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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남한산성의 치욕, 못난 역사를 기록하다

《남한산성의 눈물》, 유타루 다듬어 쓰고 양대원 그리다, 알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못난 역사도 역사다.

우리 역사에는 영광에 가득 찬, 빛나는 업적을 세운, 후세에 자랑스럽게 전할 만한 역사만 있는 건 아니다. 못난 모습도 많았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 적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서로 분열하며 탁상공론만 거듭하던 모습, 그리고 마침내 적에게 굴욕스러운 항복을 하는 모습까지. 이 모든 장면을 합친 역사가 병자호란이다.

 

1636년 병자년, 12월 겨울부터 약 두 달 동안 이어진 전쟁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60만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본래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적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다가오자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책, 《남한산성의 눈물》은 이때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이 남한산성에서 쓴 《병자록(丙子錄)》을 쉽게 풀어쓴 책이다. 일종의 전쟁일기인 《병자록》에는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 백성들의 공포,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의 불안, 남한산성 안팎의 긴박했던 순간,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까지 병자호란의 처음과 끝이 소상히 담겨있다.

 

 

비극은 그해 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병자년 늦은 봄, 청나라의 두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1635년 세상을 떠난 인열왕후를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천막을 쳐 마련한 빈소 주변에 훈련하던 병사들이 보이자 이들은 조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고, 때마침 사헌부 장령(정4품 벼슬)이던 홍익한이 두 오랑캐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청을 올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용골대와 마부대는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다. 자국의 사신이 융숭한 대접은커녕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안 청 황제 홍타이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11월 25일 이전에 높은 벼슬아치와 왕자를 보내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치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무능했다. 한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미루는 사이에 청 황제가 말한 기한을 놓쳐버렸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쳐들어올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으뜸장수 역할을 맡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오랑캐들이 겨울에는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며 태평했다. 9년 전(1627년) 정묘호란 때도 청나라 군대에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어코 전란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12월 6일부터 봉화대에서 잇따라 봉홧불이 피어올랐다. 처음에 김자점은 이 사실을 믿지 않다가, 거듭 보고받고서야 조정에 알렸다.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넌 마부대는 큰길을 따라 바람처럼 한양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면서 봉화를 차단하고 조정에 보내는 장계를 빼앗아, 조정에서는 얼마나 상황이 위급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때부터 조선 조정의 본격 무능 행진이 시작된다. 12일이 되어서야 겨우 상황의 위급함을 알게 된 조정은 강화도에 들어가서 버티기로 했고, 강화도의 수비를 맡을 강화도 검찰사에 김경징을 임명했다. 이 김경징은 너무나 자격 미달의 인물이었다. 왕실 가족을 비롯해 수많은 백성이 강화도로 건너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에도 자기 재산과 식솔들만 배에 태워,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한 백성들이 무참히 도륙당했다.

 

남한산성 또한 고립무원이었다. 차츰 성 밖과 연락이 끊겼고 식량 또한 바닥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오랑캐에 끝까지 맞설 것을 주장하는 척화파로 갈려 분열을 거듭했다.

 

그러나 척화파는 오로지 화친만을 거부할 뿐, 청이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한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결국 강화도가 함락되어 소현세자를 비롯한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포로로 잡히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청 황제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례를 마치고 나서야 인조는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p.110)

전하께서는 청나라 임금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저들이 전하를 인도하여 단 위로 올라가게 한 다음, 서쪽을 보고 앉게 했다. 전하의 맞은편에는 청나라의 왕자들이 자리했다. 양쪽 아래에는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2품 벼슬 이상의 신하들이 앉았다.

 

《병자록》의 지은이 나만갑은 이 모든 기록의 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세월이 흘러 병자년, 그때 일을 잊을까 걱정스러워 기록한다”. 그는 현명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 기억은 소실되고, 결국은 글만이 남아 역사가 된다.

 

남한산성에서 식량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나만갑 역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패배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쓰라린 법이다. 그러나 그는 치욕의 기억을 지우는 대신 새겼다. 우리가 업신여기던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스러운 기억을 상상 속에서라도 미화해보려 한 《임경업전》이나 《박씨부인전》과 같은 소설도 있지만, 못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런 기록의 값어치는 그 무엇에 견줄 데 없이 귀하다.

 

이 책은 한 번쯤 우리가 돌아봐야 할 ‘못난 역사’를 쉬운 말로 풀어내 모두가 손쉽게 접하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 지은이의 말대로 잘나고, 자랑스럽고, 번듯한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못나고, 부끄럽고, 초라한 모든 기억과 시간도 함께 품고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요즘도 강대국들의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북한의 안보 위협도 여전하다. 1636년 병자년, 적의 침략에 속절없이 무너졌던 약소국의 못난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