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종묘 신실에 봉안되어 전승된 「조선왕조 어보ㆍ어책ㆍ교명(御寶ㆍ御冊ㆍ敎命)」을 비롯해 「근묵(槿墨)」, 「아미타여래구존도(阿彌陀如來九尊圖)」, 「순천 동화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順天 桐華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등 서첩 및 조선시대 불화, 불상 등 모두 4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 「조선왕조 어보ㆍ어책ㆍ교명」은 조선이 건국한 1392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이후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1910년까지 조선왕조의 의례에 사용된 인장과 문서다. 어보ㆍ어책ㆍ교명은 해당 인물 생전에는 궁궐에 보관하였고, 죽은 뒤에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모셔져 관리되었다.
어보란 임금ㆍ왕세자ㆍ왕세제ㆍ왕세손과 그 배우자를 해당 지위에 임명하는 책봉 때나 임금ㆍ왕비ㆍ상왕(上王)ㆍ왕대비ㆍ대왕대비 등에게 존호(尊號), 시호(諡號), 묘호(廟號), 휘호(徽號) 등을 올릴 때 제작한 의례용 도장이며, 어책은 어보와 함께 내려지는 것으로 의례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의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신분과 재질에 따라 어보는 금보(金寶)ㆍ옥보(玉寶)ㆍ은인(銀印) 등으로, 어책은 옥책(玉冊)ㆍ죽책(竹冊)ㆍ금책(金冊)으로 구별하였다. 교명은 왕비ㆍ왕세자ㆍ왕세자빈ㆍ왕세제ㆍ왕세제빈ㆍ왕세손ㆍ왕세손빈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訓諭文書)로 그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며,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 존호: 덕을 높이 기리는 뜻으로 올리는 이름
* 시호: 죽은 뒤에 행적에 따라 올리는 이름
* 묘호: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이름
* 휘호: 왕비에게 시호와 함께 올리는 이름
‘조선왕조 어보ㆍ어책ㆍ교명’은 종묘의 신실(神室)에 봉안되어 전승되었다. 조선왕실의 종묘는 정전(正殿) 19실과 영녕전(永寧殿) 16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신실의 중앙에는 신주장(神主欌)을 두어 신주를 봉안하고 양쪽으로 보장(寶欌)과 책장(冊欌)을 두어 어보ㆍ어책ㆍ교명 등을 봉안하였다. ‘조선왕조 어보ㆍ어책ㆍ교명’은 어보 318과, 어책 290첩, 교명 29축 모두 637점으로 지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① 제작 시기의 하한은 1910년까지로 한다. 제작의 주체는 조선왕실과 대한제국의 황실이며, 일제강점기 제작된 것은 지정 대상에서 뺀다.
② 인물의 범위는 종묘 정전 19실과 영녕전 16실에 봉안된 임금과 왕비가 받은 어보, 어책, 교명만을 대상으로 한다. 임금이 되지 못한 왕세자와 국왕을 낳은 후궁 등 종묘에 봉안되지 못한 인물은 뺀다.
‘조선왕조 어보ㆍ어책ㆍ교명’은 다음의 이유에서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할 값어치가 충분하다.
첫째,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독특한 왕실문화를 상징하는 유물로서 500여 년 동안 거행된 조선 왕실 의례의 통시성(通時性)과 역사성(歷史性)을 보여준다.
둘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및 《조선왕실의궤》 등 왕실 의례와 관련된 문헌 기록이 온전히 남아 있어 왕실 의례의 내용과 성격, 의례의 절차와 형식, 의례에 사용된 의물(儀物)의 제작자와 재료와 도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자료로서의 값어치가 높다.
셋째, 임금이나 왕비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의물로서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제술관(製述官)이 문장을 짓고, 명망 높은 서예가인 서사관(書寫官)이 쓰고, 각 분야에서 20~30년 동안 장기간 활동하면서 그 솜씨를 인정받은 관영이나 군문 소속 최고 장인들이 제작한 조형예술품의 백미로서 예술적 값어치가 높다.
넷째, 왕실의 사당인 종묘의 신실에 봉안되어 전승되어온 유물로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인 유교의 여러 덕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유물이다.
다섯째, 조선왕조의 어보ㆍ어책ㆍ교명은 지난 2017년 유물의 진정성과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으로 등재되어 그 값어치를 인정받았다.
「근묵」은 근대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서화 감식가였던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1943년 80살의 나이에 엮은 서첩으로, 가문의 8대에 걸친 수집품의 토대 위에 오세창의 감식안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서 이도영(李道榮, 1884~1933)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에 걸친 1,136명의 필적 등 국내 가장 많은 분량이 수록되어 있다. 첩장본(帖裝本)의 서첩 34책과 선장본(線裝本)의 목록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감식가: 어떤 사물의 가치나 진위 따위를 구별하여 판단하는 사람
* 첩장본: 길게 이은 종이를 옆으로 병풍처럼 접고 앞뒤로 따로 표지를 붙인 형태로 만든 책
* 선장본: 인쇄된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종이의 가운데를 접고 여러 장을 모아 앞뒤로 표지를 대고 끈으로 묶는 형태로 만든 책
서첩 34책은 필적의 크기에 따라 양면 또는 단면에 1점씩 수록하였고, 오른쪽 첨지(添紙)에는 이를 쓴 사람의 이름, 낳고 죽은 때 등을 적어 놓았다. 서첩 제1책의 표지에는 전서(篆書)로 쓴 ‘근묵(槿墨)’이라는 제목에 ‘팔십위(八十葦)’라는 문구가 쓰여 있으며 목록 1책에는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姓名)ㆍ자호(字號)ㆍ향관(鄕貫)ㆍ시대(時代)ㆍ직업(職業)ㆍ계통(係統) 등을 기록하였다.
