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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젊은 소리꾼 노은주 명창, 정상에 오르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07]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국가 무형유산의 한 종목인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교육사, 이건자 명창의 <선녀와 놀량>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학력란’ 메우는 일이 곤혹스러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검정고시 새벽반에 다니며 고입(高入), 대입(大入) 후공부를 한 뒤, 대학원 석ㆍ박사 통합과정까지 수료했다는 이야기, 실기 능력과 학술적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겸손한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 20년 전부터 성북구에 개인 <국악원>을 설립하고, 강습과 강의, 공연 등을 통해 국악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노은주 명창을 소개한다.

 

그는 <심청가>의 이수자로 자기 소리공부를 하면서 학생들이나 애호가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단법인 한국판소리보존회>의 본부 사무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 7월, 제36회 목포에서 열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전원 만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10월에는 이를 확인하듯, 네 번째 ‘한농선의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가져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것이다.

 

평소 조용하고 성실한 소리꾼으로 소문이 나 있는 노은주는 전북 남원 출생이다. 고향이 ‘남원’이라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판소리가 연상될 정도로 그 고장은 많은 판소리 명창이 태어난 지역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판소리 ‘춘향가’의 주무대인 광한루가 연상될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고장이기도 한데, 그는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유명 국악인들에게 가야금과 판소리, 그리고 전통춤까지 익혔다고 한다. 남원에서 태어난 자체도 감사할 일인데, 어려서부터 유명 국악인들에게 악(樂), 가(歌), 무(舞)를 익혔다고 하니, 누가 그 앞을 막을 수 있겠는가!

 

 

노은주가 일하고 있는 서울 삼성동, <한국판소리보존회>는 이름 그대로 한국의 판소리를 보존해 오고 있는 전국적인 조직체인데 앞으로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 예를 들면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라든가, ‘유파 발표회’ 등을 기획, 실행하고 있는 비영리 법인이다. 현재는 정순임 이사장과 조동준 상임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일본 제국시대에는 <조선성악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는데, 여기서 잠시, 정병헌이 교주(校註)하여 펴낸 《조선창극사》에 나오는 <성악연구회>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동 연구회의 성립은 최초 여성 명창, 김초향(金楚香)의 제안으로 송만갑, 김창룡, 이동백, 정정렬, 한성준 등의 판소리 명창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기악의 산조 명인들과 경서도 소리의 명창들, 그리고 민속 무용수들을 규합하여 판소리를 비롯한 남도의 잡가, 창극, 산조, 민속무용, 경서도 소리, 등 한국 전통음악의 공연과 전수를 목적으로 1933년 5월 10일에 창립되었다.

 

동 연구회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공연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1935년 창극단체를 조직한 그해, 창립기념 작품으로 정정렬 편곡의 창극 <춘향전>을 서울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에 용기를 얻은 창립동인들은 동년 가을, 정정렬 편곡으로 <심청전>을 공연하였고, 1936년 2월, 정남희를 비롯하여, 오태석, 조상선, 임방울, 김연수, 박녹주, 박초월, 김소희, 등 등 소장파 소리꾼들이 주동이 되어 직속극단으로 창극좌를 조직하고, 그해 4월, 이동백 총지휘로 <흥보전>을 공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판소리가 중심을 이루는 창극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숙영낭자전>이나 <별주부전>, 그리고 <배비장전> 등을 계속적으로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들은 창극 외에도 방송출연이라든가, 음반 취입에도 참여하기 시작하여 판소리분야, 가야금산조, 거문고산조 등의 음반제작이 이루어지면서 명인 명창들의 음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힘을 얻어 한때 주춤했던 창극조(판소리)는 원각사(圓覺社) 이래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으나, 운영진이 소장파로 넘어가면서 의견이 분열하여 결국 1936 말, 해산하게 된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짧은 기간 활동하였지만, 판소리와 창극, 민속기악의 보급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이들이 남긴 공연물이나 많은 음반들은 이 분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판소리보존회>에서 판소리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의 실무자로 바쁘게 지내고 있는 젊은 소리꾼, 노은주 명창은 어려서부터 고향 땅에서 판소리의 명창, 강도근(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에게 <흥보가>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 <남원국악원>에는 판소리반, 가야금반, 무용반이 있어서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노은주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송화자(전북 무형유산 가야금 보유자)에게 가야금을 배우며 국악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판소리를 배우기 이전에 가야금을 시작했고, 중학교 때부터는 한국무용의 기본무(基本舞)로부터 <살풀이> 춤까지 배웠다는 것이다. 판소리를 배우고, 부르는 것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앞으로 판소리를 부르며 판소리와 함께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다고 하니, 노은주는 분명 소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 분명하다.(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