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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상쇠를 치며 <코리안 퍼레이드>를 이끌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9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Don Kim, 김동석 교수의 국악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리틀엔젤스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1971년 6월,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유학 초기의 어려웠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치과기공학교를 들어가 기술을 배웠고, 사업을 하면서 C.S. University에서 종족음악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이야기, 1970년대 초, L.A 지역의 국악인 10여 명이 <재미국악원>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창단 기념식과 연주회를 했는데, 한국의 ‘수제천(壽齊天)’을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연주하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당시 L.A 지역신문에도 미국 내에 처음으로 한국 전통국악의 연구 보급을 맡은 <재미국악원>이 정식 발족 됐다는 소식과 함께, 앞으로 국악강습회와 실연, 방송을 통한 국악 보급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는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남가주 교포사회의 다양한 행사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공식 행사도 국악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또한 미 주류사회의 여러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조직에 실무를 담당하게 된 사람이 바로 김동석이었기에 앞으로의 모든 행사는 그가 주관하게 된 것이다.

 

L.A에서 한국교포들이 벌이는 대표적인 큰 행사의 하나가 바로 <코리안 퍼레이드>, 곧 <한국의 날>행사다. 이 행사는 재미국악원이 결성된 다음 해, 그러니까 1974년 9월 21일에, 제1회 행사가 열리기 시작해서 45년을 이어 오고 있는 뜻깊은 행사다.

 

제1회 <한국의 날> 행사 퍼레이드 사회를 맡은 미국인 빌 로마스 씨는 “코리안 퍼레이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 고유미를 두드러지게 발휘한 풍물패들의 행진이었으며 이 풍물패들을 미국 내의 다른 축제 행사에도 출연시키고 싶다.”라는 말을 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풍물패의 특유한 춤과 음악도 인상적이지만, 모자에 달린 긴 줄로 그리는 원의 광경은(12발 상모놀이) 누구나 감탄할 묘기라고 평하면서 농악대를 만들고, 이를 연습시켜 총괄적으로 지휘한 김동석 씨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이 행사를 연출한 주인공 김동석 교수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1회 <한국의 날> 행사가 열린 시기는 1974년 가을이었어요. 지금의 한국마을인 (Korea Town), LA Olympic가(街)를 중심으로 버몬트(Vermont) 길에서 웨스턴(Western) 길까지의 거리를 약 2시간에 걸쳐 행진하는 의식행사였지요. 당시 풍물패 구성을 제가 맡았는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잘해서 많은 사람에게 주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긴장되었는데, 고민 끝에 우선 교포 남학생들 10여 명을 모았지요. 그들에게 북과 장고치는 법을 설명하고, 간단한 가락들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마침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 거예요. 당시 중학생이던 리틀엔젤스 출신 허지선 양이 이민을 왔다는 거예요. 어찌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지선양은 풍물굿에 능숙했기 때문에 악기며 춤은 물론, 그 어렵다고 하는 상모도 능숙하게 잘 돌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내친김에 나도 직접 12발 상모를 연습했지요. 전에 해본 적은 없었지만 연습하니까 되더라구요, 그 후로 몇 년 동안은 직접 12발 상모를 돌리곤 했지요.

 

제가 직접 꽹과리를 치면서 진두지휘를 하여 그런대로 모양새를 꾸며 미주 이민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거리에 풍물소리를 내면서 2시간가량 행진을 했어요. 구경나온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환호를 해 주었는데, 특히 60대 중반의 한 여성 교포는 그 순간이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외국인들은 ‘원더풀’을 외치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이 행진을 시작하고 난 뒤, 인근 도시에서 퍼레이드 참여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75년 현재 김동석이 살고 있는 부에나 공원도시(Buena Park City) Parade에 초청되었는데, 당시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번 대회를 통해서 특히 느낀 것이 있다면 숙달되고 경험이 풍부한 농악인의 발굴이다.” 다만, 그가 쓴 모자나 의상이 다소 허술해 보였다”라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의 의상과 지금의 퍼레이드 의상들을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1975년, 연말에는 “헐리웃 은막의 거리에 민속을 심다”라는 신문의 큰 제목이 보이고 그 밑에 “김동석 씨의 지휘로 40 명의 단원들이 한국의 고유 의상을 입고 나와 장고춤과 풍물굿을 선보이자, 모여든 관객들은 ‘코리아 원더풀’을 연발하며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 행사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막을 올리는 행사로 한국일보가 준비한 꽃차와 김동석의 풍물패가 30만 인파의 헐리웃 거리를 관중들이 환호하는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실황은 <KTTV Ch 11>의 생방송 중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미주 이민 역사상 우리 풍물패가 미 주류사회에 전격적으로 소개되는 최초의 역사적인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어서 다음 해 1976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퍼레이드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매년 여러 인근 도시의 행사에 주된 초청 손님으로 김동석의 풍물패와 무용팀이 초대를 받게 되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