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일)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다른 절들보다 한결 아늑한 부여 무량사

[윤재환의 신부여팔경 10]

   
▲ 무량사 매월당, 고암 정병례, 돌, 2007
[한국문화신문 = 윤재환 기자]  부여는 백마강을 끼고 완만한 구릉들 사이에 있어 눈길을 쳐들고 올려다볼 만한 산이 없다. 그런데 40번 국도를 따라 보령 방면 방향으로 20km를 달리면 해발 575m 만수산을 만나게 된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 잡은 이 산의 기슭에 무량사가 앉아 있다. 

대부분의 절은 속세와 떨어진 한적한 데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무량사는 다른 절의 한적함보다도 한결 아늑하다. 한창이던 시절 무량사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렸는데, 지금은 도솔암, 무진암, 북진암 등이 있다. 예로부터 고시준비를 이곳에서 하면 뜻을 이룬다고 해서 고시준비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무량사 창건에 관한 기록은 네댓 가지가 있으나 각각 차이가 있어 초창 시기나 창건주를 명확하게 밝히기가 어렵다. 하지만 범일(梵日, 810~889)이 창건했다는 기록은 일치한다. 범일은 당나라에서 수도를 하고 847년에 귀국한다. 범일은 귀국 뒤 상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사굴산문을 개산(開山)하여 40여 년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스님이다. 그렇다면 무량사의 창건 시기는 9세기 말 이후로 봐야 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듯싶다. 

아담한 당간지주를 오른쪽에 두고 사천왕문으로 들어선다. 절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으로 일명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절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으며, 불도를 닦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신성하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천왕문이라 한다. 

이곳에서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손에 보검을 쥐고 있으며,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붉은 관을 쓰고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오른쪽에는 용을 잡고 왼쪽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이들은 중생 선과 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석등과 오층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이 절의 중심 건물인 극락전이 자리 잡고 있다. 


   
▲ 무량사 극락전. 흔하지 않은 2층 구조의 극락전 안은 통층이다. 네 모서리에 활주를 세웠고, 확실한 창건연대를 모르지만, 창건주가 범일 스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보물 제356호인 무량사 극락전은 겉모습만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트인 흔하지 않은 형태의 불전이다. 2000년에 펴낸 한국의 고건축 제22에 보면 무량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일곽 건물에 대한 자료와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극락전은 범일이 세운 이후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거쳤을 테지만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조선 인조 11(1633)에 중건되어 그 형태가 오늘까지 유지되고 잇다. 주간(柱間)1층이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층 높이에 견주어 2층이 낮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1층 공포보다 2층 공포가 더 크고 조밀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높이 솟아오르는 상승감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1층 기둥이 그대로 2층까지 연장되어 4면의 벽면 기둥을 이루었는데 기둥 위 공포는 18세기에 유행했던 기법을 쓴 것 같다. 12층 네 모서리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다. 

무량사 경내는 대체로 평평하다. 극락전 기단은 낮다. 수평적 형태의 대지에 극락전 이 2층으로 솟아 그 대비가 강하게 보인다. 이 불전은 조선 중기 불전의 측성을 잘 지녔다 하여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중층 불전이 있게 된 걸까?  

임진왜란은 조선 최대의 국난이었지만 불교계에선 최악의 환란이었다. 온 나라의 모든 절이 불에 타다시피 했다. 수많은 스님이 학살당했다. 왜군들이 볼 때 힘없는 관군이나 소수의 의병들보다 조직적이고 죽음도 불사하는 승병들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왜군들은 보이는 절마다 불을 질렀고, 붙잡은 스님은 무조건 죽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승병들의 활약상을 들어 절의 재건을 묵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백성은 살기에 바빠 시주 자체를 못하는 형편이었다. 무량사 극락전도 임진왜란 때 불 탄 뒤 80여 년이 지난 1679년에야 비로소 중창되었다. 극락전은 거대한 불상을 모심으로써 2층으로 중창한 것이다. 중층 건물은 규모가 크므로 자재도 많이 들어가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공사비도 그만큼 늘어난다 


