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
발 밖의 물과 하늘 청망한 가을일레
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
막대 끌고 나와 보니 곳마다 가을일레
-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 ‘사계시(四季時)’ 중
백로는 24절기의 열다섯 번째 절기로 9월 7일경이며 해의 황도가 165도에 올 때이다. 이때쯤이면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 옛 중국 사람들은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시기를 3후(三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이때가 되면 고추는 더욱 붉어진다.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때이다. 아직 늦더위가 남아있어 자칫 짜증이 나기 쉽지만 농촌을 생각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땡볕에 쌀이 12만 섬(1998년 기준)이나 더 거둬들일 수 있다는 통계도 있다.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하여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지장이 있다. 또 가끔 백로 때 기온이 뚝 떨어지는 '조냉(早冷)현상'이 나타나 농작물의 열매맺기에 발을 걸어 수확이 많이 줄기도 한다. 백로 때에 밤하늘에선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일 때가 더러 있는데, 이는 벼 이삭이 패고 익는 것이 낮 동안 부족해 밤에도 하늘이 도운다고 하며, 이런 현상이 잦을수록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제주도와 전라남도지방에서는 백로가 음력 7월에 들면 오이가 잘 된다고 믿으며, 제주도 지방에서는 백로에 날씨가 잔잔하지 않으면 오이가 다 썩는다고 생각했다. 경상남도의 섬지방에서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十里) 천석(千石)을 늘인다’고 하면서 백로에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의 징조로 바라본다. 또 백로에 내린 콩잎의 이슬을 새벽에 손으로 훑어 먹으면 속병이 낫는다는 말도 전해진다.
옛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을 잘 썼는데, 백로에서 추석까지 시절을 포도순절이라 했다. 그 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또 조선 백자에 포도 무늬가 많은 것도 역시 같은 뜻이다. 어떤 어른들은 처녀가 포도를 먹고 있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개탄을 한다.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 한 알 입에 넣어 껍데기와 씨를 가려낸 다음 입으로 먹여주던 그 정을 일컫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아직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지금 저 산모퉁이에는 가을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견디는 늦더위는 풍성한 오곡백과를 만들기 위한 작은 도움임을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 하나라도 나눠주려는 마음을 가질 때 나도 더욱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