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전수희 기자] ▲ 위안부 소녀상 뒤의 죄악상이 낱낱이 적혀있다. (어제 24일 찍은 사진) 내일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를 맞는 날이다. 안 의사는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의 죄를 15개조 항으로 또박또박 짚어 나갔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왕의 아버지를 죽인 죄다. ▲ 남산에 있는 이등박문의 죄악을 적은 돌비석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무덤의 부장품을 꺼내 팔아먹기 위해 선조의 무덤에 손을 대는 일을 하는 후레자식은 한국 정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일제강점기에 그런 후레자식이 있었다. 1905년 초대 조선 통감 자격으로 조선에 부임한 이등박문이란 자가 바로 그자다. 1905년 이등박문은 통감자리에 앉자 이미 조선에 와있던 일본인 도굴꾼들과 손을 잡고 맨 먼저 손을 댄 것이 고려청자다. 이등박문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 몰려 있는 왕후, 귀족들의 분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덤 털이에 일부 마을사람들이 저항하면 총으로 위협을 가했다. ▲ '청자거북이형연적'은 동경국립박물관에 있었던 고려청자로 이것은 이등박문이 일본 황실에 보낸 103점 가운데 하나다. 한일조약 때 되돌아왔다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등박문은 도굴꾼들을 매수하여 무덤을 마구 파헤쳐 고려청자를 파낸 뒤 명치왕과 황족들에게 조선통감의 위세를 자랑하고자 선물했다. 심지어는 골동품상을 통째로 매수하여 고려청자를 입수한 뒤 30점에서 50점을 한 번에 선물하기도 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에 이르고 있다고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失われた朝鮮文化遺産'》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생전에 시인이라 불린 일이 없고 시집 한권 발행한 적이 없는 시인 윤동주. 그러나 그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대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은 27살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생을 마감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이었지만 한글로 시를 쓰는 것이 눈에 거슬려 잡아 가두면서 그의 일본유학시절의 노트, 일기, 장서, 작품 등도 함께 압수되었다. 안타깝게도 압수된 이래 그의 작품과 장서들은 행방불명 상태다. ▲ 1943년 우지가와 강변 다리에서 동지사대학 친구들과 앞열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 시인 1942년 2월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学) 영문과로 편입학을 하게 되는데 릿쿄대학에서는 2010년 4월부터 윤동주장학금을 만들어 일본에 유학 중인 윤동주 후배들에게 매월 장학금을 주고 있다. 좀 더 릿쿄대학의 시인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에서 소개하는 윤동주에 대해 들어보자. 윤동주는 민족 수난의 시대에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의연히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시로 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인간은 그것이면서 그것이 아니다고 우기면서 사는 사랑 고집이다 -사랑과 인생 가운데 신시성- 《한흙 제54호》에서 신시성 시인은 인간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런가 하면 김리박 시인은, 어릴 때 구들방서 먹던 찬국수/ 어머니 손맛 묻은 그 맛은 어디 갔고 / 옛 동무 하나만 남아 둘이서 호르르 라는 시로 고향의 향수를 읊고 있다. ▲ 한흙(大地) 표지 재일한국문인협회 회장인 김리박 시인이 주축이 되어 만드는 문예지 《한흙》은 1992년 창간이래 2013년 12월로 스물한 해를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어엿한 처녀로 성장했다. 기자가 《한흙》을 만난 것은 5년 전이다. 그때 기자는 교토 속의 한국문화답사 취재 길이었는데 교토에서 한국인보다 더 철저히 우리 토박이말을 살려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토 후시미에 있는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의 서재에는 한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 관련 책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한글과 한국어 관련 책이 특히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이는 선생의 한글사랑을 여실히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그걸 입증하듯 선생의 직함 또한 대한민국 한글학회 간사이지회지회장 (関西支会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여기는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산다는 황거 앞이다. 도쿄 관광 코스에는 꼭 들어 있다는 필수코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관광만 할 수 없는 유적지다. 앞에 보이는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1924년 1월 5일 관광객 틈에 몸을 숨긴 채 김지섭 의사는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졌다. 당시 습기를 머금은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었던 거사 장소인 것이다. 가까운 곳의 사쿠라다몽(櫻田門, 고려문) 곧 황거로 들어가는 문에서는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이 있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을 우습게보았겠지만 이 두 지사의 거사는 그야말로 조선인의 기개를 여지없이 보여준, 그래서 일본 경찰과 일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쾌거였다. 한국인들이여 황거 앞 이중교와 사쿠라다몽에 가거든 우리의 영웅 김지섭과 이봉창 두 지사를 꼭 기억하라!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앞 줄임)봄까치꽃은 그 크기가 아주 작습니다.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입니다. 푸른빛이 도는 연보라색의 꽃은 가냘파 보이기까지 합니다. 작고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매서운 겨울을 났을까? 또 땅이 풀리자마자 꽃을 피워 남보다 먼저 새봄을 알려줄 생각을 했을까? 봄까치꽃, 이름이 참 예쁩니다. 그런데 봄까치꽃의 원래 이름은 큰개불알풀이라 합니다. 꽃이 지고 난 후 씨앗이 개불알을 닮았다하여 그렇게 불렸다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사람들은 그 이름이 민망하여 예쁜 꽃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 줄임)” 위 글은 오마이뉴스 3월 14일에 전갑남 기자의 글의 일부다. 