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윤수애 기자]중국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높이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한 사건. 바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1908. 6. 21 출생 24살로 의거 순국)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한 것이지요. 그 위대한 윤봉길 의사 탄신 105돌을 맞이하여 (사)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현충시설 가족체험 탐방행사기 있어 다녀왔습니다. 이날 체험은 매헌기념관에서 시작하여 윤봉길 의사 생가(조중도), 에산 충의사, 독립기념관 등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순국선열들의 발자취와 나라사랑 정신을 느낄 수 있는 현충시설을 청소년이 부모님과 함께 찾아가보는 행사입니다. 돌아보면서 먼저 일본군 수뇌를 물통 폭탄으로 죽이고 부상케 한 일 뿐을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말한 것처럼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윤 의사는 단신으로 해냈다는 게 자랑스러웠습니다. 윤 의사의 훌륭함은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16살에 시회에서 장원을 한 것을 시작으로 18살 시집을 펴
[그린경제=이윤옥 기자]최근 일본의 역사왜곡은 극에 달했다. 종군위안부를 부인하는가 하면 여전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려 한국인들의 분통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 내에서 하는 것에 성이 안차 세계 각국에 역사 왜곡을 부추긴다. 문제는 이들 나라들이 아무런 고증없이 일본을 따른다는 다는 것이다. 기자는 중국 섬서성 유적답사 여행을 하는 중이다. 그 여행 중에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역시 왜곡의 현장을 보았다. 역사박물관 제3전시실 당나라 역사전시관에 당시의 한중일 지도가 나오는데 여기에 동해를 분명히 일본해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 중국 섬서성 역사박물관 제3전시실 당나라 역사전시관의 당시의 한중일 지도, 동해를 분명히 일본해로 표기해 놓았다.(붉은 줄로 표시) 당나라시대에 해양술이 발달되지 않아 일본은 신라 배를 이용해야 겨우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역사서가 증명한다 그런 상황에서 왜국이 바다 이름에 신경 쓸 틈이 없었을 것은 자명하다. 또한 분명한 사실은 과거나 현재나 일본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이날 역사박물관을 관람한 한국 관광객들은 섬서역사박물관이 이에 대한 신속한 시정해주기를
[그린경제=이한영 기자]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위는 윤봉길 의사 (1908. 6. 21. ~ 1932. 12. 19.)가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쓴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축하식이 벌어지던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장렬한 의거는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고 할 만큼 대한민국의 독립의지와 기개를 세계만방에 드높인 의거였다. 이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제6회 매헌청소년문화제가 열린다. ▲ 매헌 윤봉길의사 탄신 105주년 매헌청소년문화제 (사)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www.yunbonggil.or.kr)와 (사)월진회(www.wjh.or.kr) 공동 주최로 오는 6월 29일(토요일) 10시부터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과 양재시민의숲에서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글짓기(운문, 산문)와 그리기 대회를 연다. 주제는 윤봉길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 등
[그린경제=한성훈 기자] 지난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공동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밀감식팀은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당해 목이 손상돼서 즉사 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졌거나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비록 민간 발표이나 이로써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서 실족해 죽었다는 정부의 공식보도를 37년 만에 부정하는 것으로,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 장준하 선생 겨레장 ▲ 파주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이후 장준하 선생의 유해는 3월 30일 겨레장으로 다시 장례를 치르고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들끓던 여론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평소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사)민족문제연구소 이규봉 운영위원장은 다음 목적지로 장준하 선생이 중국 서주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 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장준하 선생의 삶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다섯의 동지가 합
[그린경제=심순기 기자] 몽골 수도 울란바트로에서 서쪽으로 200여km 떨어진 초원에 돌무지무덤이 지난 2011년 발견됐다. 1년의 발굴 작업을 거친 끝에 드러난 무덤 속 내용은 몽골은 물론 주변국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무덤의 입구는 한국의 나무 대문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문을 지키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신이 벽을 수놓았다. 발굴 과정이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천장이 없는 것인지 양 벽에만 청룡과 백호가 남아 있다. ▲ 몽골 고원에서 발견된 고분(발굴 전). 고구려고분처럼 그 규모가 대단하다. 문은 있는 데 천장이 없는 것으로 보면 발굴과정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벽화를 그려 놓은 방을 만들어 두고, 입구와 통로도 있는 데, 천장이 없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사자의 방인 현실에는 더욱 다양한 벽화가 그려졌다. 말을 탄 병사들이 행렬하는 모습도 인형으로 절도 있게 배치됐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진시왕의 병마용을 보는 듯했다. 다양한 유물은 무덤 속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품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사용되던 동전들이 무더기로 출토된 것이다. 오수전 같은 중국의 화폐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찌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6월 8일 미국 메사츄세츠 뉴튼 공립 도서관에서는 아주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책 ≪41명의 영웅들(41 Heroines: Flowers of the Morning Calm)≫ 출판기념회를 겸한 포스터전과 음악회가 그것이다. 