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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그리고 우리말

빗나간 역사의식, 아직도 이희승을 예찬하다니

《우리말의 탄생》 2판, 최경봉, 책과함께, 2019

[우리문화신문=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  《우리말의 탄생 2판-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최경봉, 책과 함께, 2019)》는 우리말 사전 편찬사를 다루고 있다. 초판이 나온 지 14년 만이다. “근대사의 맥락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사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말의 존재 의미를 생각할 계기를 만들었다”(6쪽)라는 초판에 대한 평가는 2판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자료를 모으고 부지런히 쓴 노력이 돋보인다. 제목으로만 보면 오랫동안 무관심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우리말과 글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열렬히 주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주시경 이래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경성제대 ‘과학적’ 국어학 감싸기가 도드라지는 점이 첫번째 지적할 점이다. 그러면서 말글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 교조화된 민족주의, 결벽증적 도덕성의 억압(45쪽, 338쪽, 358쪽)’ 등의 표현이 보인다. 이 책은 ‘과학적’이란 말을 ‘민족주의’와 대립시키면서 과거 한글전용주의를 가리켜 민족주의 감정에서 나온 편협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학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여기서 ‘과학적 국어학’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오구라와 고바야시가 경성제대에 소개한 역사비교언어학과 구조주의 언어학을 가리킨다. 이 두 언어학은 매우 다르다. ‘과학적’ 국어학이란 이름으로 묶일 수 없다.

 

사실 역사비교언어학에서 언어학이 실증주의적 자연과학이라고 강조한 사람은 뮐러와 슐라이허다. 언어학은 경험주의 철학 전통에 속하는데 당시 위세를 떨치던 자연과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구조주의는 이성주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실증적 결과로 입증될 수는 있지만, 실증주의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다.

 

경성제대에서 ‘과학적’ 언어학을 배운 이희승은 ‘언어는 자연현상’이라고 강조하였다. “언어의 생멸소장(생기고, 없어지고 사지고 자라는 것)은 자연의 이법(원리와 법칙)에 의하여 되는 것이요, 결코 인위적으로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런 견해를 강렬히 부정하였다.

 

이희승의 이러한 견해는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의 전통을 겨냥한 것으로 그는 역사비교언어학과 소쉬르 언어학을 착각하고 있다.

 

이희승은 조선어의 특수성에서 보편적 이론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 관점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면 우물 안 개구리를 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주시경과 조선어학회 전통을 부정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일반 이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특수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모범과 표준을 외국에 두고 우리를 거기에 꿰맞추는 식이다. 경성제대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일본에 변형되어 소개된 근대적언어학의 또 다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도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났다. 유럽에서는 모두 알파벳을 쓰기에 글자가 언어학의 중심 주제가 될 이유가 없었다.

 

일본에 소개된 유럽 중심의 근대 언어학은 언어를 민족정신의 드러남으로 보고 표준화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조선어학회와 공통점이 적지 않았다. 오구라 진페이는 근대 일본 언어학의 중심인 우에다의 제자다. 우에다는 한자 폐지를 추진하였고 ‘국어’(곧 일본어) 표준화에 앞장섰고 민족어는 겨레의 정신적 혈액이라 보았다. 그 학설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경성제대 출신들은 “조선어 사랑을 으뜸”으로 삼아야 했다.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곳곳에서 이희승 사전을 미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미 지난 1994년에 이희승이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이희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조선 첫 국어사전으로 알려진 문세영 《조선어사전》에 대한 이희승의 허위 증언을 마치 사실처럼 전제하고 논의를 펼쳤다.

 

 

《국어대사전》(민중서관, 1961년 초판)도 한글학회와의 대결 의식에서 급하게 만든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오히려 ‘대표적인 사전’(310쪽)으로 미화하였다. 첫 사전이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깁고 보태어 사전을 좀 더 좋게 만들어가야 하는데, 《국어대사전》은 올림말을 무턱대고 한자어 중심으로 잡았음을 간과했다.

 

주지하다시피 주시경과 조선어학회 선열은 민족주의적이면서 과거의 인습에 대해 비판적 태도로써 오랜 중화주의적 억압과 식민지 폭압에서 벗어날 길을 말글 표준화-규범화에서 찾고 있었다. 그 결정체가 조선어사전이었다.

 

 

반면에, 이희승은 조선어학회 전통과 대결 의식에서 《국어대사전》을 만들었고 이것이 우리말글 사회에서 오랫동안 한자혼용을 위한 디딤돌 구실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그는 한글 맞춤법보다 그 근본적인 규범으로서 한글로만 쓰기에도 반대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 어문교육연구회란 단체까지 만들어 조선어학회 전통과 대결하였다. 그의 한자 섞어 쓰기의 모범은 일본이었다.

 

우리의 사전 편찬은 다른 나라에 견줘 매우 늦은 편이지만 어느 나라든 국어사전 편찬사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도 이런 역사를 쓰면서 《우리말의 탄생》은 특히 남북대결 의식과 남한 우위를 전제하고 서술하였다.

 

북녘에서 거둔 우리말 다듬기의 성과는 언급도 하지 않고 경성제대의 전통만을 긍정하였다. 이 책은 민족주의 사관의 정당성을 1945년까지로 한정하고 그 이후로는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한자 폐지를 두고 파쟁에 휩싸였으며 우리말을 위한 건설적인 노력이 북한에 견줘 모자랐음에도 그에는 눈을 감았다. 남한에서 영어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말의 탄생》에서 보이는 조선어학회 전통의 상대화 또는 부정은 분단사관, 남한 우월사관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전 펴냄에서도 ‘과학적-민족주의적’ 대립이 그대로 나타날 만큼 우리말 연구에서 대립과 파쟁의 골이 깊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