* 첨지: 책에 무엇인가를 표시하려고 붙이는 쪽지
* 전서: 한자 서체의 하나로 진(秦)나라 이사(李斯)가 만든 전자(篆字) 모양으로 쓰는 서체
* 자호: 성인이 된 뒤 이름 대신 부르는 것으로 자는 품성과 관련된 글자를 써서 짓고, 호는 취미나 인생관 등을 반영하여 지었음
* 향관: 고향
‘근묵’은 수록된 필적의 시대적 분포가 고려 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고, 쓴 사람의 신분도 임금에서 중인, 승려 등에 이르며 그 범위가 폭넓다. 또한 수록된 필적의 문체와 내용 또한 한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 경제적 상황을 잘 담고 있는 서간문의 비중이 압도적이어서 당시의 사회상ㆍ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역대 명필들의 필적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 각 시기에 유행하던 서풍과 그 변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다. 현존 서첩 가운데 양과 질 양면에서 가장 우수한 서첩이라고 평가된다.
「아미타여래구존도」는 1565년(명종 20)이라는 제작연대가 정확한 조선 전기 불화로, 화기에 조성연대와 화제, 시주질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그려진 아미타여래구존도는 6점이 현존하는데, 국내에 있는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제작연도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채색 불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화기: 그림의 제작과 관련하여 발원자, 작가 등의 내용을 담은 기록
* 시주질: 시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삼베 바탕에 주존(主尊)인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비롯한 팔대보살이 좌우 대칭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고려 후기 불화의 요소가 남아 있으며, 동시에 주존을 중심으로 보살을 에워싸는 배치, 여래와 보살의 형상과 묘사, 필선의 사용과 문양을 배제한 색 중심의 채색법에는 조선 전기 불화의 새로운 요소, 특히 16세기 불화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본존의 머리와 몸을 둘러싼 원형 광배 형식, 둥글고 넓적한 육계(肉髻)와 반달형 중간계주(中間髻珠)의 표현, 문양이 생략된 채색 등 조선 전기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광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의장
* 육계: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
* 중간계주: 육계 중간에 있는 둥근 구슬
이러한 점에서 고려 후기~조선 전기 불화의 형식과 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자, 1565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 전기 불화 연구에 절대적 기준이 되는 자료로서 중대한 학술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조선 전기 불화는 대부분 국외에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작품은 그 사례가 드물어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값어치가 있다.
「순천 동화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수조각승 계찬(戒贊)을 비롯해 인계(印戒), 영언(靈彦) 등 7명의 조각승이 1657년(효종 8) 완성해 동화사 대웅전에 봉안한 삼불상이다. 세 불상의 복장에서 각각 발견된 조성 발원문을 통해 조성연대, 제작자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불상 제작에 필요한 상세한 시주물목이 기록되어 있어 조각승 간의 협업과 분업, 불상 제작에 필요한 물목과 공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는 점에서 큰 학술적 값어치를 지닌다. 또한 조성 발원문 외에 각 불상의 대좌(臺座) 상판에도 대동소이한 조성기가 묵서로 기록되어 있어 조성기 내용과 교차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으로 평가된다.
* 대좌: 불상을 올려두는 받침
수조각승 계찬은 1643년부터 1671년까지 활동사항이 알려진 17세기 중엽 무렵의 대표적인 조각승이다. 수조각승으로 성장하기 전, 응혜(應惠)와 승일(勝日) 등 당시 대표적 조각승의 작업 현장에서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한 인물로, 이 작품은 계찬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사례이다.
직사각형 평면을 가진 탁자(卓子) 형태의 수미단 위에 가운데 석가여래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는 양옆의 약사여래ㆍ아미타여래보다 큰 크기로 조성되었으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전형적인 석가모니의 도상을 하고 있다. 수조각승 계찬에게 영향을 준 스승이나 선배 조각승의 작품보다 다소 간략하고 단순한 표현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17세기 중반을 넘어서며 나타나는 전반적인 경향으로 조선 후기 불상 양식에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러한 흐름으로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환기의 작품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수미단: 사찰 전각 정면에 불상을 모셔두는 단으로 수미산을 본뜬 것
* 항마촉지인: 왼손을 무릎에 얹고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으로,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굴복시키고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
제작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조성발원문 등의 기록 자료가 존재한다는 점, 제작 당시의 모습대로 원래의 봉안 장소에서 온전히 전해져 오고 있다는 점, 계찬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의 중요한 전환기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보존할 만한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