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아마 오늘도 대한민국의 거리는 함성으로 뒤덮일 것 같다. 이는 1898년 3월께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해 3월 10일 서울 종로에는 약 1만 명의 남녀노소들이 모였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그 당시 1만 명은 오늘날의 몇 명에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인파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외침의 뜻이 같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그 함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직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판사ㆍ검사라는 이름의 법비(法匪)들인 것 같다. 그들은 죄 없는 생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기도 하고 내란 수괴를 탈옥시키기도 하고 수염에 난 불을 끄듯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깔아뭉개기도 한다. 이 자들의 폐악이 극에 달해도 그들을 징치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국민이 주인일 뻔한 일들이 일어나긴 한다. 그 원초적 체험을 우리는 언제 했을까? 1896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였다. 아관파천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독수로부터는 벗어났으나 다른 열강들의 침탈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고종의 신변안전을 미끼로 이권 획득과 침탈에 혈안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러시아의 위협은 목을 죄었다. 1896년 4월엔 경원ㆍ 경성ㆍ광산 채굴권, 8월에는 인천 월미도 타소저장소설치권, 9월에는 무산ㆍ압록강유역ㆍ울릉도 삼림벌채권을 가져갔다. 러시아는 군사기지 설치의 밑작업으로서 부산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의 석탄창고기지를 조차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앞으로 부산. 진해. 마산포 일대에 군항을 건설할 채비를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또한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1897년 8월 3일부터 13명의 군사교관과 다수의 사병을 불러들였다. 서울에만도 1,000명의 육군을 상주시키고 자국 공사관에 300명의 코삭크(cossak) 기병을 주둔시켰다. 다음으로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재정고문을 파견하고 은행(러한은행)을 창설하려 했다. 1898년에 들어서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연초부터 우리나라는 부존자원과 자주독립을 다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에 “한국민족은 한편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의 침략간섭정책과 이권침탈에 긴급히 대항하여 민족적 권익을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강을 실행하여 자주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한 내정개혁을 단행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 민족이 이 시기의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개한 민족운동이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이었다”(신용하)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모태자 산파로 탄생했다. 1898년 3월 10일(목, 음력 2월 18), 종로 상가 거리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아니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다. 무명천(백목-白木) 가게 2층 다락 위에서 한 사나이가 불같은 연설을 토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현덕호로 종로의 쌀 가게 주인이다. 그가 그날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뽑힌 모양이다. 조선의 만민들은 러시아가 파견한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퇴출시킬 것과 러한은행을 폐쇠시킬 것을 외치고 절영도(현재의 부산 영도)를 외국이 점유(조차-租借)하는 것을 반대, 규탄하였다. 이틀 뒤인 3월 12일에는 만민공동회의 성공에 고무된 수많은 남촌 주민이 자발적, 자율적으로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가 출동하자 시위대가 투석전으로 물리쳤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절영도 대신 청국의 요동반도로 해군기지를 이동하기로 했고, 3월 17일에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했으며 노한은행도 철폐했다. 독립협회는 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축하했다. “이번에 러시아에서 파견한 군사교관과 재정 고문관을 해고한 일은, 실로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훌륭한 도량으로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시고 해와 달처럼 밝게 결단하시어 독립의 권리를 굳건히 하고, 정부의 여러분께서 서로 협력하고 책임을 능히 지켜낸 데서 연유했습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정성이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본회 회원들도 감격하여 경축의 말씀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소리를 모아 축하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여러분께서는 뒤처리를 잘하시는 데에 더욱 힘쓰셔서 위로는 황제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시기를 보잘것없는 저희들은 바랍니다.”(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제1차 만민공동회는 이를 지켜본 각국 외교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각국 정부로 하여금 한반도 상황을 재평가하게 했으며,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주체적 역할을 했다. 최초의 만민공동회가 대성공을 거두자 많은 시민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이때 독립협회 회원이 4,000명을 넘었다). 회표(오늘날의 배지)를 제작하여 회원을 구분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 전인권 등 공저, 《1898, 문명의 전환》) 만민공동회의 쾌거는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첫 체험이었다. 이천만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감동이었다. 그 원초적 체험과 기억이 어쩜 민주대한민국의 기원일지도. 그 물결이 지금 우리의 가슴 속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1898년 만민공동회는 망국의 비운에서 벗어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자 모험적 실험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벼랑 끝에서 토해낸 숨 가쁜 일성이자 마지막 희망의 불씨였을 것이다. 21세기 오늘날 우리는 그 희망을 되살려내고 있지 않는가.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만민공동회가 열리던 3월 12일(토) 그날 쾌정하던 날씨가 밤에는 폭설로 변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그 뜨거운 첫 경험의 감동 위로 곧 폭설이 내릴 것이고 결국 우리의 강토는 왜가 지배하는 동토로 변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2025년 3월, 그 뜨거운 함성 위로 또다시 푹설이 내릴 것인가? 아니면 단비가 내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