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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화가 박수근과 딸 박인숙의 고구려 이야기

《박수근의 바보 온달》, 박수근ㆍ박인숙, 사계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화강암에 그린 듯한 독특한 질감의 그림으로 사랑받는 ‘국민화가’, 박수근이 혼인 전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처럼, 박수근은 혼인 뒤에도 아내와 자식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집안 살림은 늘 어려웠다. 그는 생전에는 개인전을 해보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뒤늦게 지인들의 도움으로 유작전이 열릴 만큼 빛을 보지 못한 화가였다. 박수근의 딸들은 ‘아버지의 그림이 팔리는 날이면 쌀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소금물에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은 수제비를 먹곤 했는데, 밥보다 수제비를 먹는 날이 많았다’라고 회고한다.

 

그래도 참 행복한 가정이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그림책을 사 줄 수 없었던 박수근 부부는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냈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아내는 글을 썼다. 이 책 《박수근의 바보 온달》은 그때 박수근이 그린 그림에 큰딸 박인숙이 새롭게 고쳐 쓴 동화를 엮은, 가족사랑이 물씬 배어나는 그림책이다.

 

박인숙 역시 화가다. 미술 선생님으로 많은 학생에게 그림을 가르치다가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했다. 현재 양구 박수근미술관의 명예 관장이자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는 화가인 그녀는 이번 작업을 통해 아버지와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 몹시 행복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제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남겨 주신 책은 《박수근과 바보 온달》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고요.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가 손수 글을 쓴 그림책이 제게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책이었는데, 오늘날 어린이들이 읽기 편하도록 새로 써서 이제는 수많은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거예요. …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박수근의 바보 온달》 책에는 우리가 잘 아는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 아버지 주몽을 찾아간 아들 유리 이야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세 편이 실려있다. 고구려에 얽힌 세 가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박수근의 독특한 그림체와 어우러져 애잔한 정취를 자아낸다.

 

 

박수근은 이렇게 그림책을 손수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신문을 오려서 책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딸은 누런 종이에 하나하나 오려 붙여서 만들어진 책이어서 화집을 넘길 때마다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아버지가 직접 그려 주신 책을 읽고 또 읽고, 수십 번, 아니 수백, 수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기개도 배웠다. 고구려 벽화에 드러난 늠름한 기상,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딸들 또한 배웠다. 가난한 화가로 물질적인 풍요를 제공해주진 못했지만, 정신적으로 살뜰히 가족을 챙긴 박수근은 여전히 딸의 마음에 살아있다.

 

아버지는 고구려 벽화를 좋아하셨어요. 고구려 벽화를 보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버지는 고구려 사람들의 드높은 기상,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신 건 아닐까요? 아버지는 고구려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가난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는 지혜와 의지를 알려주신 것 같아요.

 

아버지 박수근이 딸을 위해 그린 그림, 그리고 딸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다시 쓴 글. 이 ‘아빠와 딸’의 훈훈한 합작품은 이제 가족만의 추억에서 세상의 모든 아빠와 딸에게 다가간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화가 박수근과 딸 박인숙이 들려주는 고구려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