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다 변했지만 특히 주거환경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변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화장실 곧 뒷간의 변화는 큽니다. 요즘도 더러 시골집에 재래식 뒷간이 있지만 예전에는 어느 집이나 집 뒤꼍 또는 마당 끝에 뒷간이 있었지요. 화장실을 예전에는 칙간, 뒷간, 변소와 같은 말로 불렀는데 이곳에 사람들은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귀신은 젊은 여자 귀신으로 지방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했습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厠神)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이제 불볕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서갈 생각을 하고 여름을 어떻게 날 것인가 걱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조정은 무더운 여름날 죄수들을 걱정합니다. 정조실록 3년(1779) 4월 18일 자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본디 백성으로 하여금 선(善)한 데로 옮겨가게끔 하려고 하는 것이요, 또 백성을 잘살게 하는 방도에 따라 죽이려는 것이다. 의도가 진실로 불쌍히 여기는 데 있다면 고법(古法)에 없다는 데 구애되어 깨우쳐 인도하지 않을 필요는 없다. 이 뒤로 죄수를 국문할 적에는 친국(親鞫)·정국(庭鞫)을 막론하고 비가 오거나 극심한 더위를 만났을 때에는 공사(供辭)를 받고 신문하고 추국하는 곳에 짚으로 집을 지어 죄수들로 하여금 숨을 돌리고 기운을 차리게 하여 말을 제대로 하고 실정을 죄다 진술할 수 있게 하라.” 예전 일이지만 죄수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런가 하면 세종실록 15년(1433) 6월 3일 자 기록에는 “이제 온 포로가 이렇게 혹심한 더위에 털옷이나 핫옷을
“수선전도(首善全圖)”라는 지도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수선전도(首善全圖)”에서 ′수선(首善)′이란 서울을 뜻하는 말로 “서울전도”라는 뜻입니다.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역사서인 《한서(漢書)》 에 ″건수선자경사시(建首善自京師始)″, 곧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지요. 수선전도는 여러 이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고려대 중앙도서관 소장 보물 제853호 목판 인쇄본은 1840년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지도로 당시 주요도로와 궁궐은 물론 종묘(宗廟)·사직(社稷) 그리고 다리·성곽·봉수(烽燧) 등에서 부(部)·방(坊)·동(洞)에 이르기까지 중요 땅이름 460여 개를 표기해놓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많은 목판 지도 가운데서 이 목판 지도가 높이 평가받는 것은 정확성, 정밀함, 크기에서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김정호 수선전도를 바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이는 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 그러나 이미 내 전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끊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런 추상같은 기개의 시를 남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 이상룡 선생은 1932년 7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선생은 정통 유학자로 99 간이나 하는 넓은 집에 살았지만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들을 해방한 것은 물론 재산 모두를 털어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 노블리스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로 꼽힙니다. 선생은 고향인 안동에서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적 유림 인사들과 함께 근대교육기관을 세우고, 계몽활동에 힘을 쏟다가 계몽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50이 넘은 나이에 온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넘어갑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혹한의 황무지 땅에서 선생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1919
여름의 정취는 밤에 있다. 도회고 향촌이고 산곡이고 수변이고 간에 여름밤은 봄 아침, 가을 석양, 겨울밤과 같이 헤일 것이다. 여름밤은 짧은 듯하면서도 긴 것이다. 새로 한 시, 두 시…. 밤 가는 줄을 모른다. 뒤뜰에서 목물한 후 앞마당에 모깃불을 놓고 평상에 걸어 앉아 부채질도 한가로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반(半) 밤은 벌써 훌쩍 간다. 이는 1927년 8월 5일자 동광 제16호 염상섭의 “여름밤 량미만곡(凉味萬斛)”에 나오는 이야기로 뒤뜰에서 목물을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뒤란에 우물이 있는 집이 많았으므로 거기서 남자들이 주로 등물을 했지요. 등물, 등목, 목물, 등멱이라는 말로 쓰이는 등물이란 팔다리를 뻗고 엎드린 사람의 허리 위에서부터 목까지를 물로 씻어 주는 것으로 주로 남정네들이 등물을 하는데 이때 등물을 해주는 사람은 어머니거나 누이, 또는 아내와 같은 여성들이 맡았지요. 지금처럼 샤워시설이 잘되어 있는 시대에는 구태여 허리 위만 시원하게 해주는 등물을 할 까닭이 없지만 예전에는 우물가에서 흔히 등물을 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논 밭일을 하
