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반재원 소장] 우리가 민족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단군조선을 세운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민족을 지칭할 때에는 왜 단군민족 또는 단군조선족이라고 하지 않고 한민족이나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는 단군조선 이전에 한임의 한국(桓國), 치우의 배달국이 있어 한민족 배달민족 배달겨레가 되었고 단군조선은 그 아랫대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桓國을 환국이라 하지 않고 한국이라 발음하는 데에는 《신리대전(神理大全, 1917년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이 지은 경전(經典)》에 桓은 그 음이 한이요, 桓은 태일광명(太一光明) 곧, 밝음을 뜻한다.라고 한 기록에서 연원한다. 또 인(因)은 인(仁)이며 인(仁)은 한(桓)을 보살피는 이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고어(古語)에 (桓)은 천(天)이니 한인(桓因)은 곧 천부(天父)라고 하였고, 또 한인은 하느님을 이름이니 하늘은 크다(大) 한(一)이다(桓因亦曰天神 天卽大也一也)라고 하였다. ▲ 배달나라의 치우천왕으로 알려진 도깨비기와(왼쪽), 단군영정 또 桓因을 한임이라 하여 因을 임으로 읽는 것도 또한 인因은 인仁이며 인仁은 임任으로 발음한다.라고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오사카, 나라, 교토 3도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꼽으라면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를 꼽을 사람들이 많다. 동대사라고하면 세계 최대의비로자나불과 고대보물로 가득찬 정창원 등 국보급 보물을 숱하게 간직한 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역사가 유서 깊은 절이다. 특히 동대사 앞에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사슴이 눈에 삼삼하다는 사람도 꽤 있다. 관광버스가 한 무더기의 관광객을 내려놓으면 사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는다. 사슴먹이용 과자 한 봉지를 사면 수십 마리의 사슴들과 사진도 찍고 뿔도 만져 볼 수 있다. 이래저래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나라의 동대사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인연이 깊은 곳이다. ▲ 국보 동대사 대불전 《동대사요록, 東大寺要録》에 따르면 동대사의 전신은 금종사(金鐘寺,긴슈지)로 금종사는 서기 733년 백제스님 양변(良弁)이 세운절이다. 당시 성무왕(聖武天皇)과 광명왕비(光明皇后)는 신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는데 유일한 한 점 혈육이던 왕자 모토이노미코(基皇子)가 생후 11개월 만에 죽자 몹시 상심하였고 이를 계기로 더욱 불심이 깊어졌다. 성무왕은 당시 일본의 60여 곳에 국분사(国分寺)를 지
[그린경제/얼레빅 = 이한꽃 기자] 의사(義士)님께서 이승을 하직하신지도 어언 81년이 되었습니다. 의사님의 육신은 일본의 가나자와에서 암장되었다가 해방된 다음 해에 고국으로 모셔졌습니다. 의사님께서 도쿄 우에노역에 도착하였을 때 이봉창의사와 백정기의사께서 마중 나오셨습니다. 의사님을 포함한 세분께서는 도쿄의 우리 청년들의 등에 업혀 이봉창의거 현장인 앵전문까지 모셔졌습니다. 청년들은 의사님의 귀에 들리게 하기라도 하듯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습니다. 의사님의 장례식은 원래는 1946년 6월 30일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너무나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원통함을 빗물로 씻겨내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1주일이 지난 7월 6일에 서울 시민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습니다. 의사님의 옆에는 이봉창의사와 백정기의사도 함께 모셨습니다. 의사님이 존경하던 백범 선생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의사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 의사님 고향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서산시 운산면과 의사님의 고향인 덕산과는 가야산을 서로 마주보는 지척의 거리입니다. 의사님께서 수덕사에 자주 오르셨죠. 저도 초등학교 때 소풍을
[그린경제/얼레빗 = 반재원 소장]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밸런타인데이가 보편화되어 사랑하는 이에게 초콜릿이나 꽃을 선물로 준다. 이러한 풍습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최근에는 화이트데이, 로즈데이, 빼빼로데이, 블랙데이, 포도데이, 와인데이에다가 심지어는 포옹데이, 키스데이에 이르기까지 정체불명의 기념일들이 생겨났으며, 제품 생산업체는 그때마다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여 톡톡히 매출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대부분 상술로 만들어낸 것인데 젊은 층 사이에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어느덧 새로운 풍속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북부여기》나 《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4월 초파일은 해모수가 나라를 세운 날로 고구려 소수림왕 이전부터 온 백성이 제등(提燈) 잔치를 벌였던 날이다. 그런데 지금의 4월 초파일은 불교잔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석가의 입멸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세일론에서는 기원전 543년 설, 태국과 미얀마에서는 기원전 544년 설, 투르노(Turnour)의 기원전 458년 설, 중성기에 의한 기원설에는 485년 설, 커닝햄(Cunnungham)의 기원전 477년 설, 그가 후에 말한 기원전 478년 설, 막스 밀러 (Max Miller)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처로,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운동가들의 고난처였던 우리나라 독립과 민주화 역사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이 서대문형무소는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관장 박경목)으로 재탄생했다.