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법수사는 신라 하대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한 절로, 합천 해인사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던 절이다. 법수사의 지형적 위치는 가야산 계곡의 경사진 곳을 석축을 쌓아서 계단식 터를 다지고 건축물들은 위계질서를 잘 갖추도록 계획하였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당시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국서를 보내 신라를 고려에 바치면서, 막내 아들을 화엄종의 절로 출가하여 중이 되게 하였는데, 그의 법명은 범공(梵空)이며 후에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법수사가 언제 폐사 되었는지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절들이 함께 모여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이 있었다는 기록이 《경산지》 불우조에 전한다. 현재 법수사터 아래에는 백운동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당간지주도 있다. 발굴조사 뒤 정비한 법수사터의 주요 전각 위치에는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건물의 초석들이 놓여있고,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형식의 3층석탑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세워져 있다. 다만 석탑의 상륜부는 많이 손상되고, 찰주를 세웠던 노반만이 남아있다. 탑의 전체적 비례는 불국사 석가탑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며, 맨 아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합천하면 먼저 떠오르는 절, 해인사가 있지만 예전에는 그에 못지 않은 많은 절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영암사터를 찾아본다. 합천 영암사는 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황매산의 신령스러운 영험한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아래 절을 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꾸어오던 절은 언제인지 모르게 퇴락하였고, 지금은 절안에 돌로된 기단과 석축과 삼층석탑과 귀한 모습의 쌍사자석등 등 돌로된 유물들만 남겨놓은 채 사라지고 말았다. 영암사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어 그 창건 연대도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국사로 추앙 받던 한 스님의 탑비의 탁본으로 적연국사라는 스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적연국사가 고려 현종 5년(1014) 83살로 입적하여 영암사 서본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영암사에는 당시에 적연국사의 비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만 남고, 비신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적연국사의 부도가 영암사에서 1.5km 지점의 산 중턱에 현존하고 있어 비문의 내용을 그나마 알수 있다. 영암사터는 영암(영험스러운 바위)인 황매산 바위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데, 지형이 평탄치 못하여 금당을 세운 곳에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리산 법계사는 한국에서는 해발 1,400m 로 가장 높은 고지대에 있는 절이다. 법계사는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해발 1,915m)의 동쪽 중턱에 있는 절로 그 창건은 신라 진흥왕 5년(544)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연기조사는 인도의 스님으로 한국에 들어와 지리산 이곳 저곳 명당에 터를 잡아 절을 창건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절찰은 구례 화엄사다. 이렇게 세워진 유서 깊은 절인 법계사지만, 많은 전란과 조선시대 억불숭유 영향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막지나고 터진 한국전쟁의 말기에는 지리산으로 들어온 빨치산의 소굴이 되어 그 소탕작전 과정에서 법계사는 바위토굴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각이 불타고 말았다. 이런 아픈 상처를 딛고 다시 전각들을 세워 오늘에 이른 것이다. 법계사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있는데, 이 탑은 법계사의 중심지 커다란 바위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 탑 바로 아래에는 불상이 없는 전각(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 대웅전 등에는 불상을 모시지만,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은 그 자체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별도로 불상은 두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