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요즘 들녘에 가면 보리밭에 파란 물결이 넘실거린다. 이름 하여 ‘청보리밭’이라 하던가? 그 보리밭 옆에 노오란 유채밭이 있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게다가 옛 생각을 하면서 보리피리를 불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50~60년 어려운 때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저 보리밭을 유쾌한 심정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 징그러운 ‘보릿고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 청보리밭(사진작가 최우성) |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는 지금도 여전히 굶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50~60년대 까지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며칠씩 굶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그 당시엔 “보릿고개”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었다. 지금이야 보리밥을 건강식으로 먹지만 당시는 보리밥 먹어 방귀가 잦다며 쌀밥을 먹는 게 꿈이었던 아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보릿고개 때 아침밥을 먹지 못한 아이가 동네 부잣집의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학교에 나온 경우도 있었다. 소나무 껍질로 송구죽을 쑤어먹고 쑥을 캐어다가 쑥떡을 해먹거나, 설익은 보리를 베어서 보리개떡을 해먹는다. 그렇게라도 먹을 것이 있으면 다행이었다. 못 먹어 부황(浮黃,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이 나고 아이들의 배는 올챙이배처럼 되었으며, 어른들은 허기진 배를 우물가에서 물 한사발로 채워야 했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엔 흙을 먹는 백성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이 먹고살 것이 없자 자살하거나 식구를 버리고 도망간 것은 물론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먹거리 대신 목화씨를 먹고 죽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영조실록에 보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기관인 경상도 진휼장(賑恤場)에는 굶는 백성이 17만 9천8백 65명, 떠도는 거지가 1만 1천6백 85명, 사망자가 1천3백 26명이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굶는 백성의 숫자가 많았다.
이때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구황식물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구황식물은 무려 851종이고, 농가에서 평소에 먹는 것만도 304종이었다. 그 가운데 소나무껍질, 솔잎, 솔방울, 도라지, 칡, 도토리, 달래 따위의 나물 종류, 느릅나무 잎, 개암 따위는 인기 먹거리 품목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그 헐벗음의 상징 “보릿고개”란 무엇이고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아보자.
▲ "맥령(麥嶺, 보릿고개)이 나오는 정조실록 5년(1781) 11월 19일 치 원문(왼쪽), "보릿고개"가 나오는 동아일보 1931년 6일 7일 치 기사
≪조선왕조실록≫에도 보릿고개를 뜻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물론 한자로 쓰여 있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세조실록 11권 4년(1458) 2월 7일의 춘기(春饑)인데 “봄의 가난한 때”라는 뜻이다. 그밖에 궁춘(窮春), 춘빈(春貧), 춘기(春飢) 춘기근(春飢饉), 춘궁(春窮), 궁절(窮節)” 과 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특히 “보릿고개”라는 이름으로 딱 들어맞는 “맥령(麥嶺)"은 정조 12권, 5년(1781) 11월 29일을 시작으로 정조 때만 세 번 등장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기록에도 보이는데 1931년 6월 7일 치 동아일보의 “300여 호 화전민 보리고개를 못 넘어 죽을지경"이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따라서 ”보릿고개“는 50~60년대에 생기거나 그때 처음 불린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시대부터 쓰이던 말인 '맥령'이 우리말 '보릿고개'로 바뀐 것이다.
보릿고개. 곳간의 뒤주는 이미 바닥이 난지 오래고 먹을 거라고는 들판에 서 있는 풋보리가 전부였었다. 그 풋보리 이삭을 끊어다 검은 가마솥에 삶아 알갱이로 만든 다음 멀겋게 끊인 보리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도 넉넉지 않아 쑥을 캐와 보릿겨와 섞어 쑥개떡으로 허기를 달랬고, 꽁보리밥에 상추쌈이라도 쌓아 먹을 정도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 보릿고개 때 밥 대신 먹었던 쑥버무리
그러던 것이 70년대 후반기부터 정부의 쌀 증산정책에 따라 쌀의 자급도가 높아지고 급격한 산업화로 경제사정이 좀 나아짐에 따라 보리의 푸대접은 시작되었다. 그 뒤 보리밥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 흰쌀밥에 명절 때나 맛보았던 기름진 고기를 매일같이 즐겨먹다 보니 이제는 배가 나오고 다이어트에 혈안이 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배부른 세월이 되었다 해도 보릿고개를 잊으면 안 될 터이다. 조선시대 헐벗음에 죽어가던 백성들, 아니 들판에 나가 삐비(삘기의 전라도 사투리)라도 뽑아 먹어야 했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어쩌면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한 끼를 걱정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웃이 있을지 모른다.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을 떠올리며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풋풋한 정이야 말로 진정한 보릿고개를 넘는 일이 아닐까?
그린경제 / 얼레빗 김영조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