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확실한 쓸모가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꾸미개 곧 장신구도 그렇다. 꾸미개가 없다고 해서 크게 불편하진 않지만, 꾸미개가 있으면 일상이 훨씬 풍요로울 수 있다. 박세경이 쓴 이 책, 《곱구나! 우리 장신구》는 일상을 아름답게 가꿔주었던 전통 꾸미개를 다룬다. 지금도 특별한 날에는 꾸미개를 즐겨 착용하지만, 예전에도 일상을 빛내주는 용도로는 꾸미개만 한 것이 없었다. 혼인이나 과거급제처럼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꾸미개는 특히 빛을 발했다. 꾸미개에 얽힌 옛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정겹다. 돌잔치, 혼인, 장원급제, 장례와 같이 굵직굵직한 삶의 큰 사건에는 늘 꾸미개가 있었다. 일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중요한 순간들을 가장 예를 갖추어 진중하게 맞이했던 진심이 느껴진다. 그 가운데 장원급제 때의 차림과 꾸미개가 특히 눈길을 끈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처럼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연두색 앵삼을 입고, ‘복두’라는 관모를 쓰고, 복두에 어사화를 꽂았다. 어사화는 보라색, 노란색, 다홍색 등 다양한 색깔로 만든 꽃으로 임금이 내린 꾸미개였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3) 아름답고 똑똑하고 용감한 그 여인한테 공민왕은 첫눈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원나라의 보탑실리 공주. 안타깝게도 공민왕은 고려를 침략한 철천지원수, 원나라의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공민왕과 노국공주. 이들은 부부였다. 그것도 금슬이 아주 좋은 부부. 둘의 사랑은 무척 강력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둘의 사랑이 없었다면 고려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공민왕이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고 조선의 탄생은 영영 없었을 수도 있다. 이 책, 권기경ㆍ고정순의 《칠백 년을 함께한 사랑 –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우리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인 두 사람의 사랑을 다정한 문체로 들려준다. ‘역사스페셜 작가들이 쓴 이야기 한국사’답게 정보와 재미를 둘 다 잡은 책이다. 둘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때에 혼인했다. 충숙왕의 둘째 왕자, 공민왕은 십 년이 넘게 연경에 볼모로 잡혀 있던 차에 원수의 나라인 몽골 공주와 혼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원 황실의 부마가 되면 고려의 왕이 될 수 있었기에 혼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언제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쇠의 바다, 김해! 김해(金海)는 이름이 곧 ‘쇠의 바다’를 뜻할 정도로 철 생산이 많았던 곳이다. 지금은 평야와 산이 많지만 1,600년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항구 도시였다. 동아시아 으뜸 철기 공방이 줄지어 있던 금관가야는 신라의 공격으로 결국 멸망하고 만다. 지금도 김해에는 찬란했던 가야 시절을 보여주는 유적이 많다. 대성동 마을에서 발견된 가야왕국의 무덤은 그 가운데서도 많은 고고학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 까닭은 바로, 가야왕국의 전사들이 묻힌 57호 무덤에서 나온 뼈가 여자의 뼈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가야왕국의 여전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종숙이 쓴 《철의 나라 철의 여인들, 가야의 여전사》는 역사적 상상력을 토대로 가야의 여전사가 누구였는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주인공 ‘여의’가 여전사가 되었는지, 어떻게 57호 무덤에 묻혀 금관가야의 전설로 남게 되었는지 선명히 그려진다. (p.7-8) 대성동 마을에서 발견된 가야왕국의 무덤은 거의 180기가 넘었다. 그 가운데 진이의 호기심을 끈 것은 57호 무덤이었다. 고고학자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진이는 숨이 멎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창백한 낯빛, 수염 없는 매끈한 턱, 가느다란 목소리... 흔히 내시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모습들이다. 내시는 그림자처럼 임금을 수행하면서 궁 안팎의 일을 두루 살피는 벼슬이었다. 비록 거세됐다는 까닭으로 세간의 인식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높은 영화와 권력을 누릴 수도 있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내시는 거세된 만큼 자손을 볼 수 없었지만 대체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유지했다. 윤영수가 쓴 책, 《그림자처럼 왕을 섬긴 왕의 남자 내시》에서는 내시 박계운의 양자로 들어간 서개동이라는 소년이 내시가 되기 싫어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양부의 대를 이어 훌륭한 내시가 되는 과정을 담았다. 내시가 되는 과정은 아주 고된 일이었다. 우선 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성기를 다친 소년들이 내시의 양자로 입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시대 내시들의 계보를 적은 족보 《양세계보(養世系譜)》를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성이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비록 양자를 들였더라도 원래 집안의 핏줄을 존중해 주는 내시 가문의 가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 원래 식구들은 집과 논밭을 받아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