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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민족대표, 이갑성 지사 독립운동 조명한 책 나와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 이태룡 엮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 일장기를 달고 나갔으니까 일본 국적이다. 이렇게 쉽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수상식 때 월계관을 썼지만, 일장기를 가리기 위해서 꽃다발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는 13일, 모 방송국에 출연한 이종찬 광복회장의 대담 가운데 한 토막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최근 독립기념관장에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이 일고 있는 김형석 임명을 철회하거나 김 관장의 자진 사퇴를 요청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내고 있어 뜻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이러한 때에 ‘광복회(光復會)’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한 연당 이갑성(硏堂 李甲成 1886~1981, 1962년 대통령장) 선생의 독립운동을 다룬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을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14일) 오전, 이 책을 쓴 이태룡 소장(국립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을 만나 책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광복절 79돌을 계기로 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 총서 4호(통권 8권)로 펴낸 이 책을 엮은 이태룡 소장은 “지난해 (2023) 8월 22일, 민족대표 연당 이갑성 지사 추모 학술대회를 광복회관 대강당에서 열었습니다. 이 학술대회에서 제가 ‘3·1운동 배경과 연당 이갑성의 역할’을 발표했고, 이어서 ‘3·1운동 이후 연당 이갑성의 독립운동’(3·1운동기념사업회장 이정은 박사), ‘해방 후 연당 이갑성의 삶 재조명’(경희대 교수 허동현 박사) 등 심도 있는 주제 발표가 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게 한 분이 바로 이갑성 선생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이태룡 소장은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2006.12)에서 발표된 김창수(동국대)ㆍ유준기(총신대) 교수의 논문도 이번 책에 실어 이갑성 선생의 독립운동을 종합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뿐더러 민족대표 33인 전체의 명예를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논문에서 이태룡 소장은 “이갑성 선생의 재판 과정에서의 신문조서, 공판진술서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갑성 선생의 제적등본을 당시 경남ㆍ전남 유력인사의 것과 비교 분석한 자료를 선보인 점(이태룡 소장), 3·1운동 이후 나라 안팎에서 활동한 행적 가운데 상하이에서의 활동상을 철저히 분석한 점(이정은 박사)과 광복 이후 연당의 정치 참여와 광복회 설립 과정의 이른바 ‘밀정설’에 대해 실체적 진실(허동현 박사)을 다뤘다.”라고 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로 일컬어지는 이갑성 선생이지만 한때 난데없는 ‘친일 밀정설’에 휩싸인 적이 있는데 이 문제는 신문에 허위광고를 낸 자가 명예훼손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고 마무리된 적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이태룡 소장은 “일단락된 줄 알았던 이갑성 선생의 밀정설은 1981년 선생이 작고한 직후, 잡지에 거짓으로 포장된 내용이 다시 실림으로써 선생을 친일 밀정설에 빠지게 하는 작태가 벌어져 광복회와 학자들이 이의 진실 규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바 있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이러한 ‘친일 밀정’ 등의 누명을 들씌우는 것은 큰 죄악이며 앞으로 논문이나 단행본 등에서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일이 있으면 강력히 대처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어 “이갑성 선생은 1919년 2월 경성의 학생대표를 모으고, 또한 종교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언서>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경성뿐만 아니라 함남 함흥, 경북 대구, 경남 김해ㆍ마산, 전북 군산 등지에도 학생을 보내 <선언서>를 배부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뒤 붙잡혀 1922년 5월까지 3년여 옥고를 겪게 됩니다. 그 뒤 1924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강연하다가 또 붙잡혀 2년(1928-1930), 이어 신간회 간사로 활동하다 6개월(1931) 고초를 겪습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제중약방(濟衆藥房)’을 경영하였으나 또다시 일제 관헌에 붙잡혀 1년(1937-1938), 흥업구락부 활동으로 7개월(1940),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한 여러 혐의로 11개월(1941), 8개월(1942), 4개월(1943), 3개월(1945) 등 모두 9년여 동안 경찰서와 감옥(형무소 전신)ㆍ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은 사실 등을 이 책에 낱낱이 밝혀놓았습니다.”라며 시종일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투지를 불사른 이갑성 선생의 삶을 광복절을 앞두고 전 국민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내일이 광복절이다. 지금 선열들이 피 흘리며 쟁취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소리가 거세다. 독립을 위해 생애 9년여를 감옥에서 보낸 이갑성 선생의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 출간을 통해 일제침략기에 저항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힘썼던 선열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 이태룡 엮음, 광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