   
▲ 1900년대에 찍은 무량사 괘불(보물 1265호)

현재 남아 있는 중층 불전은 그리 많지 않다. 2층 불전은 무량사 극락전, 법주사 대웅보전, 화엄사 각황전, 마곡사 대웅보전의 4동이며, 3층 불전은 금산사 미륵전이 유일하다. 이밖에 높은 절집으로는 3층 목탑인 쌍봉사 대웅전이 있고, 5층 목탑으로는 법주사 팔상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201010월에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자리 잡은 백제 역사단지 안에 9층 건물 높이인 38m의 수직형 5층 목탑이 건립되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불탄 지 1348년 만에 사비 백제 왕궁 등도 복원되었다.  

흔히 우리나라의 건물은 중층이 아닌 단층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고려, 심지어 조선조 초기까지만 해도 도읍을 비롯한 산간벽지에도 2~3층의 불전이나 건물들이 심심찮게 세워졌다. 이런 건물이 임진왜란 때 깡그리 불에 타버렸고,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백성이나 조정은 복구할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무량사 극락전이 중층으로 중창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 부여인 후손들이 가진 신심(信心)과 정성이 남다름을 알게 해준다. 

극락전에는 17세기 대규모 절에서 유행처럼 조성되었던 대형 소조불(塑造佛)인 아미타여래상이 주존불로 모셔 있고, 오른쪽에 관세음보살, 왼쪽에 대세지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졌다. ‘부여 무량사 소조 아미타여래 삼존좌상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 2008627일 보물 제 1565호로 지정되었다 


   
▲ 극락전에 모셔진 소조 아미타여래 삼존불. 조선 중기 불상 가운데 중부지역에서 가장 교모가 큰 소조불상이다.

주존불인 아미타불은 높이 5.5m 정도인데 조선 중기 불상 가운데 충청도 지역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장중하게 돋보인다. 그리고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이 만들었고, 1633년이라는 정확환 조성연대가 밝혀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이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돕고 지켜 줌)가 온 세상에 골고루 퍼지고, 어두운 마음에 광명이 비춰주기를 바라는 뜻이 담긴 석등과 탑이 있다. 무량사 석등의 받침대에는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기둥도 8각이다. 원에 이르려면 8각을 거쳐야 한다. 시작과 끝, 곧 완성을 상징하는 원이 깨달음이라면 8각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불전이나 부속 건물에는 팔각(八角)팔엽(八葉) 같은 ‘8’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는 수행을 하는 데는 8가지 길이 있는데 이를 팔정도(八正道)라 하며,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필히 8가지의 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절 안에 유독 (8)’의 숫자가 강조된 것은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은 알다시피 깨달음의 진리를 의미한다. 어둠으로 비유되는 어리석음을 쫓아내고 밝음, 곧 팔정도를 이루어 깨달음의 불’, ‘진리의 불을 밝히려는 것이 석등이다. 무량사 석등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상부구조가 8각이며, 높이는 293cm이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8면인데, 넓은 면 4, 좁은 면 4면이다. 그 가운데 넓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 여덟 귀퉁이는 추켜올려가 있어 매우 경쾌한 느낌을 주는데 보물 제233호이다. 


   
▲ 극락전 엽서. 앞에는 석등과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세워져 있다. 특히 오층석탑은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 있다.

정렴사터 오층석탑을 닮은 극락전 앞 오층석탑은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융합시킨 고려 전기의 탑으로 보인다. 보물 제185호인 이 석탑의 기단은 1단이다.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을 하나로 하여 1층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5층이니 웅장한 모습으로 보인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몸돌은 지붕돌보다 높이가 낮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어울리는 비례여서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1971년에 탑을 해체수리 했는데, 1층에서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등 삼존상이 발굴됐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이 5충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도난을 당했고, 2000년 초에 무사히 무량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