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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벽파,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의 큰 스승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5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앞에서 벽파는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설립과 운영, 선소리 산타령의 예능보유자 인정, 《가요집성》, 《한국가창대계》의 출간 등 공연이나 방송활동 외에도 교육과 저술 등 활발한 활동을 해 왔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10여 년 전 ‘벽파학술대회’에서 나는 벽파야말로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며 소리꾼으로서는 흔치 않은 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명창이며 학자가 전부는 아니었다. 벽파 선생이야말로 민요의 중요성을 강조한 진정한 국악교육자였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1955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모두가 힘겨운 재건운동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서울 종로3가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우고, 일반인과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악고교>와 <국악예술학교>를 비롯하여, 국악 전문가를 꿈꾸는 젊은 학생들에게 좌창이나 입창, 일반 민요 등 경서도 소리를 지도하면서 이 분야의 확산 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 결과, 2021년 현재 경서도 민요와 관련한 국가와 지방의 예능보유자나 전승교육사 대부분은 그의 직간접 제자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국 공립 국악기관이나 연주단체, 또는 대학이나 연구소, 교육기관이나 방송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악 전문가들 대부분은 경서도 소리에 대한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는데, 그 결정적 영향을 벽파 선생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더더욱 오늘의 일반 초 중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경⦁서도민요가 지도되고 있다는 결과도 알고 보면, 벽파와 그의 직간접 제자들의 활동이나 영향이 절대적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벽파 한 분의 영향력이 이처럼 지대하다는 점에서도 선생은 진정한 경서도 민요의 교육자였다는 점을 말해 준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벽파 선생은 바른 스승상을 심어 준 국악계의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매사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존경을 받아 온 대 사범이었다.

 

 

흔히 보면, 이름난 명인이나 명창 가운데는 스스로 자기의 음악성을 자랑하거나 목자랑, 소리자랑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좋고 나쁨의 평가는 듣는 사람들의 영역이 분명한데, 기분에 치우쳐 스스로 함몰시키는 예를 우리는 허다하게 목격하고 있다. 소위 ‘예술인인가, 아니면 쟁이인가?’ 하는 평가는 본인의 인격이나 교양과 직결되는 문제여서 항상 겸손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벽파 선생이야말로 여타 명창과는 다른 품격을 지니고 있었던 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들었던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늦은 저녁시간이었다고 했다. 벽파 선생이 학원에서 원생 4~5명을 지도하고 있는데, 웬 중년 남자가 술을 마시고 학원으로 올라와 선생을 찾았다고 한다.

 

손님; 여기 선생이 누구요?

벽파; 제가 원장입니다만 무슨 일로?

손; 지나가다가 노랫소리가 좋아서 들어왔는데, 이 소리 몇 달이면 다 배울 수 있소?

벽파; (어이없지만, 간신히 참으며) 선생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시오?

손; 아, 나는 대학 교수요.

벽파; 아, 그러시군요. 그 대학교수 되려면 몇 달만 공부하면 됩니까?

 

그리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칠판에 노래 사설을 적어 나갔다. 그 대학교수라는 사람은 말없이 칠판에 써 내려가는 벽파의 한문 사설을 보더니,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고 한다. 그다음 날, 그 중년의 대학교수는 다시 찾아와 전날의 무례를 정중히 사과하였다는 얘기다. 국악인을 무시하고 소리꾼을 우습게 알던 당시의 풍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도 고등학교 시절의 벽파 선생님을 떠 올리면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산타령>의 ‘놀량’, 또는 서울의 긴소리 ‘제비가’를 배우던 경서도 민요 시간이었다. 당시에는 민요 수업을 위한 교재가 없었기에 선생은 노래 가사를 직접 칠판에 써 놓고 수업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선생의 수업이 기다려지고 그래서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경서도 민요나 산타령을 배우는 그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이 묻어 나오는 노래 사설과 관련된 설명들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사설 가운데 역사적 인물이 나오거나, 지역의 이름이 등장할 때, 또는 주요 사건과 관련 내용들이 나오면 이를 당시의 연대, 시대상황, 또는 사건의 배경, 등등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실감이 나게 설명하시어, 마치 역사 공부 이상의 수업시간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날까지 벽파 선생은 소리만을 전승시킨 소리선생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바르게 가르쳐 준 국악계의 큰 사범으로 기억하고 있다.

 

 

2000년대 초, 선생은 생전에 착용하였던 무대 의상 1점과 음반 5점, 사진자료 등과 함께 본인의 친필 서적인 《악학궤범》 1점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악학궤범》이라는 그 방대한 악서(樂書)를 그의 친필로 옮긴 노력은 그의 한문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하거니와 그 책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 역시 후학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당시 노선생들은 벽파 선생과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죽헌 김기수 선생의 한문 실력을 높게 평가해 왔는데, 이 점은 국악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