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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세상 빛을 보러 뛰쳐나왔던 31번 국도

절개산을 찾아서 2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3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30여 분 동안 남쪽으로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 필립보 생태마을이다. 성 필립보 생태마을은 생태계의 파괴를 막기 위한 환경운동의 전개, 자연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치유 그리고 신앙 강화를 위하여 천주교 수원교구 환경센타에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생태마을이라고 하니 평화로운 어떤 마을 모습이 떠오르는데, 언덕 위에 성당과 거기에 딸린 몇 개 건물만 보인다. 그런데 절개산 간다면서 여긴 왜? 여기서부터 절개산 밑까지 절개 둘레길이 나 있어서,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둘레길을 걷기 전에 언덕 위로 올라간다. 건물 옥상에서는 예수님께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예수님의 저런 모습을 보니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래서인가? 천주교인들이 피정을 하러 이곳에 많이 온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 뒤에 보이는 둥그런 돔은 뭐지? 여기서 천문 관측도 한다고 한다. 오호!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찬송가 515장이 떠오른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 평상시 삶이 바빠 하늘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하나님이 창조한 온 우주도 바라보라며 저 돔을 설치한 것일까?

 

 

 

마당에는 사제 김창린 필립보(1926~2012)의 흉상이 서 있다. “반백 년 하느님 나라 선포하시고 평창강 휘감아 돌아가는 이곳에 영적 쉼터 마련하여 삶에 지친 모든 이에게 행복 선물하신 호랑이 신부님을 그리워하며” 흉상 밑의 좌대에 새겨진 글이다. 김창린 신부는 생태마을 관장인 황창연 신부가 이곳에 생태마을을 만들려고 동분서주할 때, 자금이 모자란다는 말에 평생 모아둔 장학금을 선뜻 내준 분이란다. 게다가 김 신부는 황 신부가 신학생 때 본당 신부로 모셨던 분이다.

 

그렇기에 김 신부님이 돌아가시자 황 신부는 김 신부를 그리워하며 이곳에 모신 것이리라. 호랑이 신부님이라고 그랬던가? 나를 쳐다보는 김 신부님의 얼굴에서 호랑이 같은 근엄함이 보이면서도, 또 그 속에 따스한 기운이 감아 도는 것 같다. 전망대에 서니 평창강이 바로 밑에서 흐르고 있고, 터널을 막 빠져나온 31번 국도가 평창강을 건너고 있다. 그리고 국도 다리 밑을 지난 평창강은 조금 더 가다가 능선을 휘감아 돌며 시야에서 사라지는데, 이 교수님은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절개산이라고 한다.

 

이제 절개 둘레길로 들어선다. 조용하다. 지금 둘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다. 잠시 오르던 둘레길은 천천히 내려가더니 조그만 포장도로를 건넌다. 그렇게 절개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앞이 열리며 정자가 보인다. 정자는 평창강에서 솟아오른 절벽 위에 앉아있다. 저 멀리서부터 달려온 31번 국도가 평창강을 건너오자마자 그대로 정자 왼쪽으로 절벽을 뚫고 들어간다. 그러니까 아까 생태마을 전망대에서 보이던 31번 국도는 이렇게 절벽을 뚫고 들어간 국도가 다시 세상 빛을 보러 뛰쳐나왔던 것이겠구나.

 

 

1580년 지대명, 이인노 등이 창건하였다는 정자의 이름은 아양정(娥洋亭)이다. 아양? ‘아양’이라고 하니 먼저 아양을 떠는 기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더구나 ‘娥’자도 계집 ‘女’가 들어가는 예쁠 ‘娥’자가 아닌가? 혹시 어떤 기생과 관련 있을까 했더니, 중국 적벽강 기슭에 있는 정자 이름에서 따온 것이란다.

 

정자 바로 밑의 절벽이 평창강에서 30m 정도 솟아올랐기에 중국처럼 적벽이라 부르고, 적벽을 적시며 흐르는 이 부분의 평창강을 적벽강이라고도 불렀단다. 그러니 이곳 정자도 중국 적벽강의 정자 이름을 본 따 아양정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여튼 중화주의에 물든 양반들은 건수만 있으면 중국 것에 잘도 갖다 붙인다.

 

적벽이라고 하니 내 추억이 어린 또 다른 적벽이 생각난다. 법무관으로 입대하여 화순 동복 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였지. 내 기억에 동복천 위로 솟아오른 화순 적벽은 이곳 적벽보다 몇 배 높았지. 그 적벽 위에서 도르래를 붙잡고 동복천을 횡단하며 내려가다가, 교관의 깃발 신호에 맞추어 손을 놓고 동복천의 시원한 물속에 풍덩!

