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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명 “김옥균을 제거하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혁명가 김옥균을 제거하려는 조선 정부의 노력은 집요하고 절박했다. 그만큼 김옥균이 그가 처한 위험은 가팔랐다. 이번 글에서는 그 대목의 첫머리를 들추어 보려 한다. 1884년 12월 초 혁명에 실패한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인천)로 황망히 몸을 피한다. 항구엔 치도세마루라는 일본 여객선이 정박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일본배. 천신만고 끝에 배에 도착했지만, 동행한 일본인들이 김옥균 일행의 승선을 가로막는다. 당장에라도 조선의 체포조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피가 마르는 상황이다. 그 순간 구원의 손길을 뻗힌 이는 일본배의 선장 쓰지 쇼사부로. 김옥균 일행을 밤중에 몰래 승선시켜 선창에 숨겨 준 것이다. 다음날 12월 9일 영의정 심순택의 지시로 묄렌도르프(독일인으로 외교부 차관격이었지만, 실제로는 전반적인 외교업무를 관장)가 이끄는 조선군이 제물포항에 들이닥친다. 묄렌도르프는 일본 공사 다께조에게 반역자들을 당장 넘겨달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다께조에는 김옥균과 한양에서 같이 도망하여 승선해 있는 상태다. 말하자면 구명선을 같이 탄 처지다. 김옥균 일행은 설마 다케조에가 자신들을 조선군에게 넘겨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 다케조에가 김옥균 일행에게 하선을 명한 것이다. 소름이 돋는다.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또다시 선장 쓰지 쇼사부로가 구세주처럼 출현한다. “승선시키고 말고는 선장인 나의 권한이오. 공사는 관여할 바 아니오. 이들을 하선시켜 사지에 내모는 일을 나는 하지 못하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라고 그는 강하게 다케조에게 항의한다. 묄렌도르프는 계속 넘겨달라고 짓 조른다. 선장은 버티고 있다. 어두컴컴한 선창에 몸을 숨긴 김옥균 일행은 공포에 떤다. 배는 언제 떠나려나. 마침내 출항의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것은 사흘 뒤인 12월 11일. 조선의 바다를 떠난 일본배가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이틀 뒤였다. 구사일생으로 일본 땅에 도착한 사람들의 명단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정난교, 신응희 등 8인이다. 김옥균은 배에서 내릴 때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된다. 목숨을 구해준 쓰지 선장이 지어준 것이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험난한 시련이었다. 갑신정변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서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한양에 파견되었다. 그에게 조선 정부는 김옥균 일당을 송환 조치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조선 정부는 포기하지 않는다. 1885년 3월 서상우와 묄렌도르프를 사절로 일본에 보낸다. 그들은 일본당국에 망명자들의 송환을 요청하는 공식문서를 제시한다. 김옥균 일행은 언제 압숭될지 모른다는 악몽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 사절의 송환 요구를 거절한다. 일본 정부가 망명객들에게 온정적이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노골적인 냉대에 김옥균 일행은 울분을 삭여야 했으니까. 본국 정부의 옥죄임과 일본 정부의 냉대 속에서 박영효와 서광범 그리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난다. 박영효는 다음 해 5월 일본으로 되돌아왔지만 다른 두 사람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어 나간다. 변수 역시 다음 해인 1886년 미국으로 떠난다. 한편, 조선정부는 공식적인 송환요청이 계속 거부당하자 다는 방도를 취한다. 김옥균을 암살한다는 것이다. 1885년 6월 김옥균을 암살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장은규와 송병준이라는 자였다. _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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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소의(予之所倚, 너를 의지한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상대를 믿는다는 한마디가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세종 14년(1432)에 황희가 나이가 많아 사직을 요청했을 때 세종이 하신 말씀이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영의정 황희가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잘못 태종께서 선택하여 후히 대우해 