뚝섬패의 이동운이 있었는데, 그의 선생이 그 유명한 이태문이었고, 이태문의 선생이 신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우륵의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으려는 진흥왕과 이를 적극 말리는 신하들의 의견이 대립되는 장면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보통 임금이 아니었다. 가야는 망한 나라이고 가야금은 망한 나라의 음악이니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진흥왕의 악하죄호(樂何罪乎), 즉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이 한마디로 결판이 나 버린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야금은 기녀(妓女)들이 가까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까지도 가야금을 기녀들의 악기로 보려는 시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던 진흥왕의 존재가 곧 가야금의 오늘을 이어준 결정된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한 유능한 지도자의 능력이나 판단, 그리고 결단은 역사를 바꾸고도 남는다는 점을 알게 만든다. 잠시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에는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는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하겠다. 경서도 소리의 원로, 최창남(崔昌男) 명창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올해에도 제자들과 함께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가야국의 악사였던 우륵(于勒)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투항하게 되고 지금의 충주 지방에서 가야금을 타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탄금대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 그곳에서 진흥왕과 우륵과의 만나게 되었고, 법지와 계고, 만덕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 제자들은 선생의 음악이 번거롭고 음탕하다고 해서 5곡으로 편 작곡을 새롭게 하였다는 이야기, 우륵 선생이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다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낙이불류(樂而不流)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유명한 소감을 남겼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렇게 감동을 준 우륵의 제자들은 그 음악을 임금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전에 들었던 그 음악이 그대로 신라인들의 솜씨로 재현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왕; 하하하 정말 훌륭한 음악이오, 어떻소, 나는 이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으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임금의 의도와는 달리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의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신하; 아니 됩니다., 말도 안됩니다. 임금; 안 된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 주에는 가야금의 2종류로 법금과 산조 가야금이 쓰이고 있는데, 법금이 원형이고 산조가야금은 19세기 말, 산조음악이 잉태되면서부터 민속악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점, 한자음으로 가야금(伽倻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가얏고'가 원래의 이름이란 점, 6세기경에는 이미 고 라는 현악기가 있었다는 점, 우륵이 지었다고 하는 하가라도(下加羅都)를 비롯한 12곡명의 소개, 그리고 음악이란 진정 만국의 공통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들을 이야기하였다. 가야국의 악사였던 우륵(于勒)은 가실왕의 요청대로 12곡을 짓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안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하게 된다. 진흥왕은 우륵을 지금의 충주 지방에 머물게 해 주었다. 신라 땅에 들어온 우륵이 할 일이라곤 가야금을 뜯는 일 외에는 달리 없었다. 뒷동산에 달이 뜨면 고향땅을 바라보며 가야금을 만졌고, 꽃피는 봄이 되면 두고 온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가야금을 뜯었던 것이다. 가야금을 타면서 하루를 시작하였고 가야금을 타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자리를 탄금대라 하여 지금도 충주지방에서는 자랑거리로 여기로 있고 충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탄금대가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 속풀이에서는 송서(誦書)와 율창(律唱)의 방법으로 전 국민의 책읽기 확산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의 글을 3회에 걸쳐 올렸다. 책읽기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송서나 율창을 추천하였으며 이 방법은 청소년 인성교육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송서와 율창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만큼 차제에 서울시청은 각 구청 문화원에 송서 율창에 관한 강좌개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해 주고, 서울교육청은 지역별로 시범학교를 선정하여 학교 교실에서 운영되도록 검토를 권고하였다. 관련해서 정부는 이 종목을 특정 지역에서 국가문화재로 격상시켜 국가차원에서 보존하고 계승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고대 문장가들이 애독 애창하던 진귀한 시문(詩文)이나 수려한 문장내용이 달빛 고요한 밤에 선비의 낭랑한 목소리로 골마다 울려 퍼지는 모습이나 또는 어린이들이 목청을 높여 천리(天理)와 진정(眞情)을 깨닫게 되는 명심보감을 부르는 모습은 상상 그 자체만으로도 품격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이야기를 바꾸어 지난번 악기 소개에서 남겨 놓은 가야금이나 해금, 아쟁, 그리고 편종이나 편경과 주요 악기들을 소개하고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서울시 송서 율창의 보유자, 유창 씨가 새로 만든 음반에는 그동안 우리가 접해왔던 전통적인 송서 삼설기나 적벽부, 추풍감별곡 외에도 《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중용(中庸)》,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에서 교훈적인 내용들을 발췌하여 신선하다는 점, 시창 역시 중국과 한국의 유명시를 망라했다는 점, 시창이나 송서는 고품격의 멋스러움이 묻어나는 선비문화의 대표적 음악유산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예로부터 선비란 글을 읽고 책속에 담겨있는 진리를 터득하면서 변화하는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응용능력을 갖추어왔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그러한 선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무분별한 서구문화가 범람해도 전통사회의 문화를 되살리고 민족의 삶과 미래를 생각할 인물들을 만나보기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책읽기와 더불어 우리 국어의 말하기나 쓰기 등도 혼란스러워 졌으니 책읽기를 통해 우리의 언어를 다시 배우고 가다듬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 거문고에 맞춰 적벽부를 부르는 유창 명창 책읽기의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송서처럼 읽거나 율창의 방법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글자를 눈으로 읽는 것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 속풀이에서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1호가 송서ㆍ율창이지만 일반인은 물론, 국악전문인들까지도 잘 모르고 있다는 점, 유창의 송서는 이문원-묵계월로 전해오는 정통의 가락이고 율창도 퇴계의 후손 이동술을 통해 전수한 전통의 율창이라는 점, 현재 유창 보유자는 이경희 외 40여명의 이수자와 서울을 비롯한 각 시도에 60여명의 전수생들을 거느리고 전승과 보급 제1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을 말했다. 또, 타개책의 하나로 보유자 자신이 송서와 율창 22수를 재구성하여 음반에 담아냈는데, 전통송서의 흐름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위에 현대적 감각을 살린 새로운 흐름이 특징적이라는 점, 이번 음반은 노래를 3분 내외로 짧게 재구성하여 신선하다는 점, 박자가 느리지 않아 지루하지 않다는 점, 사설의 내용이 간결하고 명료해서 알기듣기 쉽다는 점, 거문고나 대금, 해금 피리 등 선율악기들의 수성가락이 첨가되어 있어 목소리와 음색의 조화가 일품이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 송서 공연을 하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보류자 유창 명창 우리가 알고 있고 간간히 들어온 전통적인 송서로는 삼설기 외에 ≪고문진보≫에 보이는 적벽부를 비롯한 어부사 등왕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