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집단)을 살피고 있다. 집현전과 집단 지성② 세종 시대 이루어진 연구 집단으로 한국 첫 ‘집단지성’이라 할 집현전이 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란 다수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용어다. 이는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전회에 이어 집단 지성으로서의 집현전의 몇 활동을 이어가 보자. (영돈녕 유정현이 사직하고자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유정현이 사직하는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용렬한 자격으로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더럽히고, 많고 후한 녹을 받으면서 처리하고 다스리는데 보람이나 효과가 조금도 없고 오히려 가물의 재앙을 부르게 되었나이다. 신은 나이 7순이 넘어 여러 가지 병이 몸에 얽혀서 기거하기도 불편하오니, 비옵건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시어 어질고 능한 이를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직집현전(直集賢殿) 정인지(鄭麟趾)를 시켜 정현의 집에 가서 사표를 도로 주고, 말하기를, " ... 경은 사양하지마는, 나는 늙지 않았다고 생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을 살피고 있다. 집현전과 ‘집단 지성’ ① 지금까지 2021년 6월 황희 영상을 시작으로 세종의 시대를 꾸민 50여 명 학자와 문인들을 다루어 왔다. 인물 탐구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조력자들의 집단이었던 두뇌집단인 집현전을 다루어 본다. ‘집현전’이란 세종 시대 이루어진 연구 집단으로 한국 으뜸 ‘집단지성’이라 할 것이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란 집단적 지성이나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다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적 능력의 결과로써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집합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 때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 기관이다.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름뿐이었고, 세종 2년(1420)에 세종이 실질적인 학문연구 기관으로 만들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고, 여러 가지 종류의 책을 만들어 내는 등 세종 때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집현전의 기능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따라 보문각(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한글날이 들어있는 10월에 훈민정음 창제의 반대를 외친 최만리를 이어 조명해 본다. 결코 인간 최만리가 아닌 역사 속 최만리의 의식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을 알린다. 창제 몇 달 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6가지 항의 상소를 한다.(지난 3항에 이어 나머지 항을 보자.) 1. (넷째) 만일에 말하기를, ‘사형 집행 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가령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직접 구두 진술을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이것과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가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귀화인 아버지를 둔 동래현의 노비 장영실의 삶은 부정확한 것이 많다. 이는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장영실의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소주(蘇州)ㆍ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한다. 실상 부친이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장영실이 관노가 된 것은 모친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으로 조선 초기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라 관기의 딸은 관기가 되었고, 아들은 관노가 되었다. 다만, 부친이 원나라 출신의 귀화인이었다는 점은 좀 다른 점이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는데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 혹은 족장과 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이긴 하지만 정확히 태어나고 죽었을 때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산장씨세보》에 보면 장영실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로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조에 무인 출신으로 세종의 천문의기제작 프로젝트에 이천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자 이후 명에 따라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이 연구팀에는 장영실이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가 이론을 뒷받침하여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으며 계속하여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어 냈다. 간의대 설치 이전인 세종 18년(1436)에는 천문의기 제작사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고 있을 무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은 이듬해에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상언하기를, "대완구(大碗口)가 너무 무거워서 싣고 부리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오직 중완구(中碗口)가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게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小碗口)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게 다시 만든다면 말에 싣는 데 편리할 것입니다. 신이 본도에서 감독해서 만들려 하오나 도내에서 철물이 없사오니, 청하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이천(李蕆, 1376∼1451))은 세종시대가 낳은 과학자의 한 사람인데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주요 실적을 확인해 보자. 세종 3년, 구리판 :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 (《세종실록》 3/3/24) 세종 10년, 성터 살핌: 공조 참판 이천을 함길도 경원 등지에 보내어 성터를 살펴 정하게 하다. (《세종실록》 10/7/21) 세종 13년, 쇠고리 제작: 근정전 등에 화재시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게 하다. "근정전(勤政殿)이 높아서 만일 화재가 있다면 쇠고리를 연쇄(連鎖)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 근정전·경회루·사정전· 인정전 등에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세종실록》 13/1/2) 세종13년: 이천으로 하여금 노궁(弩弓)의 제도를 살펴보고 만들게 하다. (《세종실록》 13/5//17) 세종 14년: 지중추원사 이천이 선척을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을 힘써 진언하다. (《세종실록》 1412/18) 세종 16년: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鑄字)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지중추원사 이천(李 蕆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으뜸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까닭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은 장영실이 노비 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으뜸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국사학과 교수들은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서울대 문중양교수)를, ‘이순지와 이천’(전북대 김근배교수)을 꼽았다.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과학기술인 15인 가운데 세종 때 △이천 △장영실 △이순지 3명이 들어갔다. 세종대왕의 재위 기간인 1418∼1450년은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볼 때 국책사업으로 과학기술을 이끌어 천문학은 물론 활자 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세종이 임금이 된 1418년은 아직 새 왕조가 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 세종 때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영실(1390년경~?)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든 인물이다. 세종은 ‘임현사능’ 곧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다.”(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세종실록》 14/4/28) 이에 따라 장영실은 세종 5년 관노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 자리를 받게 되었다. 이후 세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여러 기구를 만들었는데 천문기구는 자격루,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등이고 이를 종합해 세종 20년에 흠경각을 세운다. 흠경각 이루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지은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예전을 돌아보건대, 임금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주는 중요한 방법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 (璣衡)과 의
[우리문화신문=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의 치세에 도움을 준 조력자들을 살피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장영실이다. 장영실의 등장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다. 다음은 그 재능을 눈여겨 본 태종과 세종의 인재 알아보기이다. 더불어 그를 통해 당시 신분사회의 벽을 헤쳐 나가는 세종의 개혁정신이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조선 세종 대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영실(1390년경~?)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행주 사람으로 중국에서 온 장성휘로 귀화인이다. 아버지 집안은 노비 출신이 아니나, 어머니 기생 신분을 따라서 동래현의 관노로 태어났다. 중국인 김새 등 7명이 여진족에 붙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도망왔는데 김새는 금은 제련기술이 뛰어났다. 이에 관에서는 장영실에게 김새의 제련기술을 전수받게 했다. 동래현에 있던 장영실의 재주가 차츰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태종이 그를 발탁하였다. 후에 나온 실록 기사를 참고해 보자.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蘇州)·항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 음악의 박연 세종 시대에는 주위에 인물이 많았는데 유독 그 시대에 인물이 많았던 것인가 아니면 세종이 인물들의 능력을 북돋아 키웠는가는 논의해 볼 일이다. 즉 인물이 자랐느냐 인물을 키웠는가는 의문인데 유독 그 시대에만 인물이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유학(儒學)을 신념으로 세운 조선에서 중시한 것은 예와 악이다. 주희의 신유학에서는 예법을 법에 의한 사법(司法)보다 위에 두었다. 예법에는 국가나 개인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의 길례, 손님을 맞는 빈례, 혼인의 가례, 흉사 때의 흉례, 군사 행렬 시의 군례다. 이 중요한 개인, 나라에서의 행사에 수반되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국가를 마음으로 잇는 길이고 수단인 것이다. 세종 시대에 음악에 있어서는 박연이 눈에 띤다. 향악 음악을 정리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음악에서의 독창성 혹은 자주적인 음악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발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세종 12년 세종은 당시에는 혁명적인 즉 전통이며 그때까지는 정통이라 할 중국음악 즉 아악에 이의를 제기하는 혁신을 제안한다.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