주신 은혜를 입어 여러 어진 이들과 섞이어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수년 동안 죄를 마음으로 달게 받으면서 궁촌(窮村)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더니, 하루아침에 착한 임금의 세상에 다시 거두어 쓰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애써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더군다나 신은 올해의 생일로 이미 만 70살이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나이가 노쇠에 이른 것을 가엾게 여기시며, 신의 정성이 깊은 충정에서 나온 것을 살피시고,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직위에서 물러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어려운 것을 극복(克服)하는 임금은 보필(輔弼)하는 재상의 어짐에 힘입는 것이니, 도모하여 임용한 옛사람을 어찌 그 물러가고 나아가는 일이 쉽게 할 수 있겠는가. ... 세상을 따난 밝으신 아버님께 신임을 받아 일찍 승지의 직에 복무하였고, 곧이어 가장 신임하는 중신의 위치에 두어졌도다. 만약 병이 일어난다면 마땅히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될 것이요, ‘경의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는 좋겠지만 그리하면 나의 의지할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사직하려고 하는 일은 당연히 윤허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14/4/20) 그러나 황희도 이후 세종 17년에 다시 사직하기를 요청한다.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영의정부사 황희가 뜻을 올려 사직하기를, ...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태종(太宗) 전하의 뽑음과 후히 대우하심에 입어 여러 어진이와 같이 섞여 진출하였사오나, 아직 털끝만 한 도움을 드린 바 없어 한갓 밤낮으로 일하려는 마음만 간절하였는데, .성상께옵서 천지의 넓으신 아량과 부모의 인자하신 마음으로, 뭇사람의 비방이 집중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옛 신하라 생각하시고, 불초한 이 몸을 만인이 쳐다보는 자리의 우두머리로 발탁해 두시므로, 비록 이 몸이 이지러지고 부서지는 데 이르는 한이 있다고 해도 보답이 어렵되, ... 그대로 미루어 이제까지 힘써 종사해 왔사오나, 귀가 먹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기가 어려우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따르지 못하여 걸음을 걸을 때마다 쓰러지곤 하니, 이는 대개 원기가 쇠약함에 따라, 여러 병이 마구 침범해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신은 출생한 그날부터 이미 70년의 세월이 되었는바, 늙어 벼슬을 물러감은 나라에 상례가 있는 법이요, 병으로 인하여 한가함을 구하는 것 역시 진정 헛치례가 아니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나이 이미 만년이 임박하였음은 불쌍히 여기시며, 윤허의 윤음을 내리시어 직위를 면하는 것을 허락하옵시면,.. 생을 이루게 하옵신 큰 은혜를 우러러 보답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에 비답(批答)하기를, "어려움을 극복한 임금은 어진 보필에 힘입는 법이라, 내가 미약한 몸으로 봄 얼음을 밟는 듯이 자나 깨나 오직 삼가는 일념으로 대신(大臣)을 전임시켜 전래의 공업(功業)을 한층 더 빛내려고 하였는데, 당당(堂堂)한 한 원로가 우뚝이 산악처럼 서 있었으니, 이에 공을 그 수위에 앉혀 모든 벼슬아치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이요, 하물며 경은 그 나이 아직 아주 늙지 않았고, 병 또한 깊은 데까지 이르지 않았은즉, 기력이 오히려 강건하여 국정을 잡을 만하고, 만일 질병이 생겼다면 마땅히 의약의 치료를 가해야 할 것이요, ‘경의 자신을 위한 계교는 좋으나, 나의 의지함은 어찌하려는 것인가. 남을 높이고 제 몸을 낮추려는 생각을 자제하고 속히 자리에 나오기를 바라며,... 힘써 옛사람들을 생각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뜻을 갖지 말도록 하라. 사양한 바는 결코 윤허할 수 없노라." 하였다. (⟪세종실록⟫17/3/29) 황희도 우여곡절이 있는 정승이었다. 먼저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발탁해 쓴 태종과 세종의 용인술이 있었다. 태종은 강릉부사 황군서의 서자 곧 어머니가 노비인 황희를 도승지로 발탁했고 세종은 그에게 18년 동안이나 정승직을 맡겼다. 둘째는 황희의 사태 파악능력이 뛰어나 일의 우선순위를 밝히고 다양한 인재까지 발굴하고 추천하였다. 건국시기 조선의 예제를 정비한 허조, 야인정벌의 최윤덕. 그리고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 등을 추천한 것도 황희였다. 그러나 이렇게 황희가 뛰어난 정승이 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인재를 신뢰하고 보호하는 세종의 정치적 안목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