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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신륵사의 고귀한 보물들

강변과 어우러져 더욱 빛나는 특이한 절

[우리문화신문=조판형 기자 ]

 

▲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구룡루

 

▲극락보전

 

▲ 신륵사 다층석탑(보물제225호)

 

▲조사당(보물제180호)

 

▲신륵사 다층전탑(보물제226호)

 

▲대장각기비각(보물제230호)

 

▲보제존자 석종(보물제228호)

 

▲강월헌과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원구형 석조부도(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4호)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은행나무(수령 600년)속 관음보살 모양 고사목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따르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각주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보통의 절들은  산속에 있는데 반해 신륵사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정자들처럼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특색이 있다.  신륵사는 남한강 조포나루 인근에 있어 옛날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들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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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판형 기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문화채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문화유산채널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