그는 봄을 맞아 “보라색 작은 꽃이 관심을 달라고 하네요”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곳에 보면 “씨앗이 개불알을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오늘은 이 꽃 개불알꽃에 대해 말해보자. 먼저 국립국어원의《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보면 “개불알꽃 :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25~4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다. 5~6월에 붉은 보라색 꽃이 개의 불알 모양으로 줄기 끝에 한 개씩 핀다.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산이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일본군 장교가 딱 버티고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히죽거리기까지 했지요.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강압적으로 나를 끌고 침대로 갔습니다. 나는 말했죠. '절대 이런 짓을 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가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마. 정말 죽이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칼을 뽑았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꼈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집어던지고는 내 옷을 모두 찢어버리고 잔인하게 강간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어요. 나는 고통이 그렇게 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방을 나갔고 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욕실에 가서 다 씻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모든 더러운 것을. 그저 다 씻어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공포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마치 전류처럼 몸속을 파고 흘러들거든요. 공포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있었죠. 나는 밤이면 그 공포를 여기 내 응접실에 앉아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날이 어둑해질 때쯤이면 소름이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 최대 규모의 민영 뉴스통신사 지지통신(時事通信)은 최근 미국과 호주 등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에 대해 새로운 파문(新たな波紋)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도 하고 있다. 그러나 호주 내에서의 한중(韓中)시민단체의 연대 움직임은 전후 68주년간 참아온 늦은 움직임일 뿐임 결코 새로운 파문이 될 수 없다는게 중론이다. 미국의 위안부 소녀상 움직임 등 최근 아시아인들의 움직임은 일본이 전후(戰後) 위안부 문제를 방치하고 한술 더 떠 아베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등 안하무인격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며 최소한의 행동일 뿐이란 것을 일본 언론들은 간과한 채 파문운운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라는 견해다. ▲ 추운 듯 잔뜩 싸매고 있는 소녀상 (사진 최우성 기자) 일본 산케이신문(産經新聞)은 호주 시드니에 들어설 일본군 종군위안부상(日本軍の従軍慰安婦像)에 대해 싱가폴 특파원 요시무라(吉村) 기자를 통해 호주의 중국계와 한국계 시민단체가 연대하여 호주 최대의 도시 시드니에 위안부상을 설치허가를 지방정부에 냈다.고 전하면서 요시무라 기자가 중국계단체의 양(楊)씨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실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오빠들이 하던 장기놀이도 군인장기로 변했고, 내가 놀던 기차놀이도 어느새 전차놀이로 변했다. 그 시절은 아이들 놀이조차도 전쟁과 연관된 놀이 일변도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죠시가야 공원묘지에 있는 나츠메소세키(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덤을 타고 노는 놀이도 즐겼는데 관리인들이 내쫓아도 다시 몰래 들어가 높은 묘비석에서 뛰어내리면 2계급 특진 같은 군인들이 하던 행동을 흉내 내며 놀았다 이 이야기는 고모리교오코(小林香子, 1930~현재)씨가 《부인통신》 1월호에 기고한 전쟁 세대에 태어나서라는 글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인통신》은 1953년에 설립한 일본부인단체연합회에서 나오는 잡지로 2014년 1월호로 664회를 맡는 유서 깊은 잡지다. 이 잡지를 만드는 단체는 전후 반세기에 걸쳐서 평화와 민주주의, 여성지위 향상을 위해 일본의 수많은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단체로 극우로 치닫는 아베정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게 내고 있다. ▲ 부인통신 편집장 사토사치코 씨, 일본부인단체연합회 회장 시바타마사코 씨, 글쓴이(시계방향)는 3월 7일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만나 한국인들이 아베정권에 하고
[그린경제/얼레빗 = 도쿄 이윤옥 기자] 3월 9일의 도쿄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마치 가을의 어느 날처럼 말이다. 히비야역에서 내려 황거 뜰을 들어서니 전형적인 일본 소나무 정원이 펼쳐진다. 삼십 여 년 전 지방에서 올라온 일본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하토버스(하토란 비둘기를 뜻하며 1일 동경 관광버스)를 타고 황거를 들렀을 때 가이드가 말하길 이곳은 천황폐하가 사시는 곳으로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와보는 곳이란 말이 지금도 선명하다. ▲ 벚꽃 천지라해서 붙은 사쿠라다(櫻田)에 세운 문이라 사쿠라다문이라 부르며 이 문을 다른 말로는고려문이라 부른다. 이 앞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왕의 귀가를 기다리다 폭탄을 던졌다. 이후 일본 답사팀을 이끌고 거의 해마다 들리다 시피하는 황거(皇居)는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그것은 일본인들과 다른 감회일 것이다. 식민지 청년 이봉창과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던져서라도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그 거룩하고 숭고한 마음은 한 시대 신문에 난 한 장의 기록을 뛰어 넘어 이제는 역사의식을 제대로 갖춘 한국인이라면 동경 방문 길에 누구나 그 현장을 가보고 싶도록 만들었다. ▲ 고려문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