이날 행사장에는 지역 주민과 한국 교민을 포함한 100여명이 참석하여 학생들이 손수 그린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린 포스터를 둘러보고 설명회, 번역시 발표회, 한국의 멜로디 콘서트 및 다과회를 하면서 약 4시간에 걸친 행사를 진행했다. ▲ ≪41명의 영웅들(41 Heroines: Flowers of the Morning Calm)≫을 번역한 학생들 일부 교민 가운데는 “이제 와서 새삼 지난 과거사를 왜 꺼내느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와서 학생들이 준비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 포스터와 번역시 낭송 등을 들으며 이들이 진정한 뜻에서 한국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고는 “어른들도 하지 못한 일을 어린 학생들이 해냈다”고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행사는 박혜성 홍보대사(미국 보스턴 지역 한국 문화 홍보 프로그램) 주관으로
[그린경제=한성훈 기자] 7세기 이전의 불교, 학문, 예술은 모두 중국의 당나라가 아니라 한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으로 성립되었다. 특히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 나라((奈良)시대의 문화는 고대 한국을 빼고는 파악할 수 없다. 고 단언한 사람은 고대한일불교관계사 연구의 권위자인 다무라엔쵸(田村圓澄) 박사이다. 또한 역사학자 이진희 교수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 집필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일본 사람들의 잘못된 한국, 한국인 관을 시정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큐슈뿐만 아니라 일본 고대 문화가 꽃핀 나라(奈良), 쿄토(京都)의 고대 역사를 논할 때 삼국시대에 건너간 사람들이 닦아 놓은 선진 문화의 전달자적 역할을 무시 할 수 없다 고 했다. ▲ 기온마츠리의 12톤 가마와 그 행렬을 보려 몰려든 관광객들 그동안 일본 속의 고대 한국 문화 돌아보기 여행은 국내에 드물게 있어왔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라신을 모시는 제례의식에서 비롯된 일본 최대의 기온마츠리를 답사에 포함 시킨 것은 국내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이다. 이번 답사여행은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소장 이윤옥)가 기획하고 세븐투어가 주관하여 오는 7월 16일부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여성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단연 유관순열사를 꼽는다. 그렇다면 유관순 혼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일까? 아니다. 유관순 외에도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많다. 그러나 나머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나 사람들은 별로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안타까워 하던 이윤옥 시인은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1,2,3권을 통해 60분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세상에소개했다. 이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의 일생을 추적하여 전국은 물론이고 북경,광주,유주,중경와같은 드넓은 중국땅과 일본등지를 다니면서여성독립운동가의 삶에 헌시를 보태 세상에 내놓은 시집이 바로 ≪서간도에 들꽃 피다≫이다. 그 가운데41분을 추려 미국에서 영어로 시집을 발간했다. 번역은 박혜성 박사와 김유지니아 외 16명의 교포자녀들이 맡았다. 아래에 미국판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시집 ≪41명의 영웅들≫에 관한 영문 시와 삽화 일부를 소개한다. ▲ 권기옥 영문 시 전문 / 번역 이성민 ▲ 권기옥 편 삽화 / 그림 이성민 ▲ 남자현 영문시 전문 / 번역 안정은 ▲ 남자현 삽화 / 그림 안정은 ▲ 변매화 영문 시 전문 / 번역 이정민 ▲ 변매화 편 삽
[그린경제=한성훈 기자] 만 스물네 살의 청년 권기일은 국치를 당해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노비를 해산하고 재산을 처분하였다. 그리고 1912년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아준 조부모님을 고향땅에 남긴 채 끝내 아내와 딸 동생과 새어머니의 대가족을 이끌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만주 땅으로 떠났다. 김희곤 교수는《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에서 추산 권기일 선생의 만주행을 그렇게 표현했다. 추산 권기일(1886-1920, 34살로 만주에서 순국) 선생은 안동 권 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후예인 가징(可徵)공의 10대째 장손으로 대를 이어야 할 종손이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벼슬이 통훈대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안동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코자 만주로 먼 길을 떠났는데 그 뒤를 이어 추산 선생도 1912년 3월 만주로 떠났던 것이다. ▲ 할아버지 권기일 선생 손자 권대용 씨는 85년 만에 중국땅을밟아 할아버지가 순국한 곳에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 만주에서 선생은 초대 국무령이던 이상룡, 만주의 호랑이로 불리는 김동삼 선생을 비롯한 선배들이 결성한 경학사에 몸담
[그린경제=양훈 기자]한국 전통시대의 여성은 철저히 남편 그늘에 가려진 존재다. 다만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임금은 최고의 지존이자 최고의 권력자였으며 왕비는 조선 여성 가운데 절대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성으로, 이 시대의 다른 여성들처럼 단순하게 이해해선 곤란하다. 조선시대 유교지식인들은 과거 시험을 위해서도 유교 교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사서오경을 읽어야 했다. 그 오경 중 예절과 의례에 관한 책인 예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개인과 가정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예기에 천자는 6궁(六宮), 3부인(三夫人), 9빈(九嬪), 27세부(二十七世婦), 81어처(八十一御妻)를 세워 천하의 내치를 듣는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황후는 정궁인 6궁에 살았고, 부인(夫人) 3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여어(女御) 81명 등은 후궁에 살았다.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 조선 왕실에서는 예기 등을 근거로 임금의 처첩과 후궁을 당연시 했다. 고려시대에는 처와 첩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았다. 임금의 후비가 여러 명 존재하는 다처(多妻)의 형태였으며, 적실과 첩이 엄격히 구별하는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도입되면서 왕실의 가족 질서도 새롭게 재편되었다. 첫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