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명하(趙明河,1905. 4. 8(음력)~1928. 10. 10)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松禾)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용우(趙鏞禹), 모친 배장연(裵長年) 사이의 차남. 본관은 함안(咸安). 조의사는 일찍이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에 탄압 받는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 조의사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듣고 애국남아(愛國男兒)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그 무렵 아들 혁래(赫來)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던 부인 오금전(吳金全)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조의사는 갑자기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처자식을 만나 마음이 흔들릴 지도 모르는 자기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중구(呂仲九)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의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에 상륙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던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소재 '화과원'을 국가사적지로 지정하기 위해 함양군이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했다. 함양군은 경남도의 지원을 받아 사업비 6천만 원을 들여 6∼12월 6개월 동안 함양 백용성선사 화과원 유허지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기본 연구용역과 도자기를 굽던 도요지터 발굴조사 용역을 실시한다고 24일 밝혔다. 군은 오는 12월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재청을 방문, 국가사적 지정을 협의할 계획이다.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50번지 백운산 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화과원은 3・1운동당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이신 백용성 선사가 선수행과 생산적 근로활동을 병행하여 나간다는 선농불교사상을 실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7년 창건한 농장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용성 선사는 참선하며 농사를 짓는 선농불교를 주창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임야와 황무지 70만 정보(30여haㆍ90여만 평)를 사서 농장을 일궜다. 백 선사는 배나무, 감나무, 밤나무, 감자 등을 재배해 판매한 수익금과 도자기를 구워 판매한 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동풍신 열사님! 열사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아무래도 ‘열사’라는 호칭은 조금 거리를 두고 부르는 것 같아, 처음에는 ‘동풍신 할머니’로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7세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신 열사님을 할머니라고 하려니까 아무래도 제게 떠오르는 동풍신 열사의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동풍신 누나’라고 하려니 조금은 불경스러운 것 같네요. 그런데 열사님과 비슷한 나이에 순국하신 유관순 할머니에 대해 유관순 열사라고 많이 부르고, 또 유관순 열사 기념관도 있어, 저도 ‘동풍신 열사’라고 부르렵니다. 동풍신 열사님! 제가 처음 열사님을 만난 것은 이윤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입니다.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관통하던 날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불이 붙었다 이윤옥 시인이 열사님에 대한 뜨거운 가슴을 토해낸 시입니다. 이시인은 동풍신 열사와 유관순 열사가 3.1 만세운동으로 순국하였고, 또 순국할 때 나이가 비슷했던 점 등으로 두 분을 같이 놓고 시를 썼더군요. 저는 이시인의
[우리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저는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집안의 어른들께서 할아버지의 성함을 언급할 때면 늘 크나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말하곤 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지. 중국 대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분이시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다 그 어른 덕분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할아버지는 직계 후손은 물론이고 저같은 방손(傍孫)을 포함해 우리 친척 모두의 영웅이었습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가족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부분 입에 풀칠하고 사는 정도에 그쳤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종종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어쩌면 친척들 사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생전에는 나라를 되찾는 일에, 납북돼 돌아가신 뒤에는 친척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각각 큰 역할을 하신 셈입니다. 김붕준 선생 이제는 할아버지를 직접 뵌 어른들이 친척들 중에도 많지 않습니다. 삼일운동 직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셔서 해방된 뒤에야 귀국하셨다가 그나마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납북되시고 말았으니 직접 뵌 분들이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제천의병에서 전군장으로 활약한 안승우[1865~1896]선생을 2016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화서학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1896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던 망국적 위기상황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를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 사진 한장도 없이 의병활동으로 순국한 안승우 선생은 6월의 독립운동가이지만 얼굴 사진이 없어 그림으로 대신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후 제천으로 옮겨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의 직책을 맡았다. 이때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하였다. 제천의병은 단양으로 진군하여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896년 2월 화서학파의 종장인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선생은 전군장을 맡아 의병의 선봉을 이끌었다.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이 다수 집결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羅龍集)과 모친 송씨(宋氏)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두영(斗永)이었으나 인영(寅永)으로 개명하였다가 대종교 창교후 철(喆)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 등을 거쳐 1905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재직중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이긴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이긴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하 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하였다. 비밀결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救國)을 위하여 동경(東京)에서 단식투쟁 그 뒤 강진 출신 오기호, 부안출신 이기(李沂) 지사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해 미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하여 러일전쟁이 종식되고 포오츠머츠에서 강화회의를 열게 되자 이 회의에서 우리 나라 장래에 대한 중대문제가 다루어지리라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윤세주(1901. 6. 24~1942. 6. 3) 선생은 1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에서 부친 윤희규(尹熺奎) 선생과 모친 김경이(金卿伊)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 저주할 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열사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기도 하고 국민학교 때 일 왕(日王)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릴 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선생은 경남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 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金鴻杓)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했다. 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 그러나 선생의 가슴에 반일, 배일 사상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서울 만세운동(萬歲運動) 참가 후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하오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너의 아버지, 북한에 여러 번 밀파된 것 아냐? 내 선친 남파 김정수 공과 같이 마지막 임시정부 경교장에서 비서를 하시던 오악환 선생께서 나에게 물었다. 너의 아버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이 북한에 여러 번 염탐을 보낸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네 내 선친께서 비밀로 해 오던 것을 친구이시며 황해도 고향 아저씨께서 토로해서 알았다. 내 선친이 자식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일부러 꺼내신 것이다. 선친은 내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과 늘 겸상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 뿌리에 의심이 갈 때마다 선친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곤 했다. 그 때마다 내 선친은 단답형으로 대답하셨다. 김구 선생의 심부름으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 댁을 들렀다가 왔다. 간결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친께서 경찰서에 구류를 당했고 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음력 10월 28일 큰 아버지 김영수 공 생신 때 꼭 잔치를 여셨는데 내 선친을 세 번 살려주신 음덕에 대한 보답이었다. 북한에 염탐을 가서도 죽을 고비가 있으셨는가 보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에서 일제 군경과 밀정을 처단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한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 문창학 선생(1882-1923.12.20.,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2016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 선생의 사촌동생이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2일 대한군정서 대원들과 함께 웅기항의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경계가 심하여 함경북도 경원군 소재 신건원주재소로 공격목표를 바꾸었다. 중국 화룡현을 떠난 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 1월 5일 새벽에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재소를 급습하여 일제 순사를 사살하고 폭탄을 투척하여 일경 숙소를 파괴하였으며, 일제 군경과 교전 후 복귀하였다. 이후 만주 훈춘 등지에서 일제 군경 공격과 밀정처단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 1922년 12월 13명의 독립군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1923년 5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김학규(金學奎, 1900. 11. 24~1967. 9. 20 )선생은 1900년 11월 24일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金基燮)의 4남 2녀 중 4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호는 백파(白波)이다. 5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게 되자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다 1910년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선생은 국외로 망명하여 구국항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이갑 선생 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12월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 통화현 이밀(二密)이라는 황무지 산골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도끼와 호미로 산지를 개간하고 옥수수와 콩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경야독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생의 온면한 생활로 말미암아 가정형편이 점차 나아졌다 한다. 그 당시 통화현의 고산지역에는 일찍부터 이시영, 이회영, 이상룡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들어와 독립군 기지건설에 노력하고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