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교육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했다. 또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스님으로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우뚝 섰던 만해 한용운의 흔적은 인제 만해마을과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등이 있지만 뜻밖에 남한산성에서도 만났다. 바로 남한산성만해기념관이 그곳인데 만해사상연구가인 신구대 전보삼 교수가 자료수집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웠다. 건국공로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과 만해 생전의 각종 저술과 유물, 3·1운동 당시 만해의 옥중투쟁을 보여주는 신문자료, 희귀본인 「님의 침묵」 초간본 및 100여 종의 「님의 침묵」이본과 만해관련 연구서 등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뜻을 세우다”, “불교인으로의 지향”, “3ㆍ1운동의 선봉에 서서”, “침묵의 미학”, “설중매화”, “심우장의 정절”, “만해가 떠난 그 후” 따위로 나누어 그의 삶을 정리했다. 주욱 이 순서대로 사진과 설명글을 더듬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어제(31일) 오후 2시,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생존 독립운동가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었다. 올해 92살의 유순희 애국지사는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지만 흔쾌히 기자의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려고 했던 것은 5년 전부터 지만 그때마다 몸이 안좋으시다고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셔서 줄곧 찾아뵙지 못하다가 어제 간신히 뵙게 된 것이라 기자는 더욱 기뻤다. 어제 유순희 지사님을 함께 찾아 뵌 분은 생존 독립운동가이신 오희옥(92살) 지사님 이었다. 오희옥 지사님과 유순희 지사님은 서로 왕래를 하시던 터였지만 몇 해 전부터는 유순희 지사님의 건강이 날로 안 좋아 번번이 방문 계획이 취소되곤 했던 것이다. 수원에 사시는 오희옥 지사님을 모시고 서울의 끝자락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유순희 지사님 댁을 찾아 나선 길은 메마른 대지 위에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파트 주변에 심은 산수유 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유순희 지사는 광복군 제3지대에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활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윤 시인님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 입니다. 어렸을 때 윤 시인님의 주옥 같은 시를 만나고 난 뒤부터 윤 시인님의 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윤 시인님의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한 것이 어언 40여 년에 이릅니다. 그로부터 윤 시인님의 시 번역을 제 평생의 과제로 삼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윤 윤동주 시인님! 저에게 번역은 자기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윤 시인님의 시를 일본어로 수준 높은 완성된 변역 시로 만드는 작업은 원시(原詩)에 대한 겸허한 자세이며, 또 그래야만 윤 시인님을 낳은 나라의 문화와 민족에 대한 존경을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00년의 세월이란 꽤나 먼 느낌이지만 그래도 저는 윤 시인의 작품을 늘 곁에 두고 살아서인지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윤 시인님이 항상 곁에 있는 듯 가깝게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님 기뻐해 주십시오. 제가 그토록 원했던 윤 시인님 시를 2015년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사진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특별전이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에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백범이 독립운동을 펼치던 당시의 모습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여서 관람객은 그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눈으로 체험해 볼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의 기념관에서 오는 3월 8일까지 이어지는 '여주독립운동가 및 백범 김구 선생 특별사진전'을 통해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 있어 선각자들의 역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번 특별전은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인 원필희, 강영조, 엄항섭 등의 사진과 독립운동 내용을 담은 35점의 내용물들이 상세하게 표현돼 있어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위태로운 국가의 명운 앞에 기꺼이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사투를 건 투쟁을 통해 우리는 독립된 조국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한다. 이번 사진전시에는 광주백범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진들도 전시돼있어 1919년 3ㆍ1운동의 독립정신을 학습하고 여주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애국선열들의 업적들을 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65살의 나이에 폭탄 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이지만 강우규 의사는 겸손하게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실천 행동 뒤에는 탁명숙(1900-1972)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가하면 핏덩이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치은(1886-1954)애국지사도 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남편 곽치문(1882-1922)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핏덩이 갓난아기를 둔 몸이었다. 철창 밖에서 젖이 먹고 싶어 우는 아기를 일제는 끝내 면회시켜주지 않아 눈앞에서 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꽃샘바람이 아직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어제(27일) 늦은 3시, 서울교육박물관(정독도서관 내)에서는 ‘신여성 김란사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위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다. 김란사(金蘭史, 1872~1919, 그간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河蘭史)로 부름)란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란사는 당시로는 드문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화학당 교사 시절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며 민족혼을 심어준 인물이다. 특히 미국 유학에서 갈고 닦은 영어 실력과 이화학당에서 보여준 민족교육 활동 등이 인정되어 고종황제로부터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영토 조정,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함)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승인’을 받아오도록 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9년 1월21일 일제의 독살로 알려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가 있었고 이어4월김란사 역시 북경에서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당하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빼앗긴 고국 되찾으려 호랑이 사감 되어 다독이던 그 굳은 의지 고종황제와 엄비조차 신임하던 우국의 여인 어느 친일분자의 독약에 뜻 못 펴고 이역땅 북경에서 눈 감았네 아! 슬프도다 그 장대한 뜻 펴지 못함이“ 이윤옥 시인이 《서간도에 들꽃 피다 2, 2012, 도서출판 얼레빗》에서 노래했던 “이화동산에서 독립정신 키운 호랑이 사감 하란사” 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시에서 노래했던 하란사는 요즘 새롭게 알려진 본명이 <김란사> 애국지사다. 서울시교육청정독도서관(관장 김희선) 부설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3ㆍ1절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 인문계 최초의 학사 학위를 받은 김란사의 일생을 통해 진정한 나라 사랑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오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특별전을 연다. 김란사 애국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할 당시 기혼여성이라 하여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김 지사는 밤에 프라이 학장을 찾아가 촛불을 훅하고 끄면서 “우리가 깜깜한 게 이 등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시오.”라고 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지사는 부유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림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습니다. 한국어로 쓴 시이기에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말해주는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화의 강렬한 색채로 그려낸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해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오오사토 히로아키 (大里浩秋, 일본 가나가와대학 명예교수) 교수의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을 둘러본 소감은 간략했으나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전시회’를 본 소감치고는 정확하게 본 듯하다. 오오사토 교수는 전날인 22일 인천대학교에서 열린 ‘중국관행연구포럼’에서 <일본 외국인 거류지 연구회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방한했으며 짬을 내어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어제(24일, 금요일)부터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는 제98주년 3·1절 기념 “불굴의 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 이 한 달간 예정으로 전시에 들어갔다. 시화전이나 그림전에서 흔히 하는 ‘개막식’ 같은 행사 없이 조촐하게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린 그림 33점이 갤러리에 걸렸다. 개막식이라고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권병덕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분으로 충청북도 청주 사람이며, 천도교인이다.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올리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華館)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허형식 장군님! 저는 허 장군님이 태어나신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마을과 조금 떨어진 원평동 장터마을 출신입니다. 허 장군님께서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듯이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제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금오산인으로 고려 말 야은(冶隱) 길재(吉再), 조선시대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생육신 이맹전(李孟專), 그밖에도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박영(朴英) 등 숱한 지조 높은 선비들의 충절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일러주셨습니다. 아마 장군님께서도 어린 시절 집안 어른으로부터 금오산 출신 선비들의 행적을 많이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고장이 왜 근현대사에서는 충절의 인물이 없는지 한동안 절망 속에 지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8월,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 후손 이항증(李恒曾) 선생과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후손 김중생(金中生) 선생의 안내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8월 4일)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許亨植)’ 장군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