 

당시 교관은 적벽의 이 아름다운 경치를 한번 보라고 했지만, 강도 높은 유격 훈련으로 소위 ‘좆뱅이치는’ 우리들의 눈에 그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잘 들어올 리 없었지. 그래도 나는 좀 여유가 있었다고나 할까? 처음 적벽 위에서 출발할 때는 잠시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시원한 강바람에 여유를 찾고 주위 아름다운 경치에 잠시 눈길이 갔으니까 말이다.

 

 

잠시 아양정 정자에 올라 그 옛날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을 양반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필시 옆에는 아양을 떨던 기생도 있으렷다? 그러나 아양정은 단순히 그런 아양 떠는 풍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하는 양반들의 은밀한 연락처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에서도 살아난 아양정은 결국 6.25 전쟁은 이겨내지 못하고 포화에 소실되었다.

 

그러나 아양정을 그대로 역사 속으로 스러지게 할 수 없었던 평창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63년에 복원하였다. 지금 보이는 아양정은 1998년 평창군에서 보수하여 원형을 되찾은 것이라고 한다. 아양정의 전쟁 역사를 생각하노라니, 중국 적벽의 스케일이 다른 역사도 생각난다. 조조의 백만대군이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게 대패했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나관중이 기름칠을 많이 하여 많이 왜곡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천하를 제패할 것 같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면서 위ㆍ촉ㆍ오의 천하 삼분지세(三分之勢)가 형성되었다고 하지.

 

이제 아양정을 뒤로 하고 둘레길 걷기를 계속한다. 중간에 만난 이정표는 조금 더 가면 강변길이라고 한다. 곧 평창강 강가로 내려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정표에 ‘강변길’이라고 쓰인 위에는 조그만 글씨로 ‘매화마을 녹색길’이라고 쓰여 있다. 이 교수님은 하회마을처럼 평창강이 휘감아도는 마을이 매화마을이라며 우리가 강변길로 내려가면 매화마을을 따라 걷는다고 한다. 아까 출발할 때는 절개 둘레길이라고 하더니 매화마을 녹색길이라고도 하는구나. 그런데 강변길로 가기 위해 조그만 능선을 넘어가는데, ‘마지리 연못’의 유래에 대해 적은 안내판이 나온다. 이런 안내판을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지?

 

마지리는 좀 전에 31번 국도가 평창강을 넘어오기 전의 마을이다. 그런데 옛날 마지리 고산골에 사는 나주 나씨네 집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지 사흘 뒤 엄마가 산후 빨래를 갔다 돌아오는데, 방에서 병정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엄마가 방문을 열어보니 아기가 어른 키 높이의 선반 위에 앉아 마치 군사를 지휘하듯이 장군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 집안에 장수감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장수감이 태어났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심이 가득하더니 끝내 아이를 죽이기로 한다. 이게 무슨 말? 요즘이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민주주의 세상이지만, 신분 계급이 철저한 그 옛날에 평민 집안에서 그런 아이가 태어난들 장수는 오를 수 없는 나무다. 오히려 이런 장수감의 아이는 지배계급에게는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다. 고로 집안에서는 자칫 아이 때문에 삼족이 멸하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아이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하여 아이를 마당에 눕혀놓고 떡안반과 그 위에 팥 석섬을 얹어 아이 위에 올려놓아 압사시켰단다.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ㅠㅠ 그런데 아이가 죽은 지 3일 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지리에서 강 건넛마을 응암리로 – 매화마을이 있는 동네 - 가는 길 벌판에 흙먼지가 일어나며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동네사람들이 가보니 못 보던 커다란 못(용물이)이 생겼고, 그 옆에서 용마(龍馬) 한 마리가 큰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용마를 붙들려고 하자, 용마는 뛰쳐나가 사흘 동안 마지리를 이리저리 오가며 울부짖더니 아이 무덤 옆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그 뒤부터 새로 생겨난 연못을 마지리 연못 또는 용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 이름도 아예 마지리(馬池里)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민이나 노비 집안에 너무 똑똑한 아이가 태어나면 후환이 두려워 차라리 아이를 죽인다는 슬픈 전설. 이런 전설은 여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다. 이를테면 서울 용마산에서는 천하장사로 태어난 아이를 후환이 두려워 죽이자 용마가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지. 전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 고려 시대 사노 만적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철저히 응징을 당했는데, 민초들은 역사에서 세상을 호령할만한 인물들이 그렇게 스러지는 모습을 보며 이런 전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마지리 연못이라고 할 만한 연못은 보이지 않는다. 마지리 연못이라면 응당 강 건너 마지리에 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절개 둘레길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마지리 연못 홍보하려고 여기에다 안내판을 세운 것인가?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하니 실제 강 건너편에 마지리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옆에 용마 동상을 세워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