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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참 곱게 산 두 사람, 김환기와 김향안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 정현주, 예경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52)

향안에게

나 지금 들어왔어요. 아까까지 먹었던 것이 금방 또 배가 고파요.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니 (이 아이스박스는 아주 조그만데 참 실속이 있어. 우리 이런 거라도 서울서 하나 가졌더라면) 핑크빛 포도 한 송이가 남아 있어요.

참, 포도를 보면 포도를 먹으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1963년 11월 13일

 

1944년, 두 사람은 혼인했다. ‘곱게 살자’는 약속과 함께. 그렇게 김환기와 김향안은 부부가 되었다. 장차 한국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화가와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키워낸 문인의 결합이었다.

 

이 두 사람의 여정을 담아낸 책,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는 두 사람의 만남부터 이별, 그리고 남겨진 향안의 행보를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책에는 수화 김환기가 아내 김향안에게 썼던 다정한 편지와 그림, 그리고 지은이가 시적으로 풀어낸 두 사람의 서사가 차곡히 담겨 애잔한 정취를 자아낸다.

 

 

지은이는 이들이 남긴 흔적을 찾아 파리로 떠났다. 이들이 3년 동안 파리에 살며 걸었던 공원, 첫 전시를 했던 화랑, 함께 보러 다녔던 미술관을 찾아다닌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의 행복한 파리 생활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둘의 혼인은 순탄치 않았다. 김환기는 안좌도에서 태어나 당시의 풍습대로 일찍 혼인하여 아이 셋을 두고 있었고, 변동림(김향안의 원래 이름)은 ‘오감도’, ‘날개’로 유명한 시인 이상과 혼인했지만, 곧 사별했다. 각 집안에서 서로 과거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했으나,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p.32-33)

시인의 소개로 만난 김환기와 변동림은 상대의 지성에 매력을 느꼈고 서로 공명하고 공감했다. 마침내 김환기가 변동림에게 “나에게 시집와 주겠냐?”고 물었을 때 변동림은 함께 아름답게 살 것을 약속했다. 결합의 모토는 ‘곱게 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 그래도 반대는 계속됐다. ‘우리 가문에서는 그 재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자 동림은 변씨 성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김씨 성을 쓰기로 한다.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김에 이름도 바꾸었다. 남편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을 받았다. 결혼을 통해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편 아호를 아내에게 준 김환기는 새로운 아호로 ‘수화(樹話)’를 택했다. 세상 사람들은 나무와 이야기한다는 뜻이냐고 물었지만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글씨를 모아 지은 이름이었다.

 

이렇게 아내는 남편을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만든 이름’으로 불렀고, 남편은 아내를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이름’으로 불렀다. 서로 혼인을 통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아내는 남편의 인생을 그가 꿈꾸던 좋은 것으로 채워주었고 남편은 아내를 자신을 대하듯 귀히 여겼다.

 

광복이 찾아온 뒤 그는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생계는 안정되었고 둘은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성장해갔다. 수화는 자신의 예술이 세계미술계에서 어떤 수준인지 알고 싶었다. 문학을 하던 향안은 미술을 공부해 미술평론을 하고 싶었다. 자연스레 뜻이 맞은 두 사람은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1955년 향안은 먼저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둘이 동시에 떠나기엔 절차도 복잡하고 가진 돈도 부족했다. 향안은 먼저 가서 수화의 전시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녀의 추진력은 대단해서, 환기가 다음 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시 준비를 거의 끝낸 상태였다.

 

 

향안은 집안일부터 프랑스어 통역까지, 모든 것을 챙기며 수화가 오로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수화는 그 덕분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공고히 하며 성장해갔다. 첫 라디오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의 두려움도, 아내의 프랑스어 통역으로 무난히 극복해냈다.

 

(p.86)

출렁이는 두려움을 한순간 잠들게 해주는 사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주고

나로 하여금 기꺼이 용기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가게 해주는 사람.

때로는 입과 귀가 되어주고 때로는 세상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문이 되어주는 사람.

수화에게 향안은 그런 아내였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보낸 꿈같은 3년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1956년 10월, 센가(Rue de Seine)의 베네지트 화랑에서 김환기의 첫 번째 파리 전시가 열렸고, 두 번째 전시도 8달 뒤인 1957년 6월, 역시 센가의 베네지트 화랑에서 열렸다.

 

작업실을 몇 차례 옮기며 작업에 몰두하던 그들은 1959년 4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화는 1960년부터 63년까지 홍익대 미대에서 후학을 양성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안정보다는 도전이 좋았다.

 

 

언제나 도전을 멈추지 않고 국제미술계의 문을 두드리던 그는 결국 교수직을 버리고 1963년 뉴욕으로 떠났다. 거기서 작품세계를 발전시키며 세계미술계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항상 남편이 더 큰 무대에서 인정받길 바랐던 그녀는 걱정 대신 박수를 보냈다.

 

쉰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1960년대인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도전보다는 안정을 택할 나이에 수화는 다시 한번 모험을 택했다. 기존의 작품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진정한 예술가 정신이었다.

 

뉴욕에서 뼈를 깎는 시간을 보낸 그는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 바로 점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1억에 낙찰, 한국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우주’도 뉴욕 시기 작품이다.

 

수화가 뉴욕으로 떠난 지 1년 뒤, 향안도 뉴욕에 도착해 남편을 도왔다. 그러나 온종일 전면 점화를 그리며 망가진 수화의 건강은 되찾기 어려웠다. 그는 그래도 여생 동안 그림을 더 그리기 위해 목디스크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수술의 후유증 때문이었는지, 수화는 수술 뒤 곧 세상을 떠났다. 1974년 7월 25일. 그가 떠나고 나자 향안은 망연자실했다. 수화를 보내고 그를 추억하러 20년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간 향안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p.197-198)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어디를 가도 이제 다시는 수화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향안은 파리에 왔다.

파리에서 보낸 3년을 두 사람은 생에 가장 아름답던 시절로 즐겁게 추억하곤 했었다.

같이 걷던 길들을 혼자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인했다. 상실의 아픔을 딛고 남편의 작품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1976년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1977년 뉴욕에서 <김환기>전을 열고, 글을 쓰고, 전시를 열고, 미술관을 세우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2004년 2월 29일, 수화를 따라갔다. 그의 곁에 묻혔다.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알아주고, 아껴주었다. 혼인할 때의 약속처럼 정말 ‘곱게’ 서로를 보살폈다. 둘이 함께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사랑을 택했고 서로의 지기(知己)가 되어 평생 사랑했다.

 

1992년 11월 5일 문을 연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의 환기미술관은 올해로 30돌을 맞아 기념전시가 진행 중이다. 책에서 환기미술관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런 아쉬움은 미술관을 실제 방문하면 깨끗이 사라질 것 같다. 올해 여름, 환기미술관을 찾아 두 사람의 고운 사랑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전시는 7월 10일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