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심순기 기자] 몽골 수도 울란바트로에서 서쪽으로 200여km 떨어진 초원에 돌무지무덤이 지난 2011년 발견됐다. 1년의 발굴 작업을 거친 끝에 드러난 무덤 속 내용은 몽골은 물론 주변국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무덤의 입구는 한국의 나무 대문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문을 지키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신이 벽을 수놓았다. 발굴 과정이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천장이 없는 것인지 양 벽에만 청룡과 백호가 남아 있다.
▲ 몽골 고원에서 발견된 고분(발굴 전). 고구려고분처럼 그 규모가 대단하다.
문은 있는 데 천장이 없는 것으로 보면 발굴과정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벽화를 그려 놓은 방을 만들어 두고, 입구와 통로도 있는 데, 천장이 없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사자의 방인 현실에는 더욱 다양한 벽화가 그려졌다. 말을 탄 병사들이 행렬하는 모습도 인형으로 절도 있게 배치됐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진시왕의 병마용을 보는 듯했다. 다양한 유물은 무덤 속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품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사용되던 동전들이 무더기로 출토된 것이다. 오수전 같은 중국의 화폐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중국은 세상 밖의 험난한 골짜기에 숨어 사는 변방 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문화적 요소는 없는 대신에 이 무덤은 고구려의 문화적 요소는 너무나도 많다.
이 무덤을 보유한 몽골에서는 ‘600년대의 돌궐왕의 무덤’이라고 확정했다. 몽골에서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벽화무덤이다. 아무도 도굴하지 않은 순백의 무덤은 천장이 훼손된 채로 세상에 나왔지만 아직 무덤이 못 다한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가장 먼저 궁금한 것이라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냐는 것이다. 몽골에서는 당연히 돌궐인이라고 얘기한다. 현재 몽골지역에는 흉노가 살다가 지나간 뒤 돌궐이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 시간이 560년경부터 약 200년 정도다. 바이칼 호수 위의 예니세이강 근처에 살던 돌궐은 흉노가 사라진 지역으로 밀려들어 온다. 그리고 그 곳에 자신들의 터전을 내렸다.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고, 나름대로 문화도 창조했다.
하지만 바이칼 인근의 돌궐이 몽골 중앙을 지나 동몽골까지 나아가 현재의 만주지역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일부 학자들의 시각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 한국의 성황당과 비슷한 몽골의 오보와 장승
▲ 몽골 오보를 지키고 있는 장승
▲ 한국의 성황당
가장 먼저 지난 92년 세종대학교의 고 나대일교수와 당시 서울대학교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의 천문현상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고구려의 영역은 바이칼이 포함되는 현재의 몽골지역이다. 울란바타르와 동몽골 일대는 당연하게도 고구려지역에 포함되고 있다.
둘째로 부여와 고구려 발해 모두 명마를 양산했다는 중국의 기록물도 고구려의 영역이 몽골지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몽골사를 연구하는 박원길에 의하면 칭키스칸 부족의 어머니는 알랑고아인데 그녀는 바로 고주몽의 셋째 딸이라는 것이다. 이는 몽골비사라는 몽골역사에 나타나는 기록이다.
넷째로 몽골과 우리는 말의 순서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말도 참 많다. 이 또한 몽골지역이 고구려의 영향에 속했거나 고구려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동일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황당이 몽골에는 무척 많다. 오보(혹은 어워, 오워)라고 불리는 몽골 성황당은 우리네 성황당과 같다. 우리네 마을 어귀나 동네를 접어드는 잿마루에는 어김없이 있던 성황당. 왠지는 모르지만 무수한 돌탑과 오색 깃발이 늘어져 있던 민간신앙은 지금의 몽골에도 만연해 있다.
잘 모르는 국어학자와 민속학자들은 이를 원나라의 영향이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신구당서 등에 고구려를 이르기를 “고구려 사람들은 귀신에게 제사 지내기를 좋아해 마을 곳곳에 당집이 있다”고 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
고구려의 매사냥은 그대로 몽골에 이어졌는데도 조선의 매사냥을 마치 원나라의 영향인 것처럼 마구 떠들던 한 국어학자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는 철저하게 매사냥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었다. 그에게 아무리 고구려에서 매사냥이 활발했다고 말해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씁쓸함을 달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몽골은 어쩌면 고구려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몽골지역이 고구려 지역일 가능성도 많다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은 몽골 초원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의 주인공 때문이다.
문화라는 것은 남의 것을 수용하면 빠르게 발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랜 시간 끝에 축적되는 것이다. 문화를 보면 그 주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구려는 유럽과 끊임없이 교류가 이어지던 나라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말할 기회가 있으므로 짧게만 이야기 하자면, 빗살무늬토기의 길, 고인돌의 길, 프레스코의 길, 금관의 길, 인류 이동의 길을 생각해 보면 이에 대한 어느 정도 답을 구할 수 있다.
글쓴이는 몽골초원 벽화고분의 주인공은 고구려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기초한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단 무덤의 형식이다. 몽골에 돌궐인의 무덤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돌궐의 무덤이 발굴되었지만 이번처럼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없었다. 돌궐의 제사유적, 묘비 등도 존재하지만 벽화 무덤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벽화를 그린 무덤이어서 무조건 고구려인이 그 주인공이라는 것은 아니다. 일단 무덤 양식이 기존의 돌궐의 무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구조에 들어가서 보면 고구려 벽화무덤처럼 전실과 현실로 구분되어 있다.
이처럼 전실과 현실로 구분되어 있는 무덤들은 중국에도 존재하고 고구려의 봉분 무덤, 백제 지역의 전방후원묘에서도 전실과 현실을 구분한다. 하지만 돌궐의 다른 무덤에서 전실과 현실이 구분되어 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인 일 가능성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무덤 입구의 나무문과 함께 있는 자물쇠다. 자물쇠는 마치 한국의 곳간 자물쇠와 매우 흡사하게 생겼다. 우리 고유의 자물쇠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이다.
▲ 무덤을 들어서는 입구의 나무문. 한국의 문을 보는 듯하다.(왼쪽), 무덤 입구의 나무문에 부착된 자물쇠.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이번에 말할 마지막 증거는 무덤 입구를 들어서 긴 통로 즉, 전실에 있는 벽화이다.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는 듯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청룡과 백호의 등장이다.
고구려에서 사신의 기록은 3대 대무신왕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덤에 사신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한국의 무덤엔 줄곧 사신을 그려왔다. 하늘을 네 구역으로 나눠 각각을 담당하는 신이 바로 현무 청룡 주작 백호다. 그리고 이들은 망자를 역시 지켜주는 하늘의 신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왕릉의 경우에는 벽화와 사신을 그렸다.
하지만 돌궐에 사신의 개념이 있다는 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돌궐인들에게 더구나 그 민족의 기원이 정확하지 않은 그들에게 갑자기 사신이 존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수 있다. 앞서서 이야기 했지만 몽골초원은 수없이 많은 고구려인들이 다니던 길이기도 했고, 살았을 가능성도 매우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고구려인의 무덤이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에는 몽골 초원의 무덤 현실의 벽화와 유물을 가지고 고구려인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 몽골 벽화고분의 그려진 사신 중 청룡
▲ 평양지역 강서대묘에 그려진 청룡
심순기 :
체험학습의 메카 한국체험학습교육협의회 대표
전 주간현대 편집국장
전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역사문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독립운동의 대부 홍암 나철 조연출'/2004년 2월 29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