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마음도 피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 - ‘봄이 오면 산에 들에’, 김동환 작사, 김동진 작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그랬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예전에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랫말 속에는 “진달래”가 단골이었다. ▲ 진해 군항제는 1952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북원로타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초창기에는 이충무공 동상이 있는 북원로터리에서 제를 지내는 것이 전부였으나, 1963년부터 진해군항제로 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충무공의 숭고한 구국의 얼을 추모하고 향토문화예술을 진흥하는 본래의 취지를 살린 행사와 더불어 문화예술행사다 (창원시문화관광과 제공)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 이란 노래로 힛트친 이용복의 노래 속에도 진달래가 나오고,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를 가시는 걸음마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는 비어있다 나를 채우는 것은 바람뿐 무성히 자란 풀을 깎지 마라 향을 피워 내게 절을 하지 마라 내게는 굶주림 내게는 컴컴한 동굴 내게는 바닷고기에 뜯기는 총 맞은 시체 나는 비어 있다 이제는 돌려다오 내 사타구니를 돌려다오 내 젖가슴을 돌려다오 내 속빈 창자를 내 눈망울을 감겨다오 내 이름을 돌려다오. 제주 43평화공원 안 제주 43 국가추념일 공식지정 기념 시화전 꽃비 내리는 봄날에 전시된 김규중 시인의 헛묘 시다. 시인은 내 사타구니를, 내 젖가슴을, 내 속빈 창자를 돌려달라.고 외친다. ▲ 제주 4.3평화기념관 전경 평화로운 섬 제주. 67년전 이 곳에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학살극이 빚어졌다. 제주 주민 아홉 명 가운데 한 명이 살해당한 그 비극의 사건, 이름하여 제주 4․3사건! 그 비극의 역사를 기리는 봉개동에 자리한 제주 43평화공원을 기자는 4․3추념식 하루 앞서 2일 오후에 찾았다. 하늘은 청명했다. 살랑대는 봄바람에 전국에서 제주로 수학여행 온 차들로 주차장은 초만원이었고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들은 삼삼오오 히히덕거리면서 바람의 언덕을 거닐고 있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관동 최고(最古)의 절 도쿄 아사쿠사 천초사 (淺草寺, 센소지) 관음당 뒤쪽에 나란히 있는 아사쿠사신사(淺草神社) 경내에는 이곳이 히노구마(檜前) 목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히노구마 목장이란 백제계 히노구마 씨의 목장을 말하며 당시 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부의 상징을 뜻한다. ▲ 백제계 어부형제와 하지스님의 그림이 천초사에 걸려있다 히노구마 어부 형제와 관련이 있는 천초사의 유래를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林羅山)이 쓴《등원성와문집, 藤原惺窩文集》에서 살펴보면, “서기 628년 스미다가와(隅田川)에서 고기를 잡던 히노구마 하마나리, 다케나리 형제는 평소처럼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날따라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다. 여러 번 그물을 던진 끝에 어망에 걸려나온 것은 사람모습의 인형(금동불)이었다. 형제는 이 이상한 물체를 그대로 바다에 던져 버렸으나 몇 번이고 그물에 걸려 나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건져서 당시 마을의 원로인 하지(土師中知) 씨에게 가지고 가서 내보였다. 그러자 하지 씨는 이것이 성관세음보살상(聖観世音菩薩の尊像) 이라며 깊은 믿음으로 공양했다. 어부형제도 이 불상이 중생의 모든 소
[그린경제 얼레빗 = 정석현 기자] 동해묘중수기사비는 조선조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던 남공철(1760~1840년)이 1800년(정조 24년)에 찬한 것이다.(『강원도사』에는 1680년에 세워진 것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현재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에 있으며, 일제시대에 내버려졌던 탓에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잘 유지하고 있다. 동해묘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곳은 서해의 풍천, 남해의 나주(지금의 영암)와 함께 우리나라 삼해의 해신에게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임금이 친히 향축을 내려 보내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동해묘중수기사비(東海廟重修紀事碑) 조선 경종2년(1722년)과 영조 28년(1752년)에 양양부사 채팽윤과 이성억에 의해 각각 중수 되었으며, 정조 24년(1800년)에는 어사 권준의 상주와 강원도관찰사 남공철의 주장으로 재차 중수되었으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철폐되었다. 연대:1800년 (정조 24년) 소재지: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그린경제/얼레빗 = 김철관 기자] 박근혜 대통령 독일방문에 즈음해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고지도 전시회가 수도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다. ▲ 지난 12일 오후 4시(현지시각) 하성철 재독독도지킴이단장이 독도 서양고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김철관 재독 독도지킴이단(단장 하성철)은 지난 3일부터(오는 28일까지) 독일 베를린한인회 회의실 벽면에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서양 고지도 16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한 서양 고지도는 하성철(베를린한인회장) 재독 독도지킴이단장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비로 구입한 600여점 중 독도 부근을 한국해와 조선해로 표기한 고지도 16점을 골라 전시했다. 