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애타게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한 절 용주사를 세웠고, 화성을 쌓았지요. 거기에 더하여 아버지를 위한 제례악 “경모궁제례악(景慕宮祭禮樂)”도 만들었습니다. 이 악장은 1783년(정조 7)에 문신 이휘지(李徽之)가 만들었고, 뒤에 남공철(南公轍)이 고쳤지요. 이 음악들은 모두 종묘제례악인 <정대업 定大業>과 <보태평 保太平> 가운데에서 발췌하여 줄인 것들로 종묘제례악의 축소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76년(정조 즉위년) 9월에 김한기(金漢耆)와 정상순(鄭尙淳)을 악기도감제조로 삼아 경모궁악기조성청을 만들고 ≪악학궤범≫에 수록된 <정대업> 제도를 본떠 악기를 만듭니다. 그 때 완성된 악기는 편종·편경·축·어와 같은 아악기가 있는가 하면, 방향·당피리와 같은 당악기가 있고, 대금·아쟁·거문고·가야금·해금·아쟁·장구·태평소와 같은 향악기도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모궁제례악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이후로는 연주되지 않았지요. 다만, 1930년대까지도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들의 교육과
1970년대만 하더라도 술자리는 막걸리가 주류였습니다. 이 막걸리는 ‘막(마구) 거른 술’ 또는 ‘바로 막 거른 술’ 이라는 뜻입니다. 배꽃이 필 때 누룩을 만든다 하여 ‘이화주(梨花酒)’, 술 빛깔이 탁하다하여 ‘탁배기’, 술 빛깔이 하얗다 하여 ‘백주’, 농사 때 마시는 술이라 하여 ‘농주’라 했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탁배기, 탁주배기, 탁쭈라 불렀고, 젓내기술, 흐린 술이라고 하는 곳도 있었지요. 특히 커다란 사발에 가득 부어 마시던 막걸리를 왕대포라 했는데 시골 장날이면 ‘왕대포’ 간판이 쓰여 있는 선술집은 늘 북적거렸지요. 선술집 주인이 커다란 왕사발에 가득 담아내와 왕대포로 불리던 막걸리는 손가락으로 저어가며 그저 김치 한 조각을 안주로 마시곤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막걸리를 “밥”이라 했듯 밥 대신 마시는 사람이 많았고, 막걸리를 마시다보면 어느새 허기는 사라지고 얼큰하게 취기가 돌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한도 잊고 배고픔도 잊었으며, 일의 고됨도 덜어냈지요. 막걸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술 소비량의 80%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술의 우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편 종로구 내자동 71 부근에는 종교교회가 있습니다. 종교교회는 예전 그 앞에 “종침교(琮沈橋)”라는 다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요. 다리 “종침교”의 이름은 조선 성종(1457~1494) 임금 때 재상인 허종(許琮)과 동생인 허침(許沈)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입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성종은 조선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1476~1506)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를 소집했지요. 이 때 두 형제는 어전회의에 가기 전 누님에게 가 그 사실을 말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님은 윤 씨를 폐위한 뒤 연산군이 임금이 되면 화가 미칠 것이라며, 다리에서 낙마했다는 핑계를 대고 어전회의 참석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후 누님의 예상대로 연산군은 임금이 되었고, 연산군의 생모 윤 씨 폐위를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대신들은 모두 화를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피했던 두 형제는 죽음을 모면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형제가 낙마한 다리 이름을“종침교(琮沈橋)”라 했고, 형의 이름만 붙여“종교
눈 속을 뚫고 피어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매화, 그 매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매화 못지않게 10월에 피어 뭇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물매화”도 있습니다. 물매화는 가을 들꽃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며 가을 연인이라고도 하지요. 우리나라 곳곳에서 자라는 10~30cm 키의 여러해살이 풀인데 햇볕이 잘 드는 양지와 습기가 많지 않은 산기슭에서 자랍니다. 크기가 3cm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꽃 물매화 안에 온갖 우주가 담겨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물매화는 대부분 흰색 꽃이지만 일부 꽃은 암술에 빨간색이 부분이 있어 “립스틱 바른 물매화”라고 부릅니다. 강원도 평창 대덕사 계곡에 물매화 군락지가 있는데 이 계곡의 물매화는 절반 정도가 이렇게 립스틱을 바른 꽃이죠. 그래서 물매화의 절정기인 9월부터 10월까지 그곳은 립스틱 물매화를 찍으려는 사진 동호인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룹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립스틱이 묻어있지 않은 밋밋한 흰꽃을 청초하다고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같은 지역에서 꽃이
이 시는 고향 남원 땅에서 코를 베인 채 먼 이국땅에 가서 귀향하고 있지 못하는 원혼을 달래고자 내가 쓴 시 “코무덤”이다. 일본 교토(京都市 東山) 풍국신사(豊國神社) 앞에는 정유재란 당시에 풍신수길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이 코무덤은 궁극적으로 고향 남원으로 돌려주어야만 한다. 현재 남원지방에서는 교토 코무덤의 귀환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이 있다. 독자 여러분들도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그날 까지 깊은 관심과 힘을 모아주었으면 한다. 위 시를 본 남원의 한학자 소병호 님께서 ‘코무덤’ 한글 시를 한시로 바꿔 손수 글을 써서 보내왔다. 그 전문을 실어본다.