“9월 계묘일(癸卯日)에 하늘땅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였다.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아 사직(社稷)을 태사 태직(太社太稷)으로 고쳐 쓰고 금보(金寶)와 금책문에 왕후(王后)를 황후로,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王太子妃)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쓰도록 명(命)하였다.” 위는 고종실록 34년(1897) 11월 22일(양력) 자의 기록입니다. 고종임금은 아관파천 이후 다시 궁궐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그리곤 원구단에서 황제로 등극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중국을 사대했던 나라에서 이젠 당당한 그리고 독립적인 황제국가가 됨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라의 뿌리인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바꿔 부릅니다. 태사와 태직이란 황제나라에서만 쓸 수 있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당당함을 또 한 번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태사와 태직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격을 낮추려고 다시 종묘와 사직으로 불렀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훼손한 것처럼 사직단을 사직공원
“정자 앞에는 멀리 산봉우리가 열 지어 서서 동천(洞天)을 둘로 만들었다. 이 두 동천에서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龍)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가는 것과 같은데, 한 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또 한 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두 가닥이 이 정자 밑에서 서로 합하여 돌아나가서 한 물줄기가 되었다. 이 물은 넓이가 수백 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차는데,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시냇가에는 흰 돌이 넓고 편평하게 깔려 있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낚시터를 이루었고, 현(玄) 자의 형세로 흐르는 시냇물은 이 정자의 삼면(三面)을 빙둘러 안고 돌아서 남쪽의 먼 들판으로 내려갔다. 나는 평생 구경한 것 가운데 일찍이 이러한 경계(境界)는 본 적이 없었다.” 이는 《백사별집》 제4권에 나오는 글로 조선 중기 문신 백사 이항복(1556~1618)이 꿈속에서 본 백사실 계곡을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백사 선생의 별서(별장)으로 알려진 종로구 부암동 산 7번지에는
어제는 우리 겨레의 명절 단오(端午)였습니다. 그런데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하지요. 또 단옷날을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수리란 신(神)이라는 뜻과 ‘높다’는 뜻으로 이것을 합치면 ‘높은 신이 오시는 날’이란 뜻이 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단옷날 산에서 자라는 수리취[戌衣翠]라는 나물이나 쑥으로 떡을 해먹는데, 그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므로 수릿날이라는 명절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밖에 단오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는 중오절(重午節, 重五節),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 오월절, 여아절(女兒節), 쇠코뚫는날, 소시집가는날, 소군둘레끼우는날, 미나리환갑날, 며느리날, 단양수리(端陽-), 과부시집가는날(강원도강릉), 돌베개잠자는날(강원도강릉)처럼 지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에 보면 “단오옷은 젊은 낭자(娘子)에게 꼭 맞으니, 가는 모시베로 만든 홑치마에 잇빛이 선명하네.”라며, 단옷날 입는 옷을 “술의(戌衣)”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벽파 이창배 선생은 1921년 여섯 살이 되어 한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마침 집 옆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의 영향으로 노래를 잘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경서도 소리와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인 선생들이 일본음악을 가르치고 일본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에 그것이 싫어서 조선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요. 어린 벽파야말로 애국자 중에서도 애국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퉁소의 명인으로 알려진 고모부로부터 퉁소며 단소 등의 관악기를 배웠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도의 명창들이 간혹 관산융마와 같은 시창을 부를 때면 선생이 단소로 반주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도 있었습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세 무렵, 한양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체신국의 전기과 측량기사가 된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이 무렵 동네 공청에는 왕십리패나 뚝섬패의 선소리 명창들이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원범산에게 경서도 잡가를 배웠으며 학강 최경식에게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학강의 <조
바위옷 고우니 장마가 왔는구나 장마꽃 갓잠깨고 참아욱 꽃꿈결이니 먼곳서 소리지르는 하늘울림 안아보네 * 장마꽃 : 일본자양화 * 참아욱꽃 : 무궁화 * 하늘울림 : 천둥 일본에서는 봄이 지면 첫여름이 선다. 여름이 서기에 앞서 한 달쯤 이어지는 긴긴 장마가 오는데 매일같이 비다. 줄곧 우울하기는 우울하지만 그런 속에도 가지각색의 장마꽃이 피고 참아욱꽃 봉오리가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그 꼴들이 사람에게 꿈을 안겨주고 희망을 돋군다.