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심도 있는 역사물 전시ㆍ교육ㆍ체험 학습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15돌 기념 학술심포지엄 모습 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 15돌을 맞아 뜻 깊은 심포지엄을 열었다. 11월 2일 늦은 2시부터 서대문공원 안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서대문구 주최, 서대문도시관리공단 주관의 4ㆍ19혁명기 서대문형무소가 그것이다. 먼저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정일택 이사장의 인사말씀이 있었고,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문 구청장은 환영사에서 프랑스는 우리보다 짧은 피지배 역사였지만 5만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친일과 단절했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역사는 가르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고대사에 보면 가뭄이 들어 비가 계속 내리지 않아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많다.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모두 하늘의 조화로 여겼기 때문이다.특히 모내기 철에 장시간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조정에서는 용한 승려를 불러 기우제를 지내게 했는데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도 기우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서기》권 24 황극왕(皇極天皇) 원년 7월 27일에 보면 백제대사 남쪽 뜰에서 불보살상과 사천왕상을 안치하고 승려와 사부대중이 대운경(大雲経) 독송했다. 28일에 비가 내렸다. 또 권 29 천무왕(天武天皇) 12년 7월부터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백제승 도장(道蔵)이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밖에도 백제스님 도장이 기우제를 행한 기사가 일본서기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도장스님의 도력(道力)이 조정에서 인정 받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한때 남도 7대사에 속하던 큰 규모의 대안사 본당(대웅전)의 현재 모습은 조촐하다 백제출신 도장 스님은 일본에 성실종을 전한 스님으로 806년의 태정관부(太政官符) 에 따르면, 3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까닭은 하나는 자기 민족을 보안하고 하나는 자국의 역사를 유지하며 자국의 강토를 보전하고 하나는 동양의 평화를 바라고 하나는 세계평화를 축하하는 것일 뿐이다. - 류동봉 판결문(고등법원,1919년 6월 5일) - ▲ 독립운동가 어록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 전시장 모습 1 ▲ 어록 전시장 모습 2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방안에 앉아서도 심안(心眼)이 열려 세상을 훤히 내다 보았던 스님! 폭넓은 지식으로 민중 교화에 힘썼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위대한 스님으로 알려진 백제스님 의각 선사가 주석했던 백제사는 오사카시 텐노지 도오가시바에 있던 (大阪市 天王寺 堂ヶ芝町)절로 지금은 조동종의 말사인 관음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스님 의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 문헌은 9세기에 쓰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설화집 《일본영이기》이다. 이 책 ‘상권 14’에는 의각스님에 관한 진기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의각스님은 원래 백제국 스님으로 죠메이왕(37대 齊明天皇, 재위 655- 661) 때에 일본에 건너와서 나니와(難波京)의 백제사에 살았다. 의각법사는 키가 7척(210미터)으로 불교에 널리 통달했으며 항상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때에 혜의(慧義)라 불리는 스님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나와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흘깃 의각스님 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 방에서 신기한 광채가 새어나왔다. 혜의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손가락으로 뚫고 들여다보았다. 법사가 단정히 앉아서 경을 독송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광채가 입에서 나고 있었다.
[그린경제/얼레빗=이한영 기자]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재위 641~660)이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는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었다. 그렇게 멸망한 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백제의 의자대왕과 백제부흥대군의 제사를 지내는 이가 있다. 지난 10월 11일 세종시 운주산 정상에서 운주문화원장인 최병식박사의 집전으로 고유제와 산신제를 지내냈으며, 이어서 이튿날 10월 12일 오전에 백제부흥대군 불교 천도제를 고산사 주지 정대스님과 삼천사 주지 근혜스님의 예불로 봉행 하였다. ▲ 운주문화원장인 최병식박사의 집전으로 고유제와 산신제를 지내는 모습 ▲ 백제부흥대군 불교 천도제를 하는 고산사 주지 정대스님과 삼천사 주지 근혜스님 오전 11시 이권화 세종시기업지원사무관의 타종으로 시작하여 최병식 원장의 개회사에 이어 유한식 세종특별자치시장과 유환준 세종특별자치시시의회의장의 격려사와 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장, 조유전 경기문화재 연구원장의 축사가 있었다. 이후 장충렬 시인의 낭낭하고 애절한 헌시낭송과 한국차문화협회 다림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