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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왕실도서관 규장각, 기록의 보물창고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 신병주, 책과함께어린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일할 때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마루로 내려가지 마라.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하더라도 규장각에 올라갈 수 없다. 일할 때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해라.’

 

조선 후기의 명군, 정조가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 일하는 관원들에게 내린 지침이다. 쓱 훑어봐도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창덕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 2층 건물, 규장각을 지었다.

 

 

정조는 24년 동안 재위하면서 규장각 학자들과 151종류, 3,960권의 책을 펴냈다. 직접 펴낸 책 말고도 중국이나 외국의 희귀한 책을 구해와 보관하기도 했다. 책이 귀했던 시절, 규장각은 모든 종류의 책을 모아놓은 ‘조선의 보물창고’였다.

 

이 책, 신병주 교수가 이혜숙 작가와 함께 펴낸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는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 가운데 잘 모를 법하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들을 가려 뽑았다. 옛 규장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각종 국보와 보물, 옛 책과 문서, 지도, 정부 기록물 26만여 점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자료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보여준다.

 

 

책에 소개된 자료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를 일주하고 쓴 이야기책, 《부아기정(赴俄記程)》이다. 조선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 바퀴 지구를 돈 이는 민영환이었다. 흔히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항거의 뜻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7달 동안 11개 나라를 지나 1896년 10월 20일에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온 처음으로 세계를 돌아본 사람이기도 했다.

 

(p.134)

1896년 4월 1일 민영환은 윤치호, 김득련과 함께 제물포항에서 배를 탔어. 고종이 러시아 황제에게 쓴 편지를 가지고 말이야.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50일이나 걸려서 모스크바에 갔단다. …(줄임)… 민영환 일행은 길고 긴 여행을 하면서 만난 낯선 나라들의 모습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어. 이 여행길을 기록한 책이 바로 《부아기정》이란다. 그때는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했는데 ‘부아기정’은 ‘아라사에 다다른 기록’이라는 뜻이야.

 

 

같이 갔던 김득련 역시 흥미로운 기록물을 남겼다. 그는 ‘지구를 돌면서 읊은 시’라는 뜻의 《환구음초(環璆唫艸)》를 펴냈다. 일본, 독일, 러시아 등 가는 곳마다 그 나라의 발달된 문명을 한시로 담아낸 점이 흥미롭다.

 

(p.138)

노래와 춤이 번화한 곳

떨어진 꽃만 적막하게 붉었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슬퍼하여

때때로 봄바람에 우는구나

 

이곳은 어디에 대한 시일까? 바로 바르샤바다. 그때 폴란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에서 미래의 조선에 닥칠 망국의 그림자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 흥미로운 자료는 조선시대 외국어 교재다. 조선은 중국과의 소통에 무척 신경을 썼던 만큼, 중국어 회화를 배울 수 있는 책 《노걸대(老乞大)》를 역관 교육에 주로 사용했다. ‘노’는 상대방을 높이는 말로 지금으로 하면 ‘씨’이고, ‘걸대’는 몽골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니 노걸대는 ‘미스터 중국인’이라는 뜻이다.

 

 

《노걸대》에는 나름의 서사가 있는데, 고려 상인 세 사람이 인삼과 모시를 팔기 위해 중국에 다녀오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상인들이 겪을 법한 각종 상황을 중국어로 써 놓았다. 상ㆍ하 두 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상권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주를 이룬다. 말을 사고팔 때, 북경에서 여관을 찾아 묵을 때, 인삼을 소개할 때 등 상황별 중국어가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에 담긴 규장각의 보물들을 풍부한 도판과 함께 보노라면 친절한 안내자와 규장각을 탐험하는 듯,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규장각 속의 책들이 궁금하지만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