온 논의 움벼 떼는 파랗거늘 어딜 가나? 가을을 못 보고 겨울이 닥쳐오면 말없이 숨지는 목숨 가엾기만 하느나. 오늘날은 많이 달라졌지만 지난날의 재일 동포 청소년들 속에는 ‘움벼’로 그만 인생을 끝내는 일이 많았다. 다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천대와 멸시 정책과 본국의 기민정책이 그 큰 원인이다. * 움벼 : 가을에 베어 낸 그루에서 움이 자란 벼.
“질문 : 저는 명춘에 여중교를 졸업할 십팔세 소녀올시다. 가정형편상 고등학교는 못가겠는데 장차 산파가 되려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시오.(수원장애자) 답 : 지금은 산파라 하지 않고 조산원이라 하는데 우선 각도에서 시행하는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수험자격은 중학교 졸업 또는 동등이상의 학력이 인정된 자로 조산에 삼년이상 실지 수련을 받은 자 또는 간호원으로서 일 년 이상 종사해야 하니 각 대학병원에 부설된 간호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有冠子)“ 동아일보 1957년 12월 22일 자 기사에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거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조리를 하지만 예전엔 많은 임산부가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조산원이란 제3조에 따라 조산사가 조산과 임부·해산부·산욕부 및 신생아를 대상으로 보건활동과 교육·상담을 하는 의료기관을 말합니다. 예전에 이 조산원이 많았지만 2012년 8월 현재 전국에 겨우 37개소만이 남아 운영 중이어서 격세지감이지요. 그리고 이 조산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일제강점기엔 “산파(産婆
어제는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한글을 기리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글을 쓸 때 모르는 낱말이 나오면 국어사전을 찾아봅니다. 모든 말글쓰기(언어생활)는 국어사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요. 하지만, 그 바탕이 문제가 심각하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말글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수요일에 “일본이야기”를 써주시는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2010년에 펴내 호평을 받았던 ≪사쿠라 훈민정음≫ 후속 판으로 최근 ≪표준국어대사전을 불태워라!(가제)≫라는 책 원고 쓰기를 끝내고 펴낼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윤옥 소장이 왜 과격한 책 제목을 썼는지 내용을 살짝 들여다봅니다. 책은 “1. 역사적으로 부끄러운 말들 2. 일본말로 잘못 분류된 말들 3. 국립국어원의 무원칙을 고발한다.”의 3장으로 나뉘었지요. 먼저 1장에서는 국위선양, 기모바지, 기합, 표구, 잉꼬부부 따위가 있으며 2장에는 아연실색, 양돈, 옥토, 익월 같은 말들이 보입니다. 또 3장에는 무데뽀, 미싱, 앙꼬, 찌라시, 스킨십, 곤조를 예로 들어놓았지요. 그밖에 고쳐 써야 할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66돌, 창제한지는 569돌이 되는 날입니다. 한글은 세종이 천지자연의 소리 이치를 그대로 담아 창제한 글자요 예술이요 과학임은 이제 세계가 압니다. 더더욱 한글은 절대군주였던 세종의 크나큰 백성사랑이 돋보이는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한글은 훈민정음에서 어떻게 한글로 바뀌었을까요? 누구나 아다시피 한글은 세종임금이 28자를 반포할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양반 식자층에서는 이 훈민정음을 천대하여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 암클, 아랫글이라고 했으며, 한편에서는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근대에까지 이르렀지요. 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어, 언문이라는 이름은 ‘상말을 적는 상스러운 글자’라는 뜻이 담긴 사대주의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여, 주시경 선생께서 1913년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또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 반포 8회갑이 되던 1926년 음력 9월 29일 (11월 4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하여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부르다가 1928년에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 ‘한글’이 보편적으로 쓰여졌지요. 이 한글날은 《훈민정음》 서문의 <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7째 절기로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의 한로(寒露)입니다. 한로 즈음은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입니다. 이때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쉬는 새참에는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밥을 먹고 막걸리 한 사발도 나눠 먹는 후한 인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가을 들판에는 콤바인이 굉음을 울리며 논을 누비면서 타작과 동시에 나락을 가마니에 담아내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에 한가롭게 길가는 나그네도 볼 수가 없어 예전처럼 막걸리 한잔을 나누거나 논둑에 앉아서 새참 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지요.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사람들은 시절음식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겼습니다. 추어탕은 조선후기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추두부탕(鰍豆腐湯)”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또 1924년에 이용기가 쓴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별추탕”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고기라 하여 미꾸라지를 고기 어(魚)에 가을 추(秋) 자를 붙여 추어(鰍魚)라고 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