특히 이 가운데 1763년 독일에서 제작된 일본지도에 한국해라고 쓴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지도도 있다. ▲ 독도 표기 서양고지도 김철관 지난 3일 전시장에서 열린 오프닝행사에 하성철 재독 독도지킴이단장을 비롯해 허언욱 주독 대사관 총영사, 윤종원 문화원장, 신성식 베를린 재독독도지킴이 단장 등 관계자 5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일 오후 4시(현지시각) 독일 베를린한인회 사무실에서 만난 하성철 단장은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영 기자] KTV(원장 김관상)는 안중근 의사 순국일인 오는 3월 26일(수) 낮 1시, 안중근 의사가 주창했던 '동양평화론'을 바탕으로 안 의사의 사상과 업적을 되새기고 바람직한 한중일 관계를 짚어보는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동양평화론』을 방송한다. ▲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1층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1층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에는 오전 9시 30분에 멈춰선 시계가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시각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2014년, 일본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을 두고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망언을 내뱉고, 일본 외무성은 우리나라와 중국에 “매우 유감”이라며 항의를 표했다. 오는 3월 26일은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차가운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104주기가 되는 날이다. 우리 독립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의 항일운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영웅으로 꼽히는 안중근 의사. 그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옥중에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
[그린경제/얼레빗 = 전수희 기자] ▲ 위안부 소녀상 뒤의 죄악상이 낱낱이 적혀있다. (어제 24일 찍은 사진) 내일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를 맞는 날이다. 안 의사는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의 죄를 15개조 항으로 또박또박 짚어 나갔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왕의 아버지를 죽인 죄다. ▲ 남산에 있는 이등박문의 죄악을 적은 돌비석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무덤의 부장품을 꺼내 팔아먹기 위해 선조의 무덤에 손을 대는 일을 하는 후레자식은 한국 정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일제강점기에 그런 후레자식이 있었다. 1905년 초대 조선 통감 자격으로 조선에 부임한 이등박문이란 자가 바로 그자다. 1905년 이등박문은 통감자리에 앉자 이미 조선에 와있던 일본인 도굴꾼들과 손을 잡고 맨 먼저 손을 댄 것이 고려청자다. 이등박문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 몰려 있는 왕후, 귀족들의 분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덤 털이에 일부 마을사람들이 저항하면 총으로 위협을 가했다. ▲ '청자거북이형연적'은 동경국립박물관에 있었던 고려청자로 이것은 이등박문이 일본 황실에 보낸 103점 가운데 하나다. 한일조약 때 되돌아왔다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등박문은 도굴꾼들을 매수하여 무덤을 마구 파헤쳐 고려청자를 파낸 뒤 명치왕과 황족들에게 조선통감의 위세를 자랑하고자 선물했다. 심지어는 골동품상을 통째로 매수하여 고려청자를 입수한 뒤 30점에서 50점을 한 번에 선물하기도 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에 이르고 있다고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失われた朝鮮文化遺産'》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생전에 시인이라 불린 일이 없고 시집 한권 발행한 적이 없는 시인 윤동주. 그러나 그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대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은 27살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생을 마감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이었지만 한글로 시를 쓰는 것이 눈에 거슬려 잡아 가두면서 그의 일본유학시절의 노트, 일기, 장서, 작품 등도 함께 압수되었다. 안타깝게도 압수된 이래 그의 작품과 장서들은 행방불명 상태다. ▲ 1943년 우지가와 강변 다리에서 동지사대학 친구들과 앞열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 시인 1942년 2월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学) 영문과로 편입학을 하게 되는데 릿쿄대학에서는 2010년 4월부터 윤동주장학금을 만들어 일본에 유학 중인 윤동주 후배들에게 매월 장학금을 주고 있다. 좀 더 릿쿄대학의 시인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에서 소개하는 윤동주에 대해 들어보자. 윤동주는 민족 수난의 시대에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의연히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시로 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인간은 그것이면서 그것이 아니다고 우기면서 사는 사랑 고집이다 -사랑과 인생 가운데 신시성- 《한흙 제54호》에서 신시성 시인은 인간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런가 하면 김리박 시인은, 어릴 때 구들방서 먹던 찬국수/ 어머니 손맛 묻은 그 맛은 어디 갔고 / 옛 동무 하나만 남아 둘이서 호르르 라는 시로 고향의 향수를 읊고 있다. ▲ 한흙(大地) 표지 재일한국문인협회 회장인 김리박 시인이 주축이 되어 만드는 문예지 《한흙》은 1992년 창간이래 2013년 12월로 스물한 해를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어엿한 처녀로 성장했다. 기자가 《한흙》을 만난 것은 5년 전이다. 그때 기자는 교토 속의 한국문화답사 취재 길이었는데 교토에서 한국인보다 더 철저히 우리 토박이말을 살려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토 후시미에 있는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의 서재에는 한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 관련 책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한글과 한국어 관련 책이 특히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이는 선생의 한글사랑을 여실히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그걸 입증하듯 선생의 직함 또한 대한민국 한글학회 간사이지회